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인숙 첫 번째 시집 <파랑도에 빠지다>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이 모난 세상과 이 모진 세상살이를 꼬옥 끌어안고 파랑도 같은 세상을 끌어당기기 위해 온몸으로 시를 쓴다
푸른사상
한밤, 봉숭아꽃 가득한 마당에서 숭어들이 튄다.
다닥다닥 붙어사는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한다. 청상과부 선아엄마, 집 나간 서방을 기다리는 애경엄마, 그냥 이모라 불리던 사투리 걸쭉한 부안댁이다. 아침이면 식당이나 병원, 공사판으로 마른 꽃씨처럼 흩어졌다가 밤이 되면 물오른 입을 들고 돌아오는 여인들. 한바탕 얘기꽃을 피우며 한 겹씩 옷을 벗고 있다. - '숭어' 몇 토막 심인숙 시인이 지닌 '상상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그는 상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시인은 현실과 상상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세상을 엿본다. 이 세상을 '상상' 없이 그저 그런 눈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의 섬'인 그 파랑도를 결코 끌어당길 수도 맞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숭어'란 이 시는 지난 2006년 <전북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다. 시인은 캄캄한 밤에 셋방에서 사는 여인들이 "봉숭화꽃 가득한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팔짝팔짝 튀는 숭어에 견준다. 이들 셋방 아줌마들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이 못난 세상을 결코 '좋은 세상'으로 이끌 수 없다.
시인은 이 젊은 셋방 아줌마들이 목욕을 하며 "한바탕 얘기꽃을 피우"고,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저절로 한숨 같은 비음이 흘러" 나오는 모습에서 파닥거리는 숭어를 본다. 이 시에서 "별빛을 따라 밤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숭어는 곧 셋방 아줌마들이자 그들 바람이며, 새로운 세상에 닿을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주는 길라잡이다.
"저곳엔 한때 상실이란 여자가 살았다"다닥다닥 붙어앉은 다세대주택 속에 낯익은 창이 보인다저곳엔 한때 상실이란 여자가 살았다반지하로 내려앉은 안방 창문을 가리느라 그녀가 붙여놓은 바닷속 물고기 스티커,유유히 물밑을 헤엄쳐 다니던 아가미는 황톳빛 물방울을 내뱉고 있었다 -'옛집을 지나며' 몇 토막글쓴이가 지난 해 이맘 때 지금 사는 중랑구 면목동 다세대주택 반지하로 이사를 왔을 때에도 "안방 창문을 가리느라 그녀가 붙여놓은 바닷속 물고기 스티커"가 "황톳빛 물방울을 내뱉고 있었다". 여기서 아가미에서 내뱉는 황톳빛 물방울은 반지하에 스며든 습기 때문에 얼룩이 진 물고기 스티커를 뜻한다.
그래. 글쓴이가 살고 있는 이 다세대주택 반지하에도 모든 것을 '상실'한 그런 여자, 심인숙 시인이 살았던 곳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상실'이란 시인이 스스로에게 붙인 다른 이름이다. 시인은 물고기 스티커를 통해 다세대주택 반지하, 늘상 습기가 가득한 그 셋방 창문을 바닷속이라 여긴다. 때문에 물고기 스티커가 "유유히 물밑을 헤엄"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이 현실과 상상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꿈, 파랑도를 끌어당기는 시는 이 시집 곳곳에서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고 있다. "지금 방은 거대한 공처럼 튕겨지고 있어요"(공놀이)라거나 "내 겨드랑이에서도 까닭 없는 날개가 돋아나네"(흰나비), "밥 속엔 밥알만한 꽃"(꽃마(魔)에 들다), "초저녁달이 도르래를 내리고 있어요"(달과 노래하는 중이에요), "구름은 시들었다"(구름편지) 등이 그러하다.
"TV 속으로 걸어간 그, 어느 수평선 돌아 나오고 있을까""TV를 보던 그가 / 내 무릎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 바람소리를 듣는다 / 해초냄새가 난다... TV 속으로 걸어간 그는 / 어느 수평선을 돌아 나오고 있을까 / 나는 자꾸 어둑한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 먼 바다에 켜진 저녁불빛을 따라 / 슬며시 / 나도 바닷속으로 걸어나간다" - '바다로 나가다' 몇 토막시인 이승하(중앙대 교수)는 "인숙의 시는 역동적이다. 형용사보다 동사를 훨씬 많이 구사하는 이유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애착 때문일 것"이라고 되짚는다. 그는 "살아 있지 않는 자연 대상물일지라도 심인숙의 시에서는 살아 숨 쉰다"라며 "시인 늦깎이로 시단에 나와 그 누구보다 활발히 시작 활동을 전개하여 첫 시집을 내는 심 시인의 부지런함은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원자 속의 전자와 저 태양의 움직임과 다를 바 없다"고 썼다.
시인 김기택은 "심인숙의 시를 나오게 하는 힘은 '가벼움의 본능'"이라며 "그의 시어들은 뒤꿈치에 날개를 달고 있어서 날아오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일상에서 마주친 것이든 그의 혀에 닿는 것들은 모두 달, 별, 햇빛, 공기, 구름, 새, 나비, 공 등의 이미지로 변하여 제멋대로 솟구치고 튀어 오르고 날아다닌다"고 적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맹문재(안양대 국문과 교수)는 '상상력의 시학'이란 이번 시집 해설에서 "화자는 기억의 장면들을 통해 현재의 삶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귀띔한다. 그는 이 상상력은 "현재의 삶을 방기하거나 소비하거나 파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마치 숙제를 하듯이 자신의 일상에 달라붙어 삶을 일구려 애쓰는 시인이 심인숙"이라고 평했다.
시인 심인숙 첫 시집 <파랑도에 빠지다>는 자유를 찾아가는 상상력이 빚어낸 '가벼움'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벼움'은 바슐라르가 말한 "삶의 가장 깊은 본능의 하나인 가벼움의 본능" 그 뿌리다. 시인은 '가벼움'이란 날개를 양 어깨에 달고 '무거운 삶'을 입에 문 채 퍼더덕 날아올라 저만치 휘이잉 날아간다. 끝없는 자유가 춤추는 그 나라로.
시인 심인숙은 인천에서 태어나 2006년 <전북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숭어'가 당선되었고, 2006년 <문학사상>에 '파랑도에 빠지다'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상상력이란 가슴에 폭삭 안으며 끝없는 자유로 나아가고 있다. 그 자유는 삶을 이끄는 지렛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