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대가 청운대로...퇴계 때문에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소백산 자락길 ④] 초암사 달밭골

등록 2011.11.14 11:48수정 2011.11.1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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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가 청운대로 바뀌었군, 퇴계 선생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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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1교 위로 초암사가 보인다. ⓒ 이상기


죽계1교를 건너 초암사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다. 길 왼쪽으로는 죽계천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초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늦가을이라 무성하던 나뭇잎들도 떨어지고 죽계천의 수량도 줄어들었다. 그래서인지 바위와 개울의 윤곽은 더 뚜렷하다. 초암사 앞 이곳 죽계천에는 눈에 띄는 바위가 하나 있다. 청운대(靑雲臺)다. 푸른 구름이 머무는 장소라는 뜻이다. 구름이 푸를 수 있나?


그런데 이처럼 구름이 파랗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이 1549년 백운동 서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소백산에 오른적이 있다. 그때의 기록이 '유소백산록'에 남아 있다. 퇴계는 백운동서원에서 10리 떨어진 죽계의 초암(사)을 찾는다. 그리고 초암사 아래에 있는 절경 백운대를 보면서 그 이름을 청운대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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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대 ⓒ 이상기


"그(초암사) 아래로 맑은 물이 소용돌이치며 급하게 흘러내리다가 멈추어 깊은 소를 이룬다. 그 위 너른 곳에 앉아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본다. 아래를 보며 물소리 들으니 진짜 절경이 따로 없어. 주세붕이 이곳에서 놀다 이름 붙이길 백운대라 했네.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그 이름들이 혼란스럽구나. 흰 백을 푸를 청으로 고치면 좋지 않겠는가. (其下淸流激湍。迤爲渟泓。上平可坐。南望山門。俯聽潺湲。眞絶致也。周景遊名之曰白雲臺。余謂旣有白雲洞,白雲庵。玆名不其混乎。不若改白爲靑之爲善也)."

그 후 사람들은 이곳을 청운대라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필하가 죽계구곡을 새로 설정하면서 바위에 제2곡 청운대라고 새겨 넣었다. 그 이후로 초암사 앞 바위가 백운대가 아닌 청운대로 바뀌었다.

초암사 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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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부도 ⓒ 이상기


초암사는 4단 내지 5단의 공간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절과 다르게 가장 아래 부분에 부도탑이 있다. 그것은 부도가 다른 곳으로부터 이전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도는 두 기인데,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동부도와 서부도라고 부른다. 이들 두 기의 부도는 모두 경북 유형문화재다. 기본은 팔각원당형의 부도다. 그렇다면 높이 잡아 통일신라시대, 늦게 잡으면 고려 초의 것이 된다.


상대적으로 동부도의 조각이 정교하고 예술성도 앞서 시대가 조금 앞서는 것으로 여겨진다. 문비, 앙련과 복련, 안상 등의 조각이 아직도 선명하다. 스님의 다비육신이 쉬기에는 아주 좋은 집이다. 또 두기가 나란히 있어 외롭지 않아 좋겠다. 그런데 이들 부도가 복원 과정에서 탑신과 중대석이 뒤바뀌었다고 해서 말이 많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복원에는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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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석탑 ⓒ 이상기


부도탑에서 계단을 오르면 3층석탑을 볼 수 있다. 3층석탑 역시 경북 유형문화재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세우고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탑이다. 예술적인 측면에서 조금은 매너리즘에 빠진 듯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단아하다고 하기에는 경쾌함이 부족하고,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예술성이 부족하다. 3층석탑 뒤로는 초암사 요사채와 심검당이 있다.

선방에 보니 비구니 스님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초암사를 지금처럼 훌륭한 절로 만든 분이 여승인 보원스님이다. 1980년대 초 스님이 이곳에 불사를 시작했으며,  현재는 대웅전, 대적광전, 삼성각, 요사채, 심검당 등을 갖춘 현대적인 절이 되었다. 그러나 초암사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지으면서 이곳 초암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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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대웅전 ⓒ 이상기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화엄종찰을 짓기 위해 소백산 지역을 다니다가 현재 부석사 자리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서까래가 부족하여 현재의 초암사 자리에 풀로 암자를 짓고 수행하면서 서까래를 공급해 부석사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제4권 「의해」'의상전교'에 따르면 의상대사는 전국적으로 화엄십찰을 지었다. 그 중 두 개를 소백산에 지었는데, 그것이 소백 남쪽의 부석사와 소백 북쪽의 비마라사다.

3층석탑과 선방에서 다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있다. 절 전체의 구조로 보아서는 대웅전이 중심에 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했다. 여기서 다시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이 나온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을 모셨다. 현재 초암사의 중심 건물은 누가 뭐래도 대적광전이다. 우선 법당이 크고, 불상이나 탱화 단청 등이 가장 화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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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를 지키는 개 ⓒ 이상기


대적광전에서 조금 올라가면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그런데 삼성각 옆에서 돌로 만든 개가 한 마리 지키고 있다. 초암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봉우리인 원적봉이 도적의 형상을 하고 있어 이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일종의 비보 차원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구니 스님들의 절이니 경계의 차원에서 만들어 놓은 것일 수도 있다.

