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하종오 새 시집 <남북상징어사전>시인 하종오는 ‘시인의 말’에서 “1980년대 분단 혹은 통일을 주제로 쓴 나의 시편과 이 시집이 어떤 속뜻으로 연결되는지 결락되는지 고민했다”고 그 속내를 내비친다.
실천문학사
하종오 씨는 남한에도 북한에도 살고 있을 것이다남한 거주자 하종오 씨와 북한 거주자 하종오 씨가 무엇이 다르고 어디가 같은지 나는 알 수 없다남한 거주자 하종오 씨는 남북 전쟁 후에 출생했는지직장에 비정규직으로 다니며 불안장애를 앓는지북한 거주자 하종오 씨는 남북 전쟁 전에 출생했는지협동농장에서 삽질하며 배곯는지 개인 정보를 전혀 알려줄 수 없지만내가 아는 건 하종오 씨들도 나를 모른다는 것이다-'하종오 씨' 몇 토막 시인 하종오는 스스로를 남북에서 살아가는 주민이자 탈북자,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지구촌 곳곳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이주민에 빗댄다. 시인은 서울 시민 하종오와 평양 시민 하종오를 통해 우리가 걸어온 아픈 역사를 비추기도 하고, 지금 이상하게 살아가는 남북 주민들어지러운 삶을 속속들이 들춘다.
남한 토박이 하종오는 "회사에 정규직으로 다니고 / 자식을 키우고 / 물려줄 유산"이라도 있다. 북한 탈북자 하종오는 "실직자로 구인 광고지를 뒤적이고 / 가족을 버려두고 왔고 / 상속할 재산"이 하나도 없다. 이들은 한때 "동명이인인 걸 알고 반가워했으나 / 서로 신분이 다르다는 걸 알고는 / 멋쩍어하며" 돌아선, 참으로 안타까운 사이다.
시인 하종오는 시인 이름을 딴 16편에 이르는 시들을 통해 남과 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물질 앞에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서글픈 이주민 삶을 쇠꼬챙이처럼 날카롭게 들쑤신다. '두 하종오 씨의 순례' '이산가족 하종오 씨의 인상 깊은 이야기' '광고기획자 하종오 씨의 구상' '이상한 나라의 주민 하종오 씨' '하종오 씨도 덕 보거나 피 본다' 등이 그러하다.
"지나간 한 시절 친구는 / 통일이 되면 문예 공무원이 되어 / 청사로 출근하고 싶다고 / 나에게 말하곤 했다"(문예 공무원)란 시는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시인은 그 친구가 하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문예공무원이 된 그 친구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시를 낭송하게 할 수 있을까 / 사람마다 산문을 쓰게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가 끝없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깊은 생각에 잠긴다. 차라리 "남한의 자본력과 북한의 노동력이 결합해야 / 통일을 할 수 있다 고 믿게 된 그 친구가 / 마침내 문예공무원이 되기를 포기하고 / 남북 주민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하여 / 통일 전이든 후든 사업가가 되겠다고 각오를 다졌을 때"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기 때문에.
국경 인종 뛰어넘은 시인 하종오가 말하는 '만인보' 북한에서 탈출한 최귀림 씨와베트남에서 시집 온 메이 씨와필리핀에서 취업 온 글로리아 씨와연변에서 친척 방문했다 주저앉은 김화자 씨가지방 소도시에서 만난 지 일 년이 지났다......최귀림 씨가 향수병에 시달리는 날이면메이 씨가 입덧하는 날이면글로리아 씨가 생리통 앓는 날이면김화자 씨가 갱년기 장애로 힘겨워하는 날이면여주인이 스트레스 받는 날이면그런 날엔 그런 여자 혼자 쉬게 하고다섯 사람 작업량을 네 여자가 나누어 처리하고도정시에 퇴근하였다 -'여인 천하' 몇 토막시인 하종오가 바라보는 세상은 국경도 없고 인종도 없다. "북한에서 탈출한 최귀림 씨와 / 베트남에서 시집 온 메이 씨와 / 필리핀에서 취업 온 글로리아 씨와 / 연변에서 친척 방문했다 주저앉은 김화자 씨"가 그들이다. 이 네 여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코리안드림'을 꿈꾸는 팔자 좋은 여자로 보이지만 사실 그 속내는 '팔자 사나운 여자들'일 수밖에 없다.
