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익 <신들의 전쟁>그는 이 책에서 티타노마키아에서 트로이 전쟁까지, 아르고 호 모험에서 오디세우스 모험까지,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전쟁 그 속내를 뿌리까지 샅샅이 파헤친다.
알렙
"이 세상은 온갖 이야기로 넘쳐난다. 이야기의 홍수를 이루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사실 몇 가지 이야기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본류에서 갈라져 나온 지류에 불과하다. 이야기의 본류는 바로 신화다. 신화는 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다. 그런데 신화의 핵심은 바로 영웅 이야기다. 그래서 신화 속 영웅 이야기는 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원형의 원형이다." - '들어가는 말' 몇 토막 요즘 KBS TV 강연에도 소개된 '제우스의 12가지 리더십 강의'를 비롯해 신화 그 씨앗을 한 가마니씩 줍고 있는 신화연구가 김원익(51)이 펴낸 <신들의 전쟁>(알렙). 그는 이 책에서 티타노마키아에서 트로이 전쟁까지, 아르고 호 모험에서 오디세우스 모험까지,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전쟁 그 속내를 뿌리까지 샅샅이 파헤친다.
이 책은 모두 10장에 12꼭지가 그리스 신화 속에서 신들이 벌이는 전쟁, 그 심장을 쏜다. 제1장 '신들의 전쟁', 제2장 '아르고 호의 모험', 제3장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 제4장 '페르세우스의 모험', 제5장 '헤라클레스의 모험', 제6장 '테세우스의 모험', 제7장 '테베 전쟁', 제8장 '트로이 전쟁', 제9장 '오디세우스의 모험', 제10장 '아이네이아스의 모험'이 그것.
2일(금) 홍대 가까이 있는 한 막걸리 집에서 만난 김원익은 "우선 10가지 전쟁 및 영웅담을 모아 영웅들의 스토리 유형을 분석하면서 동시에 스토리텔링을 재구성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는 "익히 알려진 정설뿐만 아니라 많은 이설들도 담아냈다"라며 "이 전쟁과 영웅담의 핵심 모티프는 '황금'이며, 황금은 권력의 상징이자 저주의 씨앗"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황금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 전쟁과 모험의 본질이다. 전쟁과 모험은 크게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전쟁의 신이 둘이 있다"라며 "정의의 신은 아테나이며 불의의 신은 아레스이다. 정의로운 자는 전략과 전술을 쓰며, 불의한 자는 속임수와 비열한 술수를 쓴다"고 못 박았다. 남북문제와 정치문제로 시끄러운 우리 사회를 은근슬쩍 비꼬는 투로 말이다.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다""이아손의 아르고 호의 모험은 황금 양피를 찾아 나선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황금 양피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대상을 상징한다. 이런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1429년 유럽에서는 '황금 양피 기사단'과 '황금 양피 훈장'이 창설되기도 했다. 하지만 황금 양피를 부당한 방법으로 소유한 사람은 불행의 늪에 빠진다. 그래서 황금 양피는 그리스판 '니벨룽의 반지'이다. 황금 양피에도 니벨룽의 반지처럼 저주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 64쪽 '제2장 아르고 호의 모험' 몇 토막우리나라 신화든 지구촌 곳곳에 있는 신화든, 신화는 대부분 태초에 지구촌이 만들어진 뒤 신(영웅)들이 벌이는 전쟁으로 문을 연다. 그렇다고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모두 환상 속 이야기라는 것이 아니다. 신화에는 역사에서 있었던 그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 비밀은 곧 다른 민족이 토착민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두 민족이 모시던 신들이 서열 다툼을 하면서 벌이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김원익. 그는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영웅들 이야기를 세 가지 매듭으로 묶는다. 첫째, 영웅 이야기는 결국 전쟁 이야기라는 것이다. 둘째, 영웅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련의 미학'(시련을 통한 정신적 성숙)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는 점이다. 셋째, 영웅이 겪는 어린 날부터 전성기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짜여진 구조는 스토리텔링(단어, 이미지, 소리를 통해 사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의 모델이라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야말로 '간 큰'(?) 영웅들이 벌이는 전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다른 민족인 남신들이 토착민인 여신들을 누르는 전쟁이다. 다른 하나는 이방인인 남신들이 토착민인 남신들을 누르는 전쟁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전쟁'은 이 두 가지를 주춧돌로 삼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신들의 전쟁' 가운데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라노스를 억누른 크로노스와 크로노스 등 티탄 12신을 이긴 올림포스 12신은 모두 이방인 남신들이 토착민인 남신들을 이긴 전쟁이다. 우라노스는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는 가이아를 누르고 '신들의 왕'이 된 뒤 어머니를 슬며시 아내로 바꾸어 버린다. 이 이야기는 토착민인 여신을 이긴 전쟁이다.
