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훔쳐간 아이들...그들은 '노예'였다

[국가의 거짓말①] 호주의 '원주민가족 와해정책'

등록 2011.10.29 19:27수정 2011.10.3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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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양 날의 검입니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사회를 통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습니다. 이 서슬이 퍼런 검을 누가 이용하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삶은 큰 굴곡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라는 정치권력을 사용할 때는 항상 '거짓말'이 존재했습니다. 그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기만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국가의 거짓말'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여다보고 혼란의 시대에 국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 말>

[거짓말] 혼혈 원주민 아동들에게 '문명화' 혜택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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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호주 다윈시 한 신문에 게재된 사진 "수용소 여자아이를 데려갈 분!" 사진 중앙의 아이에게 X마크가 되어 있고 "중앙에 있는 아이가 마음에 드는데, 누가 이미 데려갔으면 다른 아이라도 상관없다. 애만 튼튼하다면..."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 자료사진


우리가 이 거대한 대륙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했습니다. 아서 필립(1738~1814, 영국의 군인이자 식민지 행정관)이 이끈 11척의 배에 1500명의 인원이 타고 항해한 결과 1788년 1월 26일 드디어 시드니 항구에 도착했거든요. 그렇게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를 건설한 거죠. 그때의 시드니는 허허벌판이었고 '빈 땅'이었어요. 그 땅을 개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런데 그곳에 '원시인'이 살고 있더군요. 우리는 그들을 애버리진(Aborigine)이라고 부릅니다. 'ab-(떨어져서)'과 'origine'이 결합된 말로, '원래부터 있던 사람'이라는 의미죠. 줄임말로 'Abo.'라고도 표기한답니다. 사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웠어요. 굉장히 미개했죠.

그런데 이 호주 대륙에 영국인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면서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어요. 백인 이민자들과 미개한 원주민들 사이에 혼혈아가 태어나기 시작한 거죠. 이 야만적인 원주민 사회에서 혼혈 원주민 아이들-저희들은 이들을 '하프캐스티드피플(half casted people)이라고 부릅니다-을 '구출'해야 한다는 여론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문명화된 백인들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아이들 아닙니까. 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 아이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자 우리는 이 혼혈아들을 애버리진의 마을에서 구출해낸 후 문명화 교육을 받게 하고 백인 가정에 입양시키기로 했습니다. 어릴 때 애버리진으로부터 떼어놓아야 백인사회에 흡수될 수 있고 애버리진의 흔적을 영원히 없앨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우리는 그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00년에서 1972년 사이 적어도 3만5000명의 아이가 이런 '혜택'을 받게 되었죠. 어차피 호주대륙에 함께 사는 이들이니 '동화정책'을 편 거죠. 그 원시적인 마을에서 열악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진실] 10만 혼혈아동들, 백인들의 노예로 '도둑맞았다'

1992년 12월 10일, 역사적인 연설이 있었다. 당시 호주 총리이던 폴 키팅(Paul Keating)이 남긴 '레드펀 연설(Redfern Speech)'이 그것. 폴 키팅은 시드니의 원주민 밀집지역인 레드펀에서 행한 이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원주민-백인 간의 국민적 화해를 촉구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비원주민인 호주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따라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그러한 잘못에 대한 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수탈을 자행한 사람들은 바로 백인들이다. 우리는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원주민들의 전통적 삶도 망가뜨렸다. 또한 우리는 이 땅에 병균을 가져왔으며, 술도 가져왔다. 우리는 살인도 저질렀다. 또한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빼앗았다. 우리는 인종적 차별과 인종적 배제를 서슴지 않았다.