네 여자가 일하는 공장은 "말이 공장이지, 네 여자가 전 직원인 봉재공장"이다. 여기에 "야근도 같이하는 여주인도 빚 때문에 / 앞날이 보이지 않기는 피차 마찬가지" 인생이다. 경기 또한 이제는 남한과 북한 관계뿐만 아니라 지구촌 경기와 맞물려 돌아간다. 봉제공장 여주인이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하는 것도 제 잘못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남한은 북한과 가까워지려고 / 풀숲을 밀어 도로를 닦고 / 산기슭을 깎아 공장을 짓는다 / 북한 인민들에게 일자리를 주면 / 도로를 더 닦을 수 있고 / 공장을 더 지을 수 있다"(한국산-상상도)처럼 시인은 일제강점기 때 착취와 수탈로 얼룩졌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제국주의가 저지르는 착취와 수탈을 이어받는 작은 제국 비슷한 국가가 되어가는 것도 날카롭게 꼬집는다.
하종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남북을 상징하는, 물질이 낳은 양극화를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곱씹는다. 시인 고은이 쓴 '만인보'가 아니라 시인 하종오가 쓴 '만인보'처럼. "남한에서 살아온 국민과 북한에서 살아온 인민은 / 말투와 생김새가 비슷한데 / 여기가 이상한 나라로 진화했는지 / 거기가 이상한 나라로 퇴화했는지"(이상한 나라의 주민 하종오 씨)라거나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하여 말이 다른 타국으로 / 탈출한다는 건"(한 끼쯤), "모든 대륙이 중심이 될 수 있고 / 그 가장자리에 각 나라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세계지도와 지구의) 등이 그러하다.
남한에서 살고 있는 시인 하종오가 바라보는 북한 인민 하종오"지방 소도시 임대 아파트 단지 공원 정자에 / 북한에서 탈출한 여인들이 모여 앉아 웅얼거리면 / 베트남에서 시집온 여인들이 모여 앉아 재잘거리면 / 서로 못 본 척했다 // 북한 출신 여인들은 겨울이면 바람 속에서 / 베트남 출신 여인들은 여름이면 햇볕 아래서 / 은근히 고향 집을 그리워한다는 걸 /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춘하추동' 몇 토막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6.25전쟁의 비극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시인 김수영은 일찍이 4월 혁명의 열기 속에서 '하...... 그림자가 없다'고 노래한 바 있다"고 하종오를 김수영에 빗댄다. 그는 "휴전 이듬해 태어난 하종오는 수십 년간 분단시대의 시인으로 살아온 끝에 '하, 나에게는 그런 내면이 없다' '하, 나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다'(저항시의 시효가 끝나고, 서정시의 시효가 끝나고)고 탄식하기에 이른다"고 되짚는다.
그는 "무엇이 그에게서 내면을 박탈하고 감정을 제거했는가. 이 의문을 가지고 시집을 읽어보면 그가 왜 수많은 자신의 분신들을 한반도 곳곳에, 그리고 세계 도처에 파견했는지 알게 된다"라며 "하종오의 시적 상상력은 때로는 한반도 허리에 둘러쳐진 휴전선을 없애고 남북의 주민들에게 자유여행조차 허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가로지르는 내적 분단은 남북을 오가는 여행자들에게 진정한 만남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고 적었다.
시인 하종오가 펴낸 새 시집 <남북상징어사전>은 남한에서 살고 있는 시인 하종오가 바라보는 북한 인민이자 탈북자 하종오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스스로를 '가질 수도, 가지지 않을 수도' 없는 얄궂은 '물질드림'을 꿈꾸는 북한 인민과 남한 주민에 빗댄다. 그 '빗댐' 속에서 날이 갈수록 더 큰 물질에 헉헉대는 지구촌, 그 속내를 탈곡기로 벼를 털듯이 샅샅이 훑는다.
河詩(하시)라는 호를 갖고 있는 시인 하종오는 1954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월에서 오월로> <넋이야 넋이로다>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사물의 운명> <님 시편> <님> <님 시집> <지옥처럼 낯선> <국경 없는 공장>이 있다. 제2회 신동엽 창작상(1983), 제1회 불교문예작품상(2006)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