"제일 중요한 것은 역사의 물결이다. 나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어떤 결정도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데 일조하는 건 절대로 하지 않는다. 당선 가능성에 대해서는 추호의 고려도 없고 어떤 가능성도 닫을 생각이 없다." - 9월 5일자 <오마이뉴스>, 안철수 "여론조사 1위 황당, 불신받은 정치권 자각해야"
안철수는 '현 집권 세력의 확장은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집권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협의를 주도했으며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불출마를 결행했다. 그러고는 표표히 학교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안철수 사태'를 지켜보면서 가슴을 졸였다. 내가 아는 안철수는 정치를 선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부리나케 정치를 선택한다면 '지금까지의 안철수'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물론 나는 안철수와 일면식도 없다. 단지 나에게 안철수는 그가 쓴 책 속에 담겨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만약 지금 시점에서 성급히 서울시장을 선택한다면 책 속에 담긴 말들이 모두 거짓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으로는 그가 출마를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의 '멘토'를 자처하는 윤여준이 '90% 출마 가능성'을 말하며 '제3지대' 등을 운운했을 때 나는 그것이 노정객의 희망사항일 따름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도 안철수는 계속해서 '참여'를 염두에 둔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전광석화처럼 박원순을 만나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털어내 버렸다. 순간 나는 번뜩 '인간에 대한 신뢰'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큰 기대 감사하고 부끄럽다. 그러나 저에게 보여주신 기대는 저를 향했다기보다 리더십에 대한 변화의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 - 6일 기자회견 발언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그에게 기자가 묻고 그가 답했다.
- 내년 대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서 그의 '운명'을 보았다.
'안철수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이 역사의 물결에 몸을 실었구나.'
안철수에게서 '새 시대의 맏형'을 보다
세간에서 '안철수 현상'을 놓고 말들이 무성한 것은 당연하다. '국민의 정치 혐오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하는 이도 있고 '한국 정당정치의 허약성'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 어떤 언론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준엄한 경고'라고 사뭇 엄숙히 단정하기도 한다. 벌써부터 그를 '좌파'로 규정하면서 '종북세력'과 손을 잡았다고 비방하는 것은 차라리 웃음이라도 유발한다.
"지난 6일 동안 진행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소동은 어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정치권에선 '잘 짜인 정치 시나리오를 보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
"출마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평지풍파를 일으켰는지, 서울시장이란 자리가 나흘 만에 넣었다가 뺐다가 해도 되는 건지 묻고 싶다...안 원장은 10·26 재·보선전의 주역에서 보조역으로 바뀌었다. 선거판에 남아 있지 않는다고 했으니, 단일화를 이룬 박 상임이사를 심정적으로 돕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정보기술(IT) 전문가로, 사회 운동가로 되돌아가 우리 사회에 더 큰 기여를 해주기를 기대한다." <서울신문>
"안철수 파동이 결국 좌파 단일화 정치쇼로 막을 내렸다. 선거만을 위해 야합한 곽노현 식 단일화가 연상된다.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듯하던 안철수씨의 본색도 알고 보니 자신이 그토록 비난하던 구태 야합정치인과 다름없음이 확인됐다. 정치판의 어지러운 이합집산을 신물 나게 지켜본 국민들이 여기에 감동할 것으로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한나라당 김기현 대변인)
전적으로 잘못된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것들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관점들은 낡고 상투적인 것이라는 데에 한계가 있다. 안철수 현상 앞에서 기성 언론과 기성 정치가 보이는 반응은 말 그대로 '구시대적'인 것들 투성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듯이 안철수 현상은 새로운 것이다. 그가 왜 과거의 박찬종이나 문국현과는 다른지를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의 신념, 실천적 삶, 이미지 등 모두 과거의 것과는 다르다. 모르는 것은 기성인들뿐이다. 그들은 소설 제목처럼 '레디 메이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눈은 한사코 새로운 것을 포착하지 않는다.
친박계 최경환 의원은 '안철수-박원순 단일화'에 대해 "(안 원장은) 종잡을 수 없는 사람 같다. 황당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근혜의 경선 승복을 '획기적으로 신선하게' 보는 -경선 승복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 아닌가- 수준의 구시대의 눈, '미래 권력'의 방문에 맞춰 내리는 공무원 동원령을 당연시하는 눈으로는 안철수가 여전히 '미스터리'일 수밖에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새 시대의 맏형'이 되고자 했지만 '구시대의 막내'일 뿐이었다고 말하며 회한에 잠긴 적이 있다. 그래도 그는 자기가 구시대인이라는 것을 자각할 만큼의 시대감각은 있었다. 그런데 노무현이 구시대인이라면 지금 인물 중에서 구시대인 아닌 이가 따로 있을까. 나는 구시대인의 범주에 이명박과 박근혜는 물론 손학규 등도 포함시킨다. 그리고 나는 안철수에게서 '새 시대의 맏형'을 예감한다.
안철수의 선택과 운명, 서울시장과 대권
어젯밤(6일) 나는 <뉴시스> 여론조사 결과를 일부러 <조선일보>에서 찾아 읽었다.
안철수 42.4% 박근혜 40.5%
<조선일보> 기사 타이틀에 이런 것이 뜰 수도 있다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극단적인 절망이나 희망의 공통점은 비현실성에 있다. 안철수는 철옹성 같던 구시대의 '대세론'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3년 동안이나 지속된 대세론에 대한 국민의 식상함과 피로감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안 원장이 대선에 나서면 박근혜는 바로 구시대의 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친박계 중진 의원의 말이 신음처럼 들린다.
안철수는 '대학과의 신의 문제 때문에라도 서울시장 출마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신의라도 지키는 것이 자기 삶의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얼핏 보아 이것은 작은 문제 같지만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대학과의 신의를 지키는 것이 서울시장직을 수행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는 식의 가치관을 나는 배격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 때문이라도 그가 이번에 출마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이번 학기에는 강의를 맡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안철수는 학기 중 국무총리 자리로 옮겨 간 정운찬과는 달라야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었다. 안철수는 새벽 3시 카이스트대 교내 횡단보도에서도 3분 동안이나 파란불을 기다렸다가 길을 건너던 사람이었다.
안철수는 서울시장 불출마를 선택했다. 동시에 그는 집권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박원순을 천거했다. 저간 일주일 동안의 행적과 함께 그는 자의건 타의건 어느 현실 정치인 못지않게 구체적이고도 치열한 정치 행위를 했다. 그는 출마를 고려한다면서 서울시장 여론조사를 유도했고 불출마 선언 후에는 한 단계 높은 대선 여론조사를 도출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두 여론조사 모두 승리했다.
그는 '누구도 민심을 쉽게 얻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고 전제한 후, "저에게 보여주신 기대 역시 우리 사회 리더십에 대한 변화의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차후 '자신보다 사회를 위해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는 미래 세대를 격려하는 것으로 회견을 마쳤다.
그는 어떤 가능성도 닫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민심을 쉽게 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이제 원하건 원하지 않건 여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돌이킬 수 없이 역사의 물결에 몸을 실은 것이다. 민심은 천심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대권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서울시장은 그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필경 머지않은 미래에 민심이 그에게 요구할 선택은 그의 운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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