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 만난 왕실 점술사, 천기를 누설하다

[역사소설 수양대군19] 4개의 기둥 중 2개는 같고 2개는 틀렸다

등록 2011.09.16 09:51수정 2011.10.0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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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좌 임금의 자리 ⓒ 이정근


이튿날 수양이 수하를 소집했다. 수양이 없는 사이 한산했던 명례궁이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나리 안 계시는 동안 저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사실 권람은 떨고 있었다. 대장이 없는 사이 기습을 당하면 속절없이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할 터.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나리께서 김승규와 황보석을 데리고 갔으니 저들이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었겠습니까?"
한명회의 목소리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번 명나라에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중국은 수천 년 유구한 역사 속에 수많은 왕조가 명멸했지만 군주가 말엽에 적절하지 않은 사람을 관직에 제수함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하늘이 노(怒)해 멸망했다. 큰 뜻을 품고 있는 그대의 생각을 듣고 싶다."
수양이 한명회를 쳐다보았다.

반정이 실패하면 역적이 되지만 성공하면 온정이 된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어린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았고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사특한 무리가 그림자처럼 붙어서 국난을 초래했습니다. 그때 충정어린 신하가 반정(反正)을 한 뒤에야 그 난국이 수습되었으니 천도(天道)의 이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정이라 했나?"
"예, 그렇습니다. 반정이 실패하면 역적이 되지만 성공하면 온정이 됩니다."
"온정이라?"
"정(正)자는 흔히들 '바를 정'으로 알고 있지만 최초의 뜻은 '군사를 진격시켜 성을 정복하다.'입니다. 그 정(正)자에 '가다'를 뜻하는 척(彳)을 붙이면 '치다.' '정벌하다.' 의 정(征)이 됩니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
한명회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요동을 베개 삼아 하늘을 바라보며 '왜 너른 들 다 내어주고 반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나?' 생각하니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우리 주상께서 아직 나이는 어리나 큰 도량이 있어 잘 보좌하면 족히 수성(守成)할 것이다. 하지만 염려스러운 것이 있다. 간사한 대신이 이심(二心)을 품어 선왕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안평대군이 여러 대신들과 결탁하여 불궤(不軌)를 도모하려 하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나 그것은 심증일 뿐 물증을 갖지 않고 우리가 먼저 치면 성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성공하기 어렵다?"
수양이 한명회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물증이 있어야 만인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증험이 있어야 한다.' 이 말이군."
"그렇습니다. 증거를 확보하려면 저들의 소굴에 들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붙임성이 좋은 조득림을 투입하여 안평의 종들과 교제를 맺게 하여 증좌를 빼내고 소인이 조번을 만나보겠습니다."
"조번은 안평의 심복이지 않은가?"
"그자는 소인이 나리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사오니 의심하지 않을 것 입니다."

물증을 찾아야 실패하지 않는다

본격적인 탐색전이 시작되었다. 수양 사저 종 조득림이 안평 집에 파고들었다. 조득림은 안평 사저에서 글을 아는 유일한 종이었다. 안평 집에 잠입한 조득림으로부터 쾌보가 날아 들어왔다.

"황보인이 미복으로 안평대군 첩의 집을 왕래하고 안평은 김종서, 정분, 허후, 민신, 이양, 조극관, 정효전, 정효강과 더불어 밤에 자주 잔치를 벌이고 술을 마셨습니다. 황보인이 안평대군에게 백옥대(白玉帶)를 보내왔고 안평은 황금침향대(黃金沈香帶)로 보답했습니다. 또 김종서와 정분에게는 서대(犀帶)를 각각 하나씩 주고 진귀한 물건과 서화(書畫)도 조번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고급정보였다. 안평대군과 조정 대신들이 값진 물건을 서로 주고받고 잔치를 벌인다는 것이다. 서대(犀帶)는 무소의 뿔로 만든 허리띠다. 아무나 찰 수 없는 요대다. 정1품 이상에게만 허용되는 부귀의 상징이다. 예상은 했지만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명례궁이 긴장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지가 이 말씀을 전하려고 나오는 순간 호사스러운 가마가 깍듯한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구라고 하더냐?"
"이름은 잘 모르겠으나 궁중 점쟁이라고 하는 거 같았습니다."

왕실 점술사가 안평을 찾아간 까닭은?

안평 사저에 초대된 지화가 사랑에 좌정했다. 지화(池和). 그는 소경으로 무학대사가 사라진 이후 궁중을 무상출입하는 점복사였다. 특히 태종이 총애했다. 궁궐에 경사가 있을 때 지화를 불러들여 길일을 잡았고 왕실에 혼사가 있을 때면 배필의 사주를 뽑아 길례를 정했다.

