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남북연석회의' 마지막 생존자 류금수 별세

향년 85세로 3일 별세...6일 '민족민주통일장'

등록 2011.10.05 20:18수정 2011.10.0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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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남측인사들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인 류금수 선생이 지난 3일 향년 85세로 별세했다.

 

범민련남측본부 고문이기도 한 류금수 선생은 지난 3일 월요일 오후 6시30분경 충북 음성 자택 안방에서 숨진 채로 장녀인 소수영씨에 의해 발견됐다. 사망시각은 오후 4시에서 6시 사이로 추정된다.  

 

 고 류금수 선생(향년 85세)
고 류금수 선생(향년 85세)이정섭
고 류금수 선생(향년 85세) ⓒ 이정섭

 

류금수 선생은 연세에 비해 평소 건강했음은 물론 유명을 달리하기 하루 전인 10월 2일에도 1박 2일 일정으로 군산에서 열린 '국가보안법피해자'들 모임에 참석하는 등 열정적 동을 펼친 바 있어 충격을 더했다.

 

'김일성' 곱게 한복입고 김구 선생님에게 절하자

 

류금수 선생은 1926년에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으며, 47년 12월 북으로 넘어간후 48년에 강동정치학원 1기로 입소했다. 이후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에는 남측위원회 성원자격으로 참석 했었다. 당시 류 선생은 남로당 충북 여맹위원장직을 맡아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연석회의와 관련 류 선생은 "김구 주석이 평양에 올라온 후 연석회의 직전 김일성 주석(당시 수상)과 함께 만난 일이 있다"며 "이때 김일성 주석은 인민복 대신에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오셔서는 앉아 계시던 김구 주석에게 큰 절을 두번 했다"라고 회상했다.

 

류 선생은 또 "김구 주석이 '우리 젊은 김일성 수상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인을 맡기겠다'고 말하자 김일성 수상은 '김구 주석님 께서 고이 간직하시라 우리는 김구 주석과 같은 어르신과 인민들이 있으면 된다'라고 말하며 받지 않더라"며 당시 일화를 말한 바 있다.

 

류금수 선생의 일생은 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충북의 갑부 딸(부친 류용규)로 태어난 류 선생은 청주여고 시절 고려대 학생신분으로 써클 지도차 내려왔던 고 이중재 전 의원과 인연이 되어 46년 친일교사 퇴진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졸업 3개월을 남겨두고 퇴학을 당했다. 그러나 이화여고 당시 교장선생의 용단에 힘입어 이화여고로 편입해 3개월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류 선생은 이후 남로당 활동에 나서다 청주교도소에 수감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었을 뻔했으나 당시 조국의 현실에 분노한 검사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빠져 나왔는가 하면 이후 서울에서 남로당 활동을 이어가다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는 등 고초를 당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중에는 청주여고 당시 자신을 지도했음에도 경찰에 투신해 사찰주임으로 재직중이던 고 이중재 전 의원과 우연히 조우한다. 이후 이 전 의원이 '자신의 청혼을 수락하면 즉시 석방 하겠다'고 요청했음에도, 이를 거절하고 수감생활을 계속하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석방된 류 선생은 북으로 올라가지 않고 1950년 10월경 부터 충북 음성에 자신의 본명을 버리고 가명으로 20여년을 생활했다. 그러다 지난 1968년 중앙정보부조사를 마친 후 부터는 자신의 이름을 찾고 재야활동을 펼쳐 왔으며 지난 2001년에 8월에는 범민련 남측본부 방북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지난 7월 충북 충주 경당에서 열린 한 모임에 참석한 故류금수 선생
지난 7월 충북 충주 경당에서 열린 한 모임에 참석한 故류금수 선생이정섭
지난 7월 충북 충주 경당에서 열린 한 모임에 참석한 故류금수 선생 ⓒ 이정섭

류금수 선생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범민련남측본부 고문은 물론 한국진보연대 고문, 전국여성연대 지도위원, 6.15민족공동위원회 충북본부 고문, 국가보안법피해자모임 고문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조국통일운동에 헌신해 왔었다.

 

류금수 선생은 평소 "조국통일을 보고 죽을 수 있다면 한이 없다"며 "늙고 젊음을 떠나 통일을 생각하고 통일운동에 나서는 것이 최대의 애국자"라며 자신의 소신을 가감없이 밝히곤 했다.  

 

범민련연합고문 활동을 함께 해 온 이천재 선생은 "류금수 선생은 타고난 천품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할이나 처신을 바로하는 냉철하고 지혜있는 분이었다. 1941년 쉽지 않은 진학을 했고 해방과 함께 고학년이 되면서 민족의 암울함을 정치적으로 이해하고 행동으로 극복하려는 용기있는 동지였다"고 회고 했다.

 

류금수 선생의 빈소는 분당 서울대 병원3층 10호에 마련되었으며 6일 오후 6시 민족민주통일장으로 치러진다. 장지는 선영이 있는 충남 음성에 모시기로 했다. 유족으로는 자녀 소수영, 재영, 치영, 미영씨 등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1.10.05 20:18ⓒ 2011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류금수 #범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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