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언지 세 번째 시집 <섬은 바다마저 비우고> 이번 시집은 두 번째 시집에 이어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결코 바다를 멀리 할 수 없는 시인이 바다를 쏘옥 빼다 닮은 이 세상살이를 물안경에 비춘 시편들이다.
일광
허기진 섬 하나겉과 속이 뒤바뀐 허상처럼 손가락으로 바다를 비우고 있었다.나무도 속이 비어 있었고매미 소리는 더욱 더큰소리로 속을 비우고 사물이 보이지 않는유폐된 시간 수평선을 그으며 옹이 된 섬은 짙은 어둠 속을 비우고 있었다.뇌세포처럼 엉켜 있는 수초들이 어지럼증을 참으며 졸음이 오는 오후타는 노을 되새김질하듯 바다는 물살을 또 비우고 있었다. -'섬은 바다마저 비우고' 모두 이 시에서 말하는 "허기진 섬 하나"는 시인 자신이다. "겉과 속이 뒤바뀐 허상처럼 / 손가락으로 바다를 비우고 있"는 것은 썰물 때를 맞은 섬이기도 하지만 이 고된 세상살이를 비우고자 애쓰고 있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섬이 바다를 비우는 것처럼 뭍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나무도 속이 비어 있었고 / 매미 소리는 더욱 더 / 큰소리로 속을 비우고" 있다.
내 몸과 마음 깊숙이 꽉 차 있는 그 무엇을 비운다는 것. 그것은 곧 "사물이 보이지 않는 /
유폐된 시간"에 "수평선"을 긋는 일이다. 그 유폐된 시간에 그은 수평선을 타고 앉아 "옹이 된 섬은" 또 한 번 "짙은 어둠 속을 비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평선"은 그저 우리가 바라보는 수평선이 아니다. 꽉 참과 비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화두다.
"짙은 어둠"은 모든 것을 비운 그 자리이다. "짙은 어둠 속을 비우"고 나야 그 자리에 새로운 새벽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수초들이 어지럼증을 참"는 것도, 바다가 "타는 노을 되새김질하듯"이 "물살을 또 비우고 있"는 것도 지금까지 꽉 찬 세상을 맴도는 절망에 빠져 있을 게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꼬옥 붙잡고 싶기 때문이다.
"바다는 언어 대신" 파도로 말한다어둠을 깨우는파도집어등처럼 반짝거리는 아파트의 불빛은 풀잎마다 맺혀 있는 갈무리해야 할 시간숲속에서 들려오는 나무들의 기도로 바다는 새벽을 열고 있다-'새벽바다' 모두박언지 시인은 바다를 이 세상에 빗댄다. 바다를 비우고 있는 섬은 이 세상살이를 비우고 있는 시인이다. 시인은 바다와 이 세상, 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온갖 생물들을 이 세상살이라 여긴다. "아파트의 불빛"이 밤바다를 떠다니는 "집어등처럼 반짝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다든 뭍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바다가 "숲속에서 들려오는 / 나무들의 기도"를 들으며 "새벽을 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허긴, 어찌 사람이 우주 삼라만상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눈이나 비가 내리면 어쩔 수 없이 눈과 비를 맞아야 하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끊을 수 없는 끈처럼 이어져 있지 않다면 먹거리는 또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섬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 바다를 이 세상살이에 빗댄 시들은 이 시집 곳곳에 엎드려 있다. 그 시들은 세상과 세상살이를 비워 새로운 세상과 세상살이를 담으려 아등바등 몸부림치고 있다. "꼬막 손가락 깍깍깍"(아가)라거나 "바다는 / 언어 대신 / 파도를 만들었다"(어느 날), "파도는 / 햇빛 찬란한 / 바람을 잃었노라"(주홍글씨), "던져주는 새우깡 향기는 / 바다의 통곡소리가 되고"(석모도 가는 길) 등이 그러하다.
시는 세상을 비우고, 시인은 세상살이마저 비우고"잃어버렸다. / 텃밭에서 방금 채취해 온 푸성귀가 / 어머니 손가락 사이로 / 조물조물 배어나온 손맛 / 그랬다. / 주린 배를 채웠던 시절 / 꽁보리밥 맑은 장국에도 / 밥 한 그릇 뚝딱... 오늘은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 배가 고프다. / 먹어도 먹어도 /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다 / 식탁에 잘 차려진 음식만큼 / 가족들은 줄어들고 흩어졌다."-'두레 밥상' 몇 토막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문인호는 작품해설에서 '오늘은'이란 시를 들추며 "대화체의 짧은 시 속에는 적어도 단편소설 한 작품 속에서나 느낄만한 내용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라며 "시인은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아주 쉬운 테크닉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이 짧은 시 한 작품을 통하여 보들레르의 시 한 행이 스탕달의 소설 한편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맞먹는다는 말을 상기해 볼만 하다"고 썼다.
시인 박언지 세 번째 시집 <섬은 바다마저 비우고>는 '시는 세상을 비우고, 시인은 세상살이마저 비우고'란 뜻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에서 비움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담으려 애쓴다. 하긴, 창고에 곡식과 금은보화가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알차고 더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더 채울 수 있겠는가.
시인 박언지는 경남 김해(지금 부산 강서구)에서 태어나 2002년 봄 계간 <문예시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푸성귀에 대한 명상> <갯벌에도 집이 있다>가 있으며, 수필집 <강변의 추억>을 펴냈다. 부산문인협회, 농민문학회 회원, 시를 짓고 듣는 사람 부회장, 글길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제6회 초허 김동명 문학상, 제4회 한국 가람문학상, 제4회 시마당 낭송 대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