현명한 군주 세종대왕마저도 지화에게 벼슬을 내리려다 '관직에 있으면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해 일을 폐하는 광관폐사(曠官廢事)가 될 염려가 있으니 불가하다.'는 맹사성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직 제수를 접은 일도 있었으나 끝내 종3품 중훈 검교 첨지내시부로 삼아 사옹원 사직의 일을 보게 하고 친히 사모와 띠를 내려 주었다.

"눈도 여의치 않는데 이렇게 오게 해서 미안하오?"
"이 몸,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마음으로는 천 길을 보고 있으니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외려 광영입니다."
"이 사주를 살펴주시오"

지화 앞에 두 사람의 생년, 월, 일, 시가 적어진 간지(簡紙)가 펼쳐졌다. 신유년 7월생. 태어난 해 (年)와 달(月)은 같았으나 날(日)과 시(時)가 달랐다. 사주(四柱)는 네 개의 기둥을 말한다. 사주풀이는 네 개의 기둥을 근거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술이다. 두 사람의 4개의 기둥 중에 2개는 같고 2개는 틀린 것이다. 허나, 지화는 장님이다. 글을 읽을 수 없다. 옆에서 도와주는 사서가 읽어줬다.

오른손을 펼친 지화의 엄지가 상하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입으로는 자축인묘진사를 중얼거리며 참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야말로 엄지가 어디를 찍고 어디로 이동하는지 모를만큼 빠른 속도였다. 실로 엄지족의 태두인지 모른다. 한참을 광속으로 움직이던 지화의 오른손 엄지가 멈추고 왼손이 펼쳐졌다. 지켜보던 모두의 눈동자도 지화의 왼손으로 옮겨갔다.

천기를 누설할테니 잡인을 물리쳐 주시오

두 사람의 사주 중에 임금의 사주가 들어있다. 허나, 어느 것이 임금의 사주인지 지화는 모른다. 보통 때 같으면 임금의 사주는 뽑아서도 안 된다. 그것 자체가 불경이다. 또한 뽑았다 하더라도 입을 뻥긋해서는 목이 달아날 수 있다.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지화가 입을 열었다.

"이 사주를 밝히면 천기를 누설하게 됩니다. 혹, 주변에 잡인이 있다면 물리쳐 주십시오."
긴장감이 흘렀다. 주변에는 안평과 이현로가 있을 뿐이었다.

"그대의 목을 거두어갈 저승사자는 없으니 염려 말고 말하시오."
마른침을 삼키던 지화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 분은 옥좌에 있고 또 한 분은 옥좌에 올라갈 분이십니다."
맑은 하늘에 뇌성벽력과 같은 말이다. 한 분이 옥좌에 있다는 말은 맞다. 헌데, 또 한 분이 옥좌에 올라갈 사람이라면 천지가 경동할 일이다.

세종 23년 왕실에 겹경사가 터졌다. 임금이 같은 달에 두 명의 손자를 보게 된 것이다. 하나는 세자가 세손을 낳았고 또 하나는 안평 왕자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지화가 말한 두 분 중 하나는 현 임금이고 또 하나는 안평의 아들 이우직이었던 것이다.

"왼편에 있는 성산을 자세히 살펴보시오."
성산은 임금의 나이를 말한다.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임금의 사주를 심도 있게 분석해 달라는 것이다.

"세수 19를 넘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해석이다. 현 임금이 19세 이상 살 수 없다니 이런 반역이 또 어디 있겠는가? 빙그레 웃던 안평이 또 한 장의 간지(簡紙)를 내려 주었다. 무술년생 사주였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상하좌우로 움직이던 지화가 거침없이 혀를 구동시켰다.

"어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천기누설이다. 안평의 사주에 임금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야 조금 전 이우직의 사주에 옥좌에 올라갈 분이라는 말이 이해되었다. 안평이 어좌에 올라가면 그의 아들 이우직이 왕좌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사랑채가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긴장과 흥분이 교차했다.

"더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안평대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원 갑자(下元甲子)에 성인(聖人)이 나와서 목멱정(木覓井)의 물을 마시게 되어 있습니다. 백악 북쪽이 바로 그 곳인데 참으로 왕업을 일으킬 만한 땅입니다, 그 곳에 집을 짓고 당호를 무계정사라 칭하면 만사가 여의할 것입니다."

"대군에 멈출 내가 아니다."
안평대군이 선언했다.
#안평대군 #수양대군 #한명회 #천기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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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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