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쌓다가 얼어죽고"...도성은 그렇게 태어났다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도성을 품다>를 가다

등록 2011.11.14 10:00수정 2011.11.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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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성을 품다>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도성의 역사는 곧 서울의 역사

오랜만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으레 박물관이란 공간은 한 번 들른 뒤, 다시 찾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에 내가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은 이유는 우연하게 보게 된 박물관의 기획전시 때문이었다. <서울, 도성을 품다>가 바로 그것.


서울의 도성이라…. 그것은 나의 발걸음을 박물관으로 향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존재였다. 도성은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서울을 돌아다닐 때면 언제나 부딪히는 존재인 동시에 항상 깊은 사유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선인들과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존재로서의 도성.

도시 서울은 아주 오랫동안 권력의 중심이었다. 한반도 내 사람들은 타인을 분류할 때 서울놈과 촌놈으로 나눴으며, 언어를 나눌 때 역시 서울말은 표준어로, 나머지는 사투리로 분류했다. 비록 지금이야 서울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같은 서울 안에서도 강북이냐, 강남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지만, 이전에는 아주 오랫동안 서울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상징자본'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번 서울역사박물관이 주목한 도성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이야 관광의 대상이요,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성가신 논쟁거리로 전락한 도성이지만, 과거 조선 시대 그것은 사대문의 안과 밖을 규정하는, 소위 서울 사람들이 갖는 정체성의 테두리요 근간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과거 서울은 도성에 의해 규정됐던 바, '도성의 역사는 곧 서울의 역사'인 셈이다.

도성의 탄생,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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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 일상 속의 서울 도성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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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의 공존 성북동 ⓒ 이희동


전시회는 도성의 이야기를 크게 '탄생과 성장' '파괴' 그리고 '재발견과 복원',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그 중 앞머리에 등장하는 것은 도성의 탄생과 성장이었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과 새로운 수도, 그리고 그에 걸맞은 도성의 탄생은 실로 엄청난 역사였다. 도성은 3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11만8000여 명이 동원돼(당시 한양 인구 5만여 명) 완성됐는데, 공사기간 동안 872명이 사망했고 이외 집에 돌아가는 길이나 집에 가서 죽은 이들이 142명이나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희생을 군주가 마냥 모른 척한 것은 아닌 듯하다. 잠시 세종의 말을 들어보자.

"비록 성을 쌓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어찌 백성을 얼어 죽게 해서야 되겠느냐? 백성 한 사람도 얼어 죽는 자가 없게 하라." (<세종실록> 4년(1422년) 1월 15일 중)

새로운 나라의 근간이요, 도성 내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사업을 하고 있지만, 그 탓에 백성들이 희생당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슴 아파하는 세종.

비극적인 일이지만 세종의 대사를 보고 내가 떠올린 건 그로부터 600년 뒤,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한심한 현실이었다. 4대강 공사로 19명이 사망했지만 이에 대해 유감의 표시는커녕 "사고다운 사고는 몇 건 없고 대부분 본인 실수에 의한 교통사고나 익사사고 등"(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 2011년 4월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중)이라며 발뺌하기 바쁜 우리의 정부. 한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자들로서 과연 그들이 제대로 된 자질이 있는 것일까? 게다가 4대강 사업은 그 모두가 필요성을 인정했던 조선 시대 도성 축조와 달리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업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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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의 서울성곽 성북동 ⓒ 이희동


박물관은 도성의 축조 뒤 그 정비와 운영을 열거함으로써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의 성곽구조가 군사적으로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자 군제를 바꾸고 도성 주변에 산성을 추가로 건설해 방어를 다시 한 숙종의 이야기와 당시 도성의 문들이 어떻게 운영됐는지 등을 설명한다.

