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부 들어 시집 내지 않으려 했는데..."

고희 맞은 시인 이행자 다섯 번째 신작시집 <11월> 펴내

등록 2011.11.29 17:53수정 2011.11.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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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행자 이행자 시인이 올해 11월 고희를 맞아 다섯 번째 신작시집 <11월>을 펴냈다.
시인 이행자이행자 시인이 올해 11월 고희를 맞아 다섯 번째 신작시집 <11월>을 펴냈다. 이종찬

'절름발이 인생'이라는
글 한 꼭지에
울화가 치밀어
좋아하지도 않는
소주 두 병도 모자라
양주까지 마시고는
필름이 끊어진
내 자신이 싫다고 얘기하자
소설가 김별아가 하시는 말씀
"언니는
워낙 씩씩하게 잘 살아서
우리 모두 못 느끼고 살았는데......
-24쪽, '워낙 씩씩하게 잘 살아서' 모두  

시인 고정희(1948~1991년), 작가 윤정모, 이경자에 이어 '한국문단의 영원한 누님'으로 통하는 시인이 있다. 문인들이 '행자야~ 술 한 병 가져 오너라'라고 놀리면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죽을래'라고 말하며 싱긋 웃고 마는 시인. 그가 '재야운동단체 식모'라는 또 다른 애칭을 지니고 있는 이행자 시인이다.


"시나 쓰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되는 시대를, 통증을 핑계 삼아 사는 것 같아, 이 정부 들어 시집을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래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희를 기념하여 이 세상에 뭔가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후생들의 간청에 못 이겨 이렇게 한 권의 시집을 꾸려 보았다... 내 곁에 사랑하는 이들이 많고도 많아, '발문' 축하의 글을 써 주어 참, 고맙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이행자 시인이 올해 11월 고희를 맞아 다섯 번째 신작시집 <11월>을 펴냈다. 이번 시집 제목이 된 11월은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왜? 11월은 시인이 태어난 달이기도 하지만 '전태일문학상'을 받고 시인으로 다시 태어난 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집 제목을 <11월>이라 붙인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모두 4부로 이루어진 이번 시집에는 3부까지 신작시 52편이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에게 혹은 낮고 부드럽게 혹은 거칠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번 시집은 특히 고희 기념시집이어서 그런지 다른 시집과는 다르게 4부에 시인 강민, 정우영, 작가 김별아 등 12명에 이르는 축하 '발문'이 꽃다발처럼 얹혀 있다.  

'그리운 이에게', '달이 웃는다', '봄이 긴 여자', '워낙 씩씩하게 잘살아서', '맛있는 바람', '그렇게 또 사랑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이에게', '술잔에 매화를 꽂아놓고', '머루주를 마시며', '그 바다 그 하늘빛', '신화처럼 내게 온 너에게', '천둥치는 날의 연서', '거시기 천재 머시기', '은빛바다 은빛소년', '땅을 두드리는 여자' 등이 그 시편들.

이번 시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시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12명(김원익, 김별아, 전성태, 강민, 채원희, 안용대, 정우영, 김승환, 이원중, 홍선웅, 이수호, 박래군)이 쓴 '발문'이다. 문인, 화가, 노동운동가, 정치인 등 각계각층에서 일하는 이들이 쓴 이 '발문'을 읽으면 시인 이행자가 칠순까지 살아온 삶이 그대로 보인다.


신화연구가 김원익은 "이행자 시인은 그리스 신화의 처녀신 아르테미스 여신"이라며 "아르테미스 여신은 문명을 박차버린 야생녀다. 무공해 청정지역에서 자유를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 여신의 꿈"이라고 썼다. 소설가 김별아는 "그녀가 자기 입으로 예술입네, 어쩌네 하는 것은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사람을 사랑하며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열렬한 삶 속에서 '예술 그 자체'로 사는 모습은 무수히 보았다"고 적었다.

판화가 홍선웅은 "능소화가 필 때면 가끔 누님을 떠올리곤 한다"라며 "능소화와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누님의 성격이 능소화를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전 민주노총 위원장 이수호는 "시로 쓴 편지를 받을 때마다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며 "하루 봉합엽서 한 통밖에 쓸 수 없던 그 시절, 나는 보내준 숫자만큼 답장을 썼다"고 되짚었다. 


"누가, 그 물길을 막으려 하느냐"

이행자 시집 <11월> 이번 시집 제목이 된 11월은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이행자 시집 <11월>이번 시집 제목이 된 11월은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이종찬
달이 웃는다
갈비뼈가 두 대씩이나 부러져
땀띠 나는 여름을 보내면서도
나이 앞에서
겸손할 줄 모른다며
달이 웃는다
-16쪽, '달이 웃는다' 모두

시인 이행자 다섯 번째 시집은 크게 세 다발로 묶을 수 있다. 1부는 그리운 이나 달, 고드름, 앵두, 바람, 명품가방 등을 통해 그동안 살아온 마음밭에 비추는 거울이다. 2부는 그동안 다녔던 곳, 삼청동이나 백련사 동백숲길, 물왕저수지, 과천, 바다 등에게 보내는 사랑편지이다. 3부는 그동안 가까이 만났던 사람들, 문익환 목사나 박현채, 구중서, 박정호 등을 그리워하는 음표다.       

