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오후 7시55분. '축당선'을 새긴 케이크와 샴페인을 옆에 두고 안국빌딩 앞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출구조사 발표가 5분여 남은 시점에서도 결과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50일 가까이 희망캠프를 지켜보면서 필자가 느낀 불안감은 마지막 순간에도 떠나지 않았다. 이름 없는 시민군으로 꾸려진 희망캠프가 선거라는 전쟁을, 그것도 대한민국 정치판도를 뒤흔들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치르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모습이었다.
또, 역사상 유래가 없다할 정도로 조직도 돈도 없는 박원순 시민후보는 수많은 전투경험과 화려한 갑옷으로 치장된 적장들에 비해 너무도 유약해 보였고, 실제 경선과 본선과정에서 그가 입은 상처 또한 적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결과는 작전 한번 제대로 수행해보지 못한 외인부대의 승리였고, 남루한 흰색 로브만을 걸친 시민후보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원인을 희망캠프를 구성한 외인부대의 눈물나던 헌신과 박원순의 삶의 궤적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자의 말처럼 '박원순의 승리는 박원순의 승리'가 아닌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무엇보다 2,30대의 몰표에 가까운 지지에 더해 40대 이하의 서울시민의 선택이 박원순 서울시장의 가장 큰 일등공신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희망캠프 밖에서 자발적으로 SNS를 이용해 박원순 시민후보를 옹립시켰고, 또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막강한 전투력을 갖춘 적장으로부터 박원순 이병을 구해줬다.
그뿐만이 아니다. 온라인에서 보여준 이들의 표현력만큼이나 현실에서의 실천력 또한 대단했다. 바쁜 출퇴근시간 투표장으로 이어진 넥타이와 하이힐 부대의 행렬은 돈과 조직만을 믿던 기성정당만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었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바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였던 것이다.
또한, 이번 선거과정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대합창'도 박원순 야권단일후보의 승리에 충분한 기여를 했다. 마지막 날 광화문 유세에 박원순과 함께한 야권의 늠름한 장수들을 보면서 다음 총선, 대선에서도 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보다 큰 승리의 기쁨을 나누리란 확신도 들었다.
그러나, 박원순이었기 때문에 그 많은 야권의 걸출한 인사들을 한데 모을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나누는 정당과 대권주자들이 앞으로도 박원순을 위해 '칼자국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움 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들이 다함께 모일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거스를 수 없는 시민의 뜻이었고 명령이 박원순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원순의 서울시정이 시작되고 행정과 의회의 권력을 나눠가진 이후에는 선거기간 보여준 야권의 호의와 보호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제는 조직도 돈도 없는 개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시민의 뜻과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고 그 이상의 헌신과 봉사를 보여주는 것만이 남은 서울시장 임기, 그리고 박원순과 시민세력이 바라는 정치를 지속시키는 길이다.
이번에 박원순을 선택한 시민들은 박원순호의 선원이 아니라 승객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지난번 선장은 더 큰 배의 선장으로 나서기 위해 객실의 승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배의 화려한 외관과 엔진속도에만 신경 쓰며 험한 항로로만 다녔기에 버림받은 것이다. 또한, 승객들도 이번 선장이 당분간 조금은 미숙하더라도 표를 환불해 달라거나, 다른 배로 갈아탄다는 협박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박원순호를 선택한 승객들은 회사이름도 없고, 조금 허름하긴 하지만 대학생 학비를 걱정하는 아버지 고민과 월세와 장바구니 물가 걱정을 나눌 수 있는 아주머니의 오지랖을 지닌 선장이 낫다고 생각해 온 것이다.
물론, 시민들 모두 원하는 선장이 키를 잡는다고 단기간에 1등석과 2등석의 서비스 격차를 해소하고, 객실의 부모와 아이 모두가 편안해지는 순항이 이뤄지진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이미 우리는 시민의 자발적 힘으로 만든 첫 번째 대통령을 너무도 쉽게 잃었던 아픈 기억이 있다. 박원순 그가 시민의 편에 선 첫 번째 시장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흠결을 보인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쉽게 등 돌리거나 욕하지 말고, 끝까지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 선거전날 광화문 유세의 유시민 연설을 빌어 글을 마친다.
"(생략)...당선에서 끝이 아니라 박 후보를 사랑받고 성공한 시장으로 만들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박원순은) 매우 훌륭한 후보지만 인간이기에 때론 실수를 하거나 본의 아니게 그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뜻과 다른 정책을 어쩔 수 없이 할 경우도 있을 것인데, 이럴 경우 '니가 어떻게 이렇게 하냐'며 저들과 같이 돌을 던질 것입니까...저와 국민참여당은 최선을 다해 당선을 빌고, 당선이 되면 박후보가 한나라당 당원처럼 되지 않는 한, 실수하고 조금 잘못해도 절대 돌 던지지도, 버리지도 않고, 끝까지 사랑하며 믿고 지켜줄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할 두 번째 일입니다...(생략)"
2011.11.04 16:28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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