그건 모두 다 우리의 부주의와 편견으로부터 나온 결과였다. 이러한 일들이 백인들에게 일어났더라면 하는 상상조차 하질 못했다. 우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반응조차 무시하였으며, 그들의 마음과 몸이 되어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가 우리 모두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애버리진이라고 불리는 호주 원주민과 백인 이주민 사이의 관계가 그간 어땠는지, 이 연설에 모든 해답이 나와 있다. 백인 이주민들은 원주민의 모든 것(땅과 생활방식, 심지어 가족까지)을 박탈하고 파괴하고 빼앗았다. 하지만 폴 키팅이 이 유명한 연설을 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1992년 전에는 백인들은 자신들이 원주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가해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원주민의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풀리기까지 20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사실 원주민들은 애버리진이라는 말 자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을 타자로 만들어 버린 단어 아니겠는가. 대신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이름으로 부리는 것을 좋아한다. 호주 동부와 남부에서는 자신들을 '우리 사람'이라는 뜻의 '쿠리'라고 부르고 서부에서는 '녕가', 북부에서는 '요잉구', 중앙에서는 '아낭구', 남부에서는 '넝가'라고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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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사과 2008년 케빈 러드 당시 호주 총리가 '도둑맞은 세대'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하고 있다. ⓒ ABC 방송화면 갈무리


반면 최근 진보적인 호주인들은 원주민을 가리킬 때 '최초의 호주인(The First Australians)'이라는 말을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이 까만 피부의 호주인들은 적어도 4만 년 전에 동남아시아에서 호주로 건너왔다고 추측되니 말이다. 백인들이 호주를 '발견'했다는 말 자체가 원주민들에게는 모욕인 셈이다.

백인들이 호주로 이주해 오던 당시 원주민 인구 수는 25만~75만 명으로, 대략 500~600개 정도의 독립된 그룹으로 나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유럽인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가던 1860년에 원주민의 인구는 2만2000명까지 줄어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정확한 통계는 알지 못한다. 1967년까지 원주민들은 아예 사람으로 취급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967년에 열린 국민투표에서야 90.8%의 호주인은 원주민도 호주 국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땅과 언어, 목숨과 가족까지 빼앗겨온 호주 원주민들

도대체 원주민들은 얼마만큼 '미개'했기에 불과 30년 전에서야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이 된 걸까? 원주민 입장에서 보면 분통이 터질 일이다. 그들의 조상은 백인이 이주할 무렵에도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분명 그들만의 엄격한 사회적 체계와 지도자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체계와 지도자의 통솔 하에 경제활동도 영위하고 있었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거나 모임을 갖고 전통의식도 치렀다는 사실에서 그들만의 전통적 문화요소도 분명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원주민을 접한 백인들의 눈에는 그들이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주체 없이 살아가는 원시인 정도로 비춰졌다. 그래서 백인들이 그렇게도 쉽게 원주민들을 학살했는지도 모르겠다. 백인들은 말에 올라탄 채로 총을 쏘아가며 '인간사냥'을 했고, 기록으로 남은 사건인 1928년 노던 테리토리지역의 '코니스톤 대량학살'에서도 확인됐듯 원주민들의 음식물과 물에 독극물을 넣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백인들이 호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곳을 마치 사람이 안 사는 것처럼 '빈 땅'이라고 발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럽인들은 원래의 주인과 협상해야 할 법적인 필요성을 애초에 없애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땅을 쉽게 차지했다. 이는 원주민들이 영토에 대한 소유개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밀가루 몇 포대와 농기구 몇 개에 엄청나게 넓은 땅을 넘기기도 했고, 그러다 때로는 무참히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탈취한 땅에 백인들은 양, 토끼, 소를 들여와 목초지를 만들었다. 유럽식 양목산업의 발전으로 가축들이 넓은 오지를 점유하게 되고, 그만큼 원주민들의 야생 활동은 위축됐다. 또 이 가축들이 목초를 먹어치우면서 비옥했던 토양이 점차 사라지고 토종동물들도 멸종돼 사냥으로 지탱되던 원주민 경제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 뿐이랴. 백인들이 가져온 새로운 질병들(수두, 천연두, 독감, 성병, 홍역 등)은 유전적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의 생명을 추수하듯이 앗아갔다. 특히 시드니 인근에서는 천연두로 인해 2년 새 절반이 넘는 원주민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호주대륙은 '백인천하'가 되어갔고 반면 원주민들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원주민들의 언어만 봐도 그렇다. 원래 원주민들은 250개에 달하는 언어 및 700여 개의 방언을 쓰며 살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50개 언어는 현재 완전히 소멸됐다. 간신히 살아남은 언어들도 그 대부분은 사멸의 위기에 몰려 있다. 이같이 백인들이 원주민에게 가한 잘못은 수도 없이 많다.