이곳 초암사를 지나간 시인묵객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남긴 글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주세붕(1495-1554) 선생의 글이 남아있어 우리는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 그의 문집 <무릉잡고> '소백산 초암사에서 자고(宿小白山草菴寺)'에 따르면, 그는 1543년(癸卯) 6월 29일 초암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석륜암에 오른다. 이 시에서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속세를 떠난 스님의 청정심과 인정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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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대적광전 ⓒ 이상기


"산이 부처님 몸처럼 우뚝 서서 청정한 색을 띠고 있고 山立佛身淸淨色
계곡물 소리와 스님의 게송이 넓고 길게 울려 퍼진다.  溪飜僧偈廣長聲
은하수 이웃하고 누워 별의 움직임 살피니                 臥隣河漢星疑動
마음은 속세의 때를 씻어 말조차 맑아지네.                心洗塵埃語自淸
말로써 서로 수작하지 않으니 이게 바로 넉넉함일세.   莫說相酬是求益
뜬구름 같은 삶, 가는 곳마다 사람의 정 가득하구나.    浮生隨處有人情"

금당반석에는 제1곡이라는 각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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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1곡 ⓒ 이상기


우리 일행은 초암사 위 금당반석 주변에서 점심을 먹는다. 나는 문화유산을 살펴보고 사진을 찍고 하다 보니 늘 일행 중 꼴찌로 따라가게 된다. 초암사 절도 볼 게 많아 일행들 뒤로 한참 처졌다. 전화로 점심자리를 알려와 찾아가 보니 벌써 자리를 마련하고 준비를 다해 놓았다. 그곳은 죽계 제8곡인 금당반석이 멀지 않은 곳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주 금당반석을 찾아 그곳에서 점심을 먹는 건데 아쉽다.

제8곡 금당반석(金堂磐石)은 초암사 상류 300m 지점에 있다. 이곳에는 암반 사이로 작은 폭포가 형성되어 있고, 그 아래로 비교적 넓은 암반(磐石)이 조성되어 있다. 이들 폭포 옆 바위벽에는 죽계일곡(竹溪一曲)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암반에는 제일수석(第一水石)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물과 돌의 어울림이 제일 훌륭하다는 애기다.

이처럼 각자를 한 사람이 신필하(申弼夏)다. 반석 옆의 큰 바위에 새겨진 신필하라는 이름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는 영조 때(1728년) 순흥부사를 지낸 사람으로 최석정의 문인이다. 그렇다면 소론 계열로 볼 수 있고, 노론 계열이 득세하면서 더 이상 출세를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1723년(경종 12년) '공신(功臣)의 적장(嫡將)들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리다'에 보면 그는 5품의 대호군(大護軍)이었다.

중봉합류에서 죽계구곡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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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밭골의 계류 ⓒ 이상기


점심을 먹고 우리는 이제 죽계천의 최상류 달밭골로 오른다. 달밭골은 초암사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에 있다. 달밭골 안내판에 따르면 달밭골 이름의 유래를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달뙈기만한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망봉과 초암사의 바깥 골짜기라는 뜻이란다.

그런데 둘 다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 지역을 보면 산속인데 조금 넓고 평평한 공간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밭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확실하다. 문제는 달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그건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얘기를 들어봐야 하는데, 이곳에 살던 화전민들이 70년대 다 떠나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다.

지금 달밭골에는 몇몇 집들이 있지만, 그들은 모두 화전민으로부터 집을 사서 들어온 외지인이다. 우리는 이곳에 사는 이상권씨를 만났는데, 그도 역시 도시에서 사진관을 하다 은퇴 후 아내와 둘이 이곳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달밭골의 유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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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밭골 사람들 ⓒ 이상기


달밭골을 오르다 보면 달밭골과 석천폭포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이곳을 사람들은 중봉합류(中峰合流)하고 부른다. 두 물이 합쳐지기 때문에 이곳에서부터는 수량이 조금 많아진다. 이곳이 바로 죽계 제9곡이다. 드디어 우리는 죽계구곡을 모두 답사한 셈이다. 사실 구곡 전체를 답사하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선 꽤나 긴 거리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 구곡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차를 타고 구곡의 지점만을 확인하는 형식이었는데, 이번에는 걸으면서 구곡 전체를 답사할 수 있어서 정말 가슴이 뿌듯하다.

이제 우리는 달밭골의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며 마지막 경사를 올라간다. 발밑으로는 낙엽의 푹신함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을 치는 방망이질을 느낄 수 있다. 처음으로 이마에 땀방울이 조금 맺힌다. 이제 비로사까지는 1.9㎞ 남았다는 표지판이 나온다. '길은 모두 일가친척. 걷는다는 것은 가까운 친척을 만나는 것입니다'라는 입간판도 보인다. 영주문화연구회가 소백산 자락길을 만들면서 내건 슬로건이다. 괜찮은 문구고 표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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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밭골의 오르막길 ⓒ 이상기


오후 2시 18분 우리는 비로봉에서 흘러내리는 능선 고갯마루에 선다. 그리고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제 비로사를 향해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내려가는 일은 오르는 일보다 쉽고 편하다. 그렇지만 인생에서는 하산길에 오히려 스타일을 구기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것은 오를 때 너무 승승장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산행에는 승승장구가 없다. 내발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배우는 게 참 많다.
#초암사 #청운대 #부도와 삼층석탑 #금당반석 #중봉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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