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유성호
"좋은 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내용이 가치 있고 탄탄한 책, 다른 하나는 저자의 삶이 담겨 있는 책이지요. 저는 어렸을 때 소설가 황순원의 단편집을 보고 내용도 좋지만 그 속에서 살아 있는 저자의 삶을 만날 수 있는 책이 정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리영희 선생의 책이나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저작들을 보면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매년 한국에서는 약 4만2000종의 책이 출판된다. 어떤 책은 곧바로 폐지 신세가 되지만 어떤 책들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 사회적인 맥락과 가치관, 깊은 감동을 전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책들 중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의 애독서'에서는 활발한 사회 참여를 보여주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하나인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에게 평생의 독서 중 가장 큰 좋았던 책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교수는 저자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저작들을 골랐다. 그는 황순원의 두 번째 단편집 <기러기>와 언론인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앤서니 기든스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기후변화의 정치학>을 추천하고 이중 앤서니 기든스의 책들을 '책 나눔 캠페인'에 기부했다.
김 교수는 "대학에 들어와 사회학을 공부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 지금 가지고 있는 정치적 견해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책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라며 "이 행사를 통해 물질적인 나눔뿐 아니라 정신적인 나눔을 통해 우리 사회가 연대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자의 삶이 담긴 책이 정말 좋은 책"- 연구실에 책이 참 많습니다. 학자에게 우문일 수도 있겠지만 교수님에게 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2000년 즈음에 지난 천 년을 마감하며 여러 가지 선정이 이뤄졌습니다. 근데 서양 친구들은 대부분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인물로 구텐베르크를, 그 기간 동안 인류에게 있었던 가장 커다란 진보로 '책'을 꼽더군요. 아무래도 근대사회를 열었던 시민혁명, 산업혁명의 성공과 그 뒤를 이은 여러 사회 변동에 인쇄술의 발전으로 인한 책의 대중적인 보급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겠지요. 인류 역사에 책이 미친 영향을 돌이켜볼 때 21세기에도 책의 영향은 계속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사람이 두 번 태어난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는 육체의 탄생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정신의 탄생인데, 보통 정신의 탄생은 10대 후반 이십대 초반에 책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 같아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같이 전 지구적으로 즐겨 읽히는 고전적인 텍스트들 있잖아요. 그런 작품들이 표준적인 텍스트로서 한 개인의 정신적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대학에 들어와 사회학을 공부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 지금 가지고 있는 정치적 견해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책을 통해서 이뤄진 것들이지요."
- 교수님은 정신이 탄생될 무렵(?) 어떤 고전을 읽고 지대한 영향을 받았나요?"저는 10대 때 황순원 선생의 단편들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1950년에 출판된 황순원 선생의 두 번째 단편집 <기러기>입니다. <기러기>, <별>, <독짓는 늙은이>, <그늘> 등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이중 <별>과 <그늘>이 일제시대 때 쓰여진 작품들이지요."
- 어떤 점 때문에 그 단편집이 기억에 남았나요?"황순원 선생은 평안남도 대동군 태생으로 일본에서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일제 식민지 지배가 강화되자 고향으로 낙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별다른 직업도 없이 소설을 쓰지요. 당시에 일본에서 와세대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은 굉장한 엘리트라는 증명이거든요. 그런데 친일 문학의 회유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국어로 소설을 쓴 것입니다. 그때 쓴 것이 <별>과 <그늘> 같은 작품들인데 단편집 <기러기> 서문에 보면 소설을 써서 그냥 다락에 모아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발표를 기약할 수 없는 작품들을 계속 써내려간 셈이지요.
저는 서문의 그 대목을 읽으면서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이라고 해서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했는데 황순원의 행동은 말하자면 원고지 위에서 독립운동을 한 셈이지요. 그는 소설가로서 모국어를 지켜야 한다는 자기의 사명을 지켰고 살면서 일본어로 된 단 하나의 작품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당시로는 상당히 힘든 길이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것이 소설가를 포함한 지식인이 자기 사회나 자기 시대에 대해서 가져야 할 태도라고 느꼈습니다.
좋은 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내용이 가치 있고 탄탄한 책, 다른 하나는 저자의 삶이 담겨 있는 책이지요. 저는 소설가 황순원의 단편집을 보고 내용도 좋지만 그 속에서 살아 있는 저자의 삶을 만날 수 있는 책이 정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측면에서 황순원 선생과 비슷한 느낌을 준 것이 리영희 선생입니다.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들은 내용도 좋지만 냉전 분단 체제 하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몇 번이나 구속되고 수감되었는지 같은 느낌들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 황순원 선생에게서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 일찌감치 배운 셈이군요. '책 나눔 캠페인' 독자들에게 추천할 책도 앞서 설명한 두 책처럼 저자의 삶을 만날 수 있는 책인가요?"네. 제가 오늘 추천할 책은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저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기후변화의 정치학>입니다. 제가 79학번인데 기든스는 사회이론을 공부할 때 알게 된 사회학자입니다. 1970년대에는 사회학자로서 저작활동을 주로 했고, 1990년대 초반까지는 사회이론가로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래로 정치 이론가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켰지요.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기존의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담은 책입니다.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은 영국 노동당 당원인 기든스가 고든 브라운 수상 취임에 맞춰 그전까지 노동당이 집권했던 10년을 평가하고 영국이 앞으로 나아갈 길 제시하고 있는 책이지요. <기후변화의 정치학>은 현대 기후변화의 위기와 정치의 관계를 다룬 책으로 기든스는 이 책에서 정치를 통한 기후변화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든스의 행적을 보면 지식인의 역할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든스는 사회학 방법론과 사회 이론에 대한 연구, 서구 모더니티에 대한 거시적이고 충분한 연구를 거친 후에 이 책들을 씁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 '(대의)민주주의의 민주화', 일자리 창출을 기본으로 삼는 '적극적 복지', 새로운 평등주의의 구축 등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지요. 사회민주주의를 개혁하려는 대안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동당 당원, 사회민주주의자로서 기든스의 삶과 바람도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이론가가 포괄적이고 정치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인데, 이게 저한테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특히 지식인의 현실개입이 요청되는 사회에서는 나름대로 상당한 의미를 안겨주는 저작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추천해주신 책 세 권에는 기든스의 삶이 담겨 있는 셈이군요. 특히 지식인의 현실개입이 요청되는 사회에서 의미가 큰 저작들이라고 설명했는데,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는 어떤 역할들이 요구되나요?"저는 공부를 마치고 서른두 살이 되던 1992년부터 사회학과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시민운동이 부상하던 시기였고, 시민사회론을 전공한 저로서는 이중과제를 가지고 있었지요. 한국적인 시민사회론을 연구하고 구상해야 한다는 학문적 과제와 동시에 우리 사회의 진보적 시민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과제를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은 다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본인이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연구와 사회참여 둘 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조국 교수가 적극적으로 선거에 관여한 것도 그런 측면입니다. 그 일로 조국 교수가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는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2011년 9월과 10월, 2개월 동안은 정치적 실천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으니까요. 이런 것이 진보적 지식인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든스에게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음에도 수많은 저작들 중에서 기든스의 저작들을 고른 이유 역시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