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 뒤지면 벌금 물리겠다고?

[해외리포트] 경제 위기 프랑스, 현대판 '이삭 줍는 사람들'

등록 2011.11.26 12:23수정 2011.12.0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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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여인. ⓒ www.estrepublicain.fr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밀레의 '이삭줍기(Des glaneuses)' 그림이 걸려 있다.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유명한 그림이다. 불어로 글라네르는 이삭 줍는 여인들을 지칭하는데 밀레는 수확이 끝난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여인 3명을 정감 있게 묘사했다.

수확 후에 남은 이삭을 줍는 행위는 오래전부터 이루어져왔는데 밭 주인도 묵인해 주는 일이었다. 어차피 밭에 두어야 썩거나 새들의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를 벌써 10분의 1이나 지나온 오늘날 프랑스에서 현대판 글라네르(이삭 줍는 사람)들이 출몰하고 있다.

현대판 글라네르는 파장 후에 상인이 버리는 상한 야채나 과일을 슬그머니 집어가거나 슈퍼마켓의 쓰레기통을 뒤져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을 집어가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이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은 대략 10여 년 전이다. 처음에는 정해진 주거지도 없고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외국인 이민자들이나 SDF(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걸인) 등의 아웃사이더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오래 지속되면서, 멀쩡한 직업이 있지만 월급으로 한 달을 버티기가 버거운 서민들이 젊은이나 중년층 혹은 퇴직자를 가릴 것 없이 이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프랑스는 자녀들이 부모들보다 가난한 시대를 맞이했다. 이렇게 기형적인 상황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9년 1월에 발표된 정부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성행하기 전에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다가 지금은 매년 감축되는 연금으로 경제 상황이 나빠져 '이삭줍기'를 할 수밖에 없는 퇴직 노인층들은 이 행위를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대신 생활고를 일찌감치 맛본 젊은 세대는 심한 거부 반응 없이 이 행위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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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이 다가오면, 상인들은 팔리지 않는 물건을 이렇게 떨이 가격으로 내놓는다. 이 가격에도 팔리지 않으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데, 이런 물건을 글라네르들이 집어간다. ⓒ 한경미


현대판 '이삭 줍는 사람들'


프랑스 남서부 지방의 지역 신문인 <라 데페스>는 2010년 10월 11일 '이삭줍기'를 하며 살아가는 즈느비에브의 삶을 보도했다. 즈느비에브는 프랑스 남서부 지역인 아장(Agen)에 사는 장애여성이다. 즈느비에브는 파장이 다가올 무렵이면 어김없이 마을 시장에 나타난다. 즈느비에브가 정부에서 매달 받는 장애 수당은 600유로이다. 방값 400유로와 이러저러한 공과금을 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이 한 푼도 없게 된다. 즈느비에브가 먹을 걸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삭줍기'다.

이렇게 파장 때 버려지는 상한 과일과 야채를 거두어 입에 풀칠을 하는 즈느비에브는 그래도 따듯한 가슴을 간직하고 있다. 어쨌건 상인들 덕에 먹을거리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즈느비에브는 스스로 상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노력한다. 장이 파할 때 여기저기 상인들의 짐을 정리해주는 즈느비에브에게 성한 과일을 주는 상인도 있다. 정육점 주인은 남는 뼈다귀나 고기 조각 등을 주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장 상인들은 글라네르를 묵인한다. 상한 과일이나 야채를 버리는 대신 따로 보관해 직접 건네주는 이들도 있다. 파장 10여 분 후에 쓰레기차가 나타나 길거리에 버려진 모든 물건을 쓸어가기 때문에 '이삭줍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다. 그러나 일부 청소부들도 이들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이들에게 물건을 챙겨갈 수 있는 시간을 주기도 한다.

'이삭줍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진 주거가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이렇게 챙겨간 재료로 집에서 음식을 해먹는다. 가끔 정해진 주거가 없는 이들이 '이삭줍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요리할 필요가 없는 재료나 날 것으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주로 챙겨간다.

이들 사이에는 상부상조가 이루어져 서로 수확한 물건을 교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브로콜리를 한 상자 얻은 사람은 사과를 한 상자 얻은 사람과 반씩 교환한다. 어떤 이는 수확물을 시장 한구석에 앉아 있는 걸인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삭줍기'를 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노하우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버려지는 물건이 많이 나오는 장을 알아야 하고 어느 상인이 어떤 물건을 버리는지도 알아야 한다. 이걸 파악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혼자 양육하느라 시간 여유가 없는 싱글맘이 드문 게 그런 이유에서이다.