'신'(영웅)들이 벌인 전쟁은 지금 우리가 처한 '양극화 전쟁'과 같다"2010년도에 방영된 '타이탄'이란 영화 제목은 관객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이 영화가 페르세우스의 모험을 소재로 한 것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서 타이탄 즉 티탄 신족과 올림포스 신족과의 싸움을 기대할 것이다. 또 그 사실을 아는 관객이라도 이렇게 자문할 수 있다. 페르세우스의 모험이 티탄 신족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 하지만 '타이탄'에서 티탄 신족과 올림포스 신족의 싸움은 전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고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 144쪽 '제4장 페르세우스의 모험' 몇 토막'신들의 전쟁' 뒤 그리스 신화는 신과 같은 위치에 있거나 신이 되고자 하는 '영웅들의 모험담'으로 이어진다. 아르고 호 54영웅들 모험부터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테세우스 등 세 영웅들 모험이 그 이야기다. <신들의 전쟁> 마지막에서는 '영웅들의 모험'을 지나 도시와 국가를 세운 사람들 전쟁이다.
사람들이 벌이는 이 전쟁 또한 신화와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 트로이 전쟁은 "황금 사과" 주인을 가리는 파리스 심판으로 시작된다. 이는 곧 '전쟁의 불씨'이자 '신화의 모티프'로 이어져 있긴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따져보면 아테네가 트로이를 정복하기 위해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구실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김원익은 "그리스 신화를 천천히 훑어보면 인간들의 삶에나, 신과 동격인 영웅들의 삶에나, 혹은 신의 삶에나 모두 마찬가지로 온갖 속임수와 비열함이 넘친다"라며 "신화에서는 괴물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는 공격, 살육, 파괴, 폭력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그 괴물과 불의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을 행하는 자가 신화의 영웅들이며, 그 영웅들의 전쟁은 정의의 전쟁의 신인 아테나가 후원자 역할을 한다"고 되짚었다.
신화연구가 김원익이 펴낸 <신들의 전쟁>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선과 악으로 나뉘는 두 '신'(영웅)들이 벌이는 전쟁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양극화 전쟁'에 빗댄다. 예나 지금이나 '황금'(물질자본주의)을 사이에 놓고 사람들이 벌이는 전쟁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전쟁'을 되짚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가 어떤 하수구로 흘러가는지 알아야 그 탈출구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신들도 사람처럼 사랑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했다"그리스 신화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주인공인 영웅 이야기는 모두 비슷하다. 얼굴이나 모험의 무대나 방식이 다를 뿐이다. 영웅들은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누구도 그들이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 그들은 어떤 괴물과 악당을 만나거나 어려움에 처해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죽음을 불사하고 그들과 맞서 싸워 이긴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대리만족을 느낀다. 통쾌하고 시원하다.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 480~481쪽, '나오는 말' 몇 토막신에 빗대는 영웅. 그 영웅들은 그 어떤 어려움도 거침없이 걷어내며 완전한 삶을 산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은 정말 흠잡을 데 하나 없는 그런 신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일까. 김원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는 "그들도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욕망을 갖고 있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했다"고 못 박았다.
영웅들은 물론 우리와는 그 어떤 잣대로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모험심과 추진력, 인내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도 사람처럼 희노애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김원익은 "그들이 우리에게 더욱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사람과 같은 성격적 결함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그렇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두 '전쟁의 신', 아레스(악)와 아테나(선)가 벌이는 전쟁처럼 모든 것이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지금,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제대로 서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황금'으로 상징되는 '욕망'이다. 남북관계가 어긋나고 있는 것도, 마구 밀어붙인 4대강이 무너지는 것도 모두 욕망 때문이다. 신들조차 무너뜨린 그 '욕망'이란 괴물을 이제 슬며시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신화연구가 김원익은 문학박사로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했지만 신화란 그 매력에 포옥 빠져 지금까지 10년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는 "신화는 인간의 행동과 심리의 원형으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라고 여기며, 여러 대학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 '그리스 로마 문화의 이해', '신화 구조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헤시오도스 <신통기>,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 <아르고 호의 모험>이 있으며, 새롭게 풀어 옮긴 책으로는 호메로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오비디우스 <사랑의 기술>이 있다. 펴낸 책은 <신화, 세상에 답하다>, <신화, 인간을 말하다>가 있고, 함게 펴낸 책으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문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