굶주림과 구타... 악몽으로 남은 수용소 안의 삶

2008년 2월 13일 호주 캔버라 국회의사당에서 러드 총리가 '원주민가족 와해정책'에 대한 사과 연설을 하는 동안 한 원주민 여성이 방청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 연합뉴스

하지만 제일 경악할 만한 범죄는 따로 있다. 바로 백인들과 원주민 간 '동화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놓은 일이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이 늘어나자 이들을 백인사회로 흡수시키기 위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가족와해정책'은 연방정부 특별법에 의해 일괄적으로 시행됐다.

호주 정부는 각 주의 법령을 통해 원주민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놓는 것을 인가해 1900년에서 1972년 사이에 전체 원주민 아이의 10~30%로 추정되는 최소 10만 명(원주민 측 주장)의 혼혈아동들이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들이 그 미개한 사람들과 미개한 곳에서 살지 않도록 '구출'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렇게 혼혈아동에게 남은 원주민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시행된 정책인 만큼 주로 피부색이 하얀 원주민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강제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 때문에 원주민 부모들은 일부러 자기 아이들의 피부를 검게 만드는 일까지 자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은 수용소 등에서 백인화, 문명화 교육을 받은 후 순수 원주민에 가까운 혼혈은 강제노역 현장으로, 백인에 가까운 혼혈은 신문광고 등을 통해 백인 가정에 입양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행복했을까? 오히려 생지옥으로 내몰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애초 사랑하는 엄마의 품에서 강제로 떨어지는 것 자체가 이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질 노릇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까지 거침없이 쓰던, 원주민의 말을 해서도 안 됐다. 이렇게 전혀 다른 생활환경 속에서 적응하는 일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얌전히 '문명화' 과정만 거쳤다면 사실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열악한 수용소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굶주림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예컨대 3살 때 가족으로부터 떨어져야 했던 로이 스튜어트(Roy Stewart)는 그가 수용됐던 뉴사우스웨일즈 킨첼라수용소(Kinchela Boys' home)에서 겪은 기억 때문에 77살에 죽을 때까지 평생을 악몽에 시달렸다. 그는 수용소에서 술 취한 감독관이 때려죽인 아이들을 땅에 묻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수용소 안에 있던 혼혈아동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못했던 셈이다. 이들이 수용됐던 고아원이나 교회 시설의 담벼락에는 탈출을 막기 위해 철망을 쳐놓기도 했다고 하니, 사실상 감옥과 다름없었다.

노동착취와 성폭행... 백인 가정의 '노예'였을 뿐

그렇게 '문명화' 과정을 거친 아이들이 마침내 백인 가정이나 선교기관에 도착한 순간,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었을까. 아니, 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상 여자아이들은 가정부로, 남자아이들은 농사나 노동일을 돕기 위해 백인들에게 보내졌기 때문이었다. 구타당하는 것은 예삿일이었으며 거의 노예와 맞먹는 수준의 노동착취까지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중 10분의 1이 넘는 아이들은 성적 학대를 당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이 1941년생 발레리 리노우(Valerie Linow)이다. 그녀는 2살 때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보매더리수용소(Bomaderry Children's home)에서 살다가 1958년 16살 때 백인 목축업자 가족의 하녀가 되었다. 사건은 그녀가 17살이 되었을 때 일어났다. 발레리가 우유 양동이를 엎지르는 실수를 하자 목축업자가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구타한 것.

