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위암 특집편의 이경규와 김태원 모습
KBS 남자의 자격
김태원이 수술대에 오르고 이경규가 눈물을 흘린다. 지난 3월 방송된 <남자의 자격> 위암 특집편의 한 장면이다. 이날 방송을 본 많은 사람들은 '위암 수술에 대한 정보를 얻고 감동을 받았다'며 호평했다. 인터넷에서는 시술 장면이 캡쳐돼 널리 퍼지기도 했다. 방송 이후 관련 시술은 '김태원 수술'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내시경에 칼을 달아 위암을 절제하는 이 시술법(내시경 점막하 박리 절제술, 이하 ESD)이 논란에 휩싸였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보건복지부가 8월 25일 '위 선종 및 2cm 이하 조기 위암'의 경우에만 ESD 시술을 급여로 전환(보험 적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내용의 고시를 발표했다. 개정된 고시는 9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되는데, 효력 발생 이틀 전인 8월 30일 내시경 시술용 나이프의 75%를 공급하고 있는 올림푸스가 병원에 '나이프 공급중단 공문'을 보냈다. 그러자 병원들은 ESD시술의 중단을 선언했다.
올림푸스는 30~40만 원에 공급하고 있는 시술용 칼이 고시 개정으로 가격이 9만 원으로 결정되자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도덕적 비난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올림푸스 관계자는 기자와 한 통화에서 "현재 국내에서 팔리고 있는 가격은 세계적인(world wide) 가격으로 국내에서만 특별히 비싸게 받는 것이 아니고 9만 원은 수입 원가에도 못 미친다"며 공급 중단의 이유를 설명했다.
급여화 될 칼의 가격은 보건복지부가 업체에서 제출한 원가산정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올림푸스가 자료제출을 거부했고 복지부는 자료를 제출한 다른 나이프 공급 업체의 자료를 기준으로 9만 원으로 가격을 결정한 것이다.
올림푸스 관계자는 전화 통화에서 "보건복지부가 요청하는 원가산정 자료를 공개하지 않을 경우 75%를 공급하고 있는 업체 입장에서 가격 결정에 불이익을 예상할 수 있지 않았냐"는 질문에 "외국계기업의 회사 방침상 자료제출 요구에 응할 수 없었고, 칼 가격이 다양해 어려웠다"고 답했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의료계가 정말 환자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업체가 공급을 중단한다고, 덩달아 시술을 중단하는 것은 의료법 15조에 해당하는 '진료 거부 금지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고 꼬집었다. 현재 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대다수 병원은 ESD시술을 중단했으며, 삼성병원, 분당서울대병원 등 일부 병원에서만 시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EDS 시술 그만둔 의사들... "턱없이 낮은 수가 의료 질 떨어뜨릴 것" 내시경 시술용 나이프 공급 중단만이 의사들이 EDS 시술을 그만둔 이유는 아닐 것이다. 보다 복잡한 이유가 그 뒤에 숨겨 있다. 그렇다면 의사들은 왜 EDS 시술을 그만뒀을까? 바로 '낮은 수가'와 'EDS시술 적용 범위 제한'(적응증 제한-적응증이란 '효능·효과'란 뜻으로 '유효성이 명확하게 실증될 수 있는 질환명이나 증상명'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때문이다.
우선 해당 시술이 급여로 전환되면서 의사에게 돌아가는 수입이 줄게 됐다. 지금까지 ESD시술은 비급여로 분류되어 환자가 250~300만 원의 비용을 100% 부담했다. 그러던 것이 급여로 전환 되면서 30만 원(행위수가 21만 원 + 재료수가 9만 원)으로 진료비가 결정됐다.
의사협회 관계자는 "아무리 그래도 원가가 1/5로 낮아지는 건 문제 아니냐"며 "턱없이 낮은 수가로 급여화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의료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수가가 낮게 책정된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보통 비급여 항목이 급여로 전환되면, 수가가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시술행위가 보편적으로 확산되어 시술 건수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사안의 경우 적응증 범위가 축소되어 시술 건수가 늘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 다른데, 의사협회가 제출한 자료를 바탕으로 결정한 사안인 만큼 수가 산정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비급여 항목이 급여로 전환될 때 대개 상대가치를 평가하여 점수화 해 수가를 결정한다. 상대가치가 높게 평가되면 수가가 높게 결정되고, 낮게 평가되면 수가는 낮게 결정된다. ESD 시술 관련 의사협회는 7일 기자회견에서 "의료행위전문평가위원회에 제출한 상대가치점수가 최종 발표된 점수보다 높았지만, 위원회가 재조정을 요구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반박했다. 지금 책정된 수가보다 더 높은 수가를 받는 게 맞다는 것이다.