'이삭줍기'는 극빈층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생존 수단이다. 이 상황까지 오기 전에 이들은 여러 단계의 상황을 거친다. 그 첫 번째가 적은 월급을 최대한 절약해서 사는 것이다. 그것으로 상황이 해결되지 않아 먹을거리가 부족하면 시나 국가에서 주는 식료품 지원을 받는다. 일부는 구걸 경험도 있는데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생존 방식이 '이삭줍기'인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 정부 조사 결과 드러났다.

정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처음에 '이삭줍기'를 하기 위해 파장 시간에 맞춰 가는 이들의 발걸음은 매우 무겁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걱정된다. 그러나 모든 게 처음이 힘들듯이 시간이 가면서 여력이 생겨 초기의 불편함은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이삭줍기'의 장점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구할 수 있어 균형 잡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에서 주는 식료품 지원 품목은 스파게티, 쌀, 우유, 커피 등의 보관 식품이 많아 비타민 섭취가 어려운데, 이삭줍기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경제 상황이 나아져 '이삭줍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되어도, 가계비를 절약하는 의미에서 계속 이 행위를 하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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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귤을 줍는 노인. ⓒ www.ouest-france.fr


이삭줍기 단속하는 행정당국 조치 논란

지난 9월 16일 파리 동쪽 지역인 노장의 마르텡 시장은 노장에서 '이삭줍기'를 금한다고 밝혔다. 글라네르가 길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음식물을 찾아내고, 그 과정에서 쓰레기통에 있던 일부 음식물이 거리에 버려져 공공 보건을 침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시장은 '이삭줍기' 금지 조치를 위반하면 38유로의 벌금을 물리겠다고 밝혔다.

노장은 3만 명이 사는 곳이다. 많은 노장 시민들은 시장의 이 결정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먹을 게 없는 극빈자들이 어차피 버려지는 음식을 주워가는 건데 그것까지 금한다면 주민들은 고개를 들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한 시민은 씁쓸하게 말했다. 이 사람은 "점점 젊은 친구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덧붙였다고 인터넷 신문인 <RUE89>가 10월 19일 보도했다.

인권 연맹과 좌파 단체, 그리고 시장의 이번 결정에 반감을 품은 주민 20여 명이 며칠 후 파장 시각인 오후 1시를 기다려 대대적으로 '이삭줍기'를 시작했다. 많은 주민과 상인들이 이들을 지지했다. 한 야채상인은 "난 시장의 이번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팔리지 않아 버려지는 물건을 주워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상인은 "시장 뒤에 대형 쓰레기통이 있는데 상인들이 팔리지 않는 음식이나 옷, 신발 등을 버리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뒤진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30여 분 동안 '이삭줍기'를 한 후, 수확물을 글라네르에게 나눠줬다. 이들 중 일부는 시장이 이 규칙을 철회하게 하기 위한 법적 대응도 생각했다.

노장 시민들의 다각적인 항의는 열매를 맺었다. 집단 '이삭줍기'에 이어 50여 명이 시의회 앞에서 침묵시위를 하고 1000여 명이 시의 글라네르 금지 규칙에 반대한다는 성명서에 서명했다. 이렇게 주민들의 반대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마르텡 시장은 11월 4일 새로운 규칙을 발표하였다. 새로운 규칙의 핵심은 '이삭줍기' 금지는 철회하고 그 대신 '쉬포나즈(쓰레기통에서 취한 물건을 제3자에게 다시 파는 행위)'는 금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시민들이 다시 한 번 권력에 맞서 승리한 사례다.

글라네르 금지 결정은 노장에서만 내려진 게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이미 이런 결정이 내려진 바 있다. 프랑스 북부 도시인 릴 근교에서도 8월에 글라네르 금지 결정이 내려졌다.

9월 12일 파리 시는 샹젤리제 대로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구걸하는 것을 금했다. 이 금지는 내년 1월 6일까지 유효하다. '1월 6일까지'로 기간을 정한 것은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연말연시라는 데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이 결정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38유로의 벌금을 물릴 방침이다. 노장과 샹젤리제의 벌금 38유로는 프랑스 정부가 정한 다양한 벌금 중 가장 적은 액수다. 그렇지만 글라네르나 구걸을 하는 사람들은 돈이 없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38유로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밀레의 <이삭줍기>. ⓒ .

#유럽재정위기 #이삭줍기 #경제 위기 #프랑스 #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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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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