"그는 갑자기 내게 '들어가 있어' 하고 소리쳤고 몇 분 뒤 울타리용 가시가 박힌 철사로 제 다리를 때렸지요.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려 몸을 웅크렸고 결국 다리에 흉터가 생겼어요."

그의 폭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발레리를 폭행한 그는 그녀에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치더니 따라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 던진 후 성폭행했다. 만신창이가 된 발레리는 용기 내어 경찰에 신고했지만 역시나, 그 목축업자는 기소되지 않았다. 경찰에게 있어서 혼혈아동의 인권은 지켜줄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권이란 '백인의 권리'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이들에게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강제로 고아가 된 그들은 평생을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고, 백인 가정에서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낮은 자존감, 우울증, 불신, 자괴감, 분노 역시 몸집을 불려갔다.

이 같은 학대와 정신적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들은 썩은 동아줄을 잡듯이 약물과 알코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잃어 버렸던 것이다. 이 불쌍한 고아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가족을 찾고 있으며 자기들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Stolen Generations(도둑맞은 세대)'라고도 부른다.

2008년 2월 13일 호주 캔버라 국회의사당에서 러드 총리가 '원주민가족 와해정책'에 대해 사과한 뒤 원주민 대표와 포옹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08년 호주 총리의 '공식 사과'... 하지만 계속되는 아픔

그렇게 애버리진의 가족들은 와해되었다. 이제 그들은 호주 전체 인구로 따지자면 약 2% 50여만 명에 불과하다. 그 50만 명 중 약 4분의 1이 '도둑맞은 세대'다. 이 '도둑맞은 세대'의 고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호주 원주민은 문맹률과 빈곤율이 높다. 평균수명도 백인보다 17년이나 적다. 실업률은 백인보다 3배나 높고, 범죄로 구속되는 비율도 2.8배에 이른다. 자살률도 일반 호주인들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백인 사회나 정부는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문제가 호주 백인 사회를 위협하는 요인이라며 걱정하고 있는 상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같은 상황에 맞서 최근 원주민 사회에서 호주 백인 사회에 무조건 동화되기보다 원주민 통합과 함께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도둑맞은 세대'들의 권리 찾기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1995년 호주 연방정부는 지난날 원주민 아이들에 대한 강제입양 및 분리정책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질의를 개최했고 이어 1997년 4월에는 인권 및 평등위원회가 연립정당 정부에 '집으로 데려오기(Bring them Home)'라는 보고서를 전달하며 '도둑맞은 세대'의 가족을 찾아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연방의회에서 당시 총리였던 케빈 러드는 "우리는 동료 호주인(원주민)에게 깊은 슬픔과 고통, 손실을 안긴 역대 정부 및 의회의 법률, 정책들에 대해 사과한다"며 용서를 구했고, 의회도 러드총리가 발의한 원주민에 대한 사과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주민을 위해서였다"고 홍보하고 자위했던 정책이 사실상 거짓이었고 실패작이었음을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부 공식 입장과는 달리 여전히 호주 백인 사회에는 아직도 원주민아동 강제분리정책이 당시로서는 원주민 아동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마치 36년간 식민지배를 해놓고 그것이 한국을 개화시켰다고 이야기하는 일본 극우파의 논리와 똑같다. 일제강점기 우리네 할아버지·할머니들은 강제로 창씨개명을 당하고 일본말을 써야 했다. 원주민의 언어를 쓰지 못하고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했던 혼혈아동들의 상황과 무엇이 크게 다르랴. 하지만 호주 정부는 '공식 사과'라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감감 무소식이다. 우리는 언제쯤 일본의 공식 사과를 들을 수 있을까.
#국가의거짓말 #가족와해정책 #호주 원주민 #레드펀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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