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를 들고 거리행진을 하고 있는 두리반 사람들. 531일일 동안 두리반은 쉼없는 축제의 장이었다. 비극의 축제.
두리반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에 칼국수보쌈전문점 두리반이 있었다. 두리반은 2009년 12월 24일에 강제철거당했다. 탐욕의 시선 앞에 두리반은 보이지 않았다. 단 한 차례의 협상도 필요 없을 만큼 무생명체였던 것이다. 두리반은 강제철거에 맞서 531일 동안 농성했다. 생명체임을 쉼 없이 알렸다. 그것은 축제였다.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850여 인디밴드 중 무려 250여 밴드가 두리반 축제에 연대했다.
인디밴드들, 실은 그들 역시 쫓겨난 자들이다. 천민 자본에 떠밀려 신촌에서 홍대 앞으로 쫓겨 왔으나 홍대 앞에서도 더는 안주할 수 없게 되었다. 공연할 클럽의 월세는 불과 몇 년 새에 두세 배나 뛰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몇몇 클럽은 재개발지역으로 묶여 곧 쫓겨날 처지에 놓였다. 공연할 공간이 이 모양인데, 뮤지션들이 먹고 자고 싸야 할 지하방이나 옥탑방의 월세까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왜 우리는 사람을 끌어 모았으되, 돈만 아는 저질들한테 쫓겨나야 하는가? 왜 우리의 존재는 날마다 상업자본의 총알받이가 되어 나가떨어져야 하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는가?"뮤지션들은 건설자본에 농락당한 두리반으로 모여들었다. 다큐상영회, 촛불예배, 문학포럼, 낭독회, 3층강좌를 통해 생계터전이 박살난 두리반을 평면적으로 알리는 동안, 뮤지션들은 음악을 통해 두리반이 가고자하는 최후의 의지를 배가시켰다. 비극의 현장에서 전자가 비극의 진실을 알리는 동안, 음악은 비극의 축제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그 결과, 비극을 외면해온 이 땅의 관객들은 비극을 주목했다. 아들과 운전수를 위장 취업
시켜 세금을 포탈한 좀팽이가 약속한 747공약의 희망 대신, 관객들은 비극의 시선에 주목
했다. 모로 가도 5년이면 정권이 바뀐다는 희망의 시선 대신, 관객들은 비극의 시선에 주목
했다.
비극의 축제는 그치지 않았고 비극의 축제는 계속되었다. 그러니 탐욕의 시선 말고는 다른
어떤 시선도 없었던 건설자본에게 비극의 축제는 당혹스러웠다. 건설자본은 이례적인 철거 현장의 축제를 두고, 좀처럼 머릿속을 정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두리반이 생명체임을 인정하고 두리반이 홍대 앞 인근에서 다시 문을 열어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2011년 6월 8일의 일이다. 두리반이 농성을 시작한 지는 531일 만이다.
또 다른 비극의 현장으로 달려간 뮤지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