복지부 "연구결과 없어 2cm 제한 불가피"... 학회 "2년 안에 하긴 어려워"'위 선종 및 2cm 이하 조기 위암'의 경우에만 ESD 시술을 급여로 전환하는 내용의 고시가 발표되면서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이 외의 경우에 대해 ESD 시술할 경우 불법이 되게 됐다. 그렇다면 왜 2cm 이하 위암으로 시술범위가 한정됐을까? 통상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 검증 단계를 거친다. ESD는 일본에서 도입된 기술로 국내에 들어온 지 2~3년 정도 됐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2008년부터 2년 동안 6000명의 ESD 시술환자를 추적해 유효성을 입증하기로 정부와 합의했다. ESD는 신기술이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하고 좋은 기술을 살리자는 취지에 관련 학회에 2년간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하도록 연구를 진행하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재평가 받는 조건으로 비급여로 시술을 허용해줬지만 2년이 넘은 지금까지 그에 대한 연구결과를 내놓지 않아 결정이 불가피했다"고 적응증 제한(위 선종 및 2cm 이하 위암으로 시술범위를 한정한 것)의 이유를 설명했다.
반면 "정부에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소화기내시경학회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일본 논문을 비롯하여 다수의 자료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라는 게 소화내시경학회의 반박이다.
이에 대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계자는 "적어도 2년이란 시간동안 몇 천 건의 사례가 진행됐는지, 용종의 크기는 어떠한지 등의 기초적 자료라도 나와야 하는데 그에 대한 연구 결과는 제출되지 않았다. 다만, 학회가 제출한 자료는 상대가치점수 및 비용산출에 필요한 자료"라며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한 합당하고 직접적인 임상적 결과를 내놓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한국보건의료원과 소화기내시경학회 ESD 연구회는 장기연구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2010년 1월 3cm를 기준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나온 결과는 없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3cm에 대한 연구 결과가 없기 때문에 2cm로 제한했는데 반발하고 있다"며 "국내 교과서와 일본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3cm 이상에 대한 시술은 전이의 확률이 높은데, 정부가 급여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덧붙여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물론 3cm로 적응증 제한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의료행위평가전문위원회의 최종 논의 결과 3cm에 대해 시술을 적용하는 건 시기 상조이므로 우선 안전성과 유효성이 검증된 2cm만이라도 보험 적용이 될 수 있게끔 하고자 한 것"이라며 "언제까지 환자의 돈으로 이를 진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의사협회와 소화기내시경학회는 "암이라는 질환의 특성상 5년 생존률 등 중요한 지표들이 많은데 이를 2년이라는 기간 내에 한다는 건 어렵다"며 "그러나 빠른 시일 내 연구 결과를 제출하겠다"는 입장이다.
한국보건의료원과 소화기내시경학회 ESD 연구회가 진행하고 있는 연구는
2010년 1월부터 2016년 1월까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놓을 만한 연구 결과는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소화기내시경학회가 연구 결과를 만들어내고 학회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을 소홀했다는 비난을 피해가기 힘들어 보이는 대목이다.
개정된 고시로 '의료공백 발생'... 적절한 대응책 없는 고시 발표 문제의학적 근거가 부족하면 급여로 전환해 줄 수 없다는 복지부의 입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개정된 고시로 인해 의료공백이 발생했다는 점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보건복지부는 일련의 과정들을 진행한 책임자로서 의료 공백이 생길 수 있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터인데,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고 고시를 발표했다.
비급여였던 것이 급여로 전환되면, 급여로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시술할 경우 불법이 된다. 비급여였을 땐 위, 대장암, 식도암 등에 ESD시술이 사용됐는데, 급여로 전환되면서 2cm 이하 위암만이 적용대상이 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이제 불법이 됐다
. 급여 대상을 벗어나는 2cm 초과 위암 등의 경우 ESD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수술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의료기관은 수술을 취소하거나 연기하고, 환자들은 어떻게 치료를 받아야 하냐고 하소연 하고 있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시술에 대한 안전성과 유효성 검증이 중요하다. 하지만 ESD 시술이 대장암, 식도암에도 효과가 있다면 관련 학회는 적극적으로 연구해 빠른 시간 내에 제출해야 한다"며 "의학적 근거를 제출하지 못한 것은 의사측에 분명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2cm 이하의 위암환자에 대한 시술이 더 이상 지체되어선 안 될 것"이라며 "복지부와 의료계 모두 환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항변만 하지 말고 정작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 환자도 참여시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했다.
사태가 장기화 된다면 환자들의 피해는 점점 늘어날 것이고, 한국에서 ESD기술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복지부도, 의료계도, 재료공급업체도
이를 원치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소화기내시경학회는 "고시가 완화된다면", 올림푸스는 "칼 가격을 적절하게 반영해준다면" 식의 조건을 달고 있다. 7일 보건복지부 진수희 장관이 관련 고시 발표가 적법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임을 강조하면서도 사태해결에 대한 의사를 밝혔고 올림푸스가 8일 ESD 치료 재료비에 대해 조정 신청을 한 가운데 문제가 어떻게 풀려나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환자가 아니면 이 심정 알 수 없어요. 병원에 가보신 적이 있다면 하루 하루가 얼마나 안타깝고 애간장이 녹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관련 고시 이후 병원으로부터 시술 취소 통보를 받은 장진수(43)씨와 같은 환자들의 한숨이 더는 계속되질 않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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