일제 통치를 위해 파괴된 도성

그러나 서울 도성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가장 볼 만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도성의 파괴에 관한 부분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서울시민에게 도성과 관련해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질문은 '다른 도시와는 달리 왜 서울의 성곽은 허물어졌으며, 그 파괴의 과정에서 우리가 잃게 된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외국 여행을 나가 본 사람들은 한 번쯤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역사가 얼마 되지 않는 도시도 그들만의 도성을 가지고 있는데 왜 우리의 600년 도읍이라는 서울은 아무것도 없는가. 그것들은 모두 언제, 어디로, 왜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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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세종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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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안산에서 바라본 서울성곽 산에는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이희동


전시회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서울의 도성은 1800년대 말, 근대화와 함께 파괴되기 시작했다'고 답해준다. 근대화의 격랑이 몰아치면서 도성은 도시의 발달을 저해하는 전근대적 요소이자 몰락해가는 조선 왕조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이후 도로건설을 위해, 도시의 성장을 위해, 통치 이데올로기의 전파를 위해, 정권안보를 위해, 재산 증식을 위해 파괴됐다.

"동대문 밖에는 옹성을 회축하여 교통상에 불편이 심함으로써 금회에 문측의 성벽을 개착하고 폭원 8칸의 신도로를 수축하야 성밖으로 직통케 하는데 이 공사는 내무부의 소간으로 시행한다 하고 본월 하순에 낙성할 예정이라더라."(<매일신보> 1911년 5월 23일)

문제는 그 파괴의 주체였다. 근대화와 마찬가지로 도성 파괴의 주체는 우리가 아닌 일제였다. 따라서 도성의 해체과정은 상당 부분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즉, 자발적인 근대화가 이뤄졌다면 세계 여타 다른 도시들처럼 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을 수도 있었던 도성이 일제의 입맛대로 그들의 필요에 의해 철저하게 훼손된 것이다. 일제는 서울 사람들 정체성의 근간이었던 도성을 파괴함으로써 시대의 단절을 꾀했고, 그들의 권력을 과시했다. 도성의 철거된 성돌을 그들의 건축물에 사용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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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이젠 볼 수 없는 ⓒ 이희동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입니다…. 파괴하기에는 아깝지 않습니까?" (나가이 키타로, <조선회고록>, 中田錦城, 1915~)

도성의 비극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 정당성을 결여한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그들은 자신의 치적을 보여주기 위해 조국 근대화, 산업화만을 지상 최고의 과제로 삼았는데 이 과정에서 도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전근대는 오직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으며, 따라서 도성은 권력에 의해, 혹은 부에 의해 훼손됐다. 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건물들을 도성 위로 쌓아 올렸으며, 도성 일부분은 사유지가 돼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도성의 복원, 하지만 역사적 검증은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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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1.21 사태가 벌어진 곳 ⓒ 이희동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근대화 과정만큼이나 왜곡된 모습으로 파괴된 서울의 도성. 역설적이게도 이 도성의 복원을 시작한 이는 해방 이후 맹목적인 산업화를 추진하며 도성 파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1968년 1.21 사태 이후 '국민들에게 좀 더 강한 국가안보의식을 심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과거 조선 시대 안보의 상징이었던 서울 성곽을 복원함으로써 이를 국가안보의 상징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정권의 필요에 의해 제대로 된 역사적, 고고학적 고증도 없이 성곽이 복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됐던 도성의 복원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틀을 잡기 시작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국민들이 권력을 되찾아옴에 따라 정권 안보의 명목으로 통제됐던 일부 구간들이 공개됐다. 과거 먹고 사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우리의 과거를, 그리고 우리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게 된 것이다. 도성을 통해 서울의 역사를 생각하고, 과거 조상들과 현재의 우리를 잇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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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 북대문 ⓒ 이희동


그럼에도 서울의 도성이 완전하게 복원될 리는 만무하다. 변해버린 환경도 환경 탓이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개발의 관점에서 도성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보자. 그들이 복원했고, 복원하려 했던 청계천이나 이간수문이 과연 본래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토목과 개발의 관점에서 바라봤으며, 문화재 복원을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과 토론이 필요한데도 자신의 치적을 하나라도 더 남기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했다. 도올 김용옥이 <나꼼수>에서 이야기 했듯이 '청계천을 거대한 포석정'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서울 도성은 단순한 서울의 랜드마크요, 관광지가 아니다. 그것은 곧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요, 시대의 자화상이다. 도성은 끊임없이 복원될 것이다. 부디 그 복원공사를 통해 많은 이들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서울, 도성을 품다> 기획전시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11월 20일까지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서울, 도성을 품다> 기획전시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11월 20일까지 계속됩니다.
#서울역사박물관 #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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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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