시인은 하늘에 휘영청 떠있는 달을 통해 스스로 아주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달이 어찌 사람처럼 웃을 수 있겠는가. 시인은 달을 바라보며 "나이 앞에서 / 겸손할 줄" 모르는 자신을 비웃고 있다. 달이 웃는다는 것은 곧 시인이 스스로 삶을 되짚어보며 스스로에게 비웃고 있다는 뜻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 곳곳에서 칠 십 해 동안 살아온 자신을 꼼꼼하게 되돌아보고 있다. "남한강 백조들처럼 / 흐르며 살고 싶은데 / 감히, / 누가, 그 물길을 막으려 하느냐"(감히 누가)에서는 4대강 사업을 꼬집으며, 스스로를 되짚는다. 시인이든 누구든지 그 무언가를 억지로 거스르면 결국 탈이 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살얼음 밑으로 꽃잎 피는 봄은 오겠지"

1987년 6월
1991년 5월
연대 앞 백양로에서
달리지 못해
물대포에 쓰러졌었지
-20쪽, '앵두에 대한 기억' 몇 토막

'앵두에 대한 기억'에서는 "삼청동 고향집 / 앵두나무에 대롱대롱 매어달려 / 앵두를 따먹던 내 모습과 / 바람개비 날리며 / 팔랑팔랑 잘도 뛰던 / 건강했던 내 두 다리가 생각난다"며 다리가 멀쩡했던 어린 날 행복했던 기억을 더듬는다. 이러한 기억을 퍼올리는 시들은 이 시집 곳곳에 우물물처럼 깊숙이 출렁이고 있다.

"2004년 2월 / '늘름한 바다'를 이곳에 묻고 나서는 / 아픈 다릴 핑계로 오지 않았다 / 지금 나는 / 온몸으로 통곡하며 / 먼저 떠난 늦봄과 그를 / 부러워하고 있다"(모란공원을 지나며)거나 "1984년 8월 17일 / 처음 찾았던 망월동 묘지 / 가슴께까지 치솟아 오르던 / 풀잎 칼들이 묻는다 / 부끄럽게 살고 있지 않느냐고"(오월만 오면) 등이 그러하다.

'물왕저수지에서'는 "철새들도 / 쉬어가지 못하는 / 꽝꽝 얼어붙은 물왕저수지"를 이 모진 세상에 비춘다. 철새(서민)들 발목을 묶어버린 이 지독한 세상에는 "생쥐에서 / 독사로 변한 자와 한 하늘을 이고 살"고 있다. 시인은 그래도 봄(희망)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울음 죽인 / 살얼음 밑으로 / 꽃잎 / 꽃잎 / 봄은 오겠지"라며.   

시인 이행자 다섯 번째 신작시집 <11월>에는 다리를 절뚝이는 이 세상에서 다리를 절뚝이는 시인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와 칠십 해를 살아온 시인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이 세상 곳곳에 보다 큰 사랑을 심기 위해 이 세상 사물에게 다가가 쓰다듬기도 하고, 시인이 칠십 해 동안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에서 불러내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다.    

"소녀가 고희를 맞이한다니 '모르겠다'"


나는 늘
이글거리는
땀방울 속에서만
너를 만날까
새하얀
연꽃송이인 너를
-55쪽, '전태일을 생각함' 몇 토막

소설가 전성태는 "선생은 사람 사귀는 데 까다롭다"며 "배운 사람은 입을 오래 보고, 이름 있는 사람은 어깨를 가만히 겨누고, 젊은 사람은 앉는 자리를 살피고 나서 취급해준다"고 썼다. 시인 강민은 "내 고희문집에 이행자 시인이 덕담을 써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녀가 칠순이란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녀는 세월을 좀먹는지 늙지를 않는다"고 적었다.

통일문제연구소 채원희는 "언니의 칠순은 이제부터 인생의 삶을 열매로 빚으시려는 뜨거운 예술적 작업을 새롭게 시작하는 첫 발걸음이라 여겨봄은 어떨까요?"라고 되물었고, 가가건축사무소 대표 안용대는 "이행자 시인은 참 부지런한 사람이다. 궂은일 마다않고 나서며, 많은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세심하게 챙긴다"고 되짚었다.

지성사 대표 이원중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그런데 고희를 맞이하는 선생님은 여전히 소녀고, 소녀가 고희를 맞이한다니 '모르겠다'"라고 엄살을 떨었고,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박래군은 "이제 누님이 걱정 사는 일은 하지 않고 살아야겠는데, 언제고 불쑥 전화해서 잘 먹고 다니냐고 물어 오실 것 같다. 이제 누님께 먼저 전화하는 동생이면 좋겠는데…"라고 썼다. 

시인 이행자는 1942년 서울에서 독립운동가 딸로 태어나 1990년 제3회 <전태일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들꽃 향기 같은 사람들> <그대, 핏줄 속 산불이 시로 빛날 때> <은빛 인연>이 있으며, 시화집 강민, 이행자 <꽃, 파도, 세월>, 산문집 <흐르는 물만 보면 빨래를 하고 싶은 여자> <시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아! 사람아>가 있다.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후원회 부회장,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 등을 맡았으며, 지금 한국문학평화포럼 고문을 맡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덧붙이는 글 [문학in]에도 보냅니다

11월 - 이행자 시집

이행자 지음,
화남출판사, 2011


#시인 이행자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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