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신부, 문정현', 그가 스쿠터를 타고 제주도 강정마을 중덕해안에 나타났다. 그는 7월자로 강정마을 주민이 되었다.
이주빈
부산구치소 7上1방, 6022번.당분간 내 이름이자, 정체성이다.
새로운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평생을 호적에 오른 이름에 갇혀 살아야 하는 이 고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다른 무엇으로 호명되어 보는 것 자체가 신선한 일일 수 있다. 이왕이면 나는 사는 동안 더 많은 새로운 이름으로, 존재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아마도 그것이 이름 하나에 온갖 명예와 권력과 부를 소유케 하는 일보다 훨씬 즐겁고, 경쾌하고,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게 갇혔다고 하지만, 나는 갇히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이름과 조건과 상황으로 나아왔고, 이 새로운 상태가 무척이나 편안하고 흡족하다. 이 짧은, 다른 존재로의 여행 기간을 어떻게 잘 보낼지, 말하자면 이 기간과 어떻게 연애를 잘할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0.68평짜리 독방이라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에 전혀 좁지 않고, 혼자 있어도 수없이 많은 말과 얼굴, 질문이 끊임없이 솟기에 심심하지도 않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우린 만날 수 없는 걸까요각설하고 언제든지 이런 넉넉한 시간이 오면 맨 먼저 만나고 싶었던 연애 대상이 있었다. 무슨 지명방어전도 아니지만 그래야 한다고 '꼭' 생각했던 이가 있다. 아름다운 나의 '신부'다. 나 혼자만의 신부가 될 수 없는 '만인의 신부'다. 어떤 숲속의 정령들보다 맑고 밝은 청정한 영혼의 신부다. 늙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젊은 신부다. 이번에 알고 보니 삐지기도 잘하고, 불뚝불뚝 사소한 걸로 화도 잘 내는, 가끔은 가출도 결행할 줄 아는 철부지 신부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 철부지 신부님을 정상적인 공간에서 만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그는 늘 어딘가에 올라가 있거나, 주저앉아 있었다. 어떤 땐 소파(SOFA, 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을 외치며 미대사관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선 쓰레기차 위였고, 미선이 효순이를 부르던 광화문의 탑차 위였고, 평택 대추초등학교 지붕 위였고, 용산4가 남일당 골목 옆 용역깡패들에게서 빼앗은 트럭 위였다. 얼마 전에는 한진중공업 담장 위였고, 제주 강정마을 펜스 앞에서 사람들을 연행해가는 경찰 차량 위에 올랐다. 와르르 끌려내려 오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30년 가까이 짚고 다니시는 지팡이도 1975년 4월 9일 사형선고 하루 만에 사형을 집행 당한 인혁당 관련 사형수들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장의차를 묶어가려는 크레인 위에 올랐다가 떨어져 다치면서 짚게 되었다.
그런 신부님의 자전적 이야기가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저자이자, 인천 만석동 9번지 빈민촌에서 <기찻길옆 공부방> 일을 20여 년 넘게 해오는 김중미 선생의 글을 통해 한겨레에 연재되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지역을 오가느라 신문을 접하기 힘든 때여서 미처 따라 읽지 못했다.
물론 대추리 이전부터 신부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모든 게 피상적이었다. 부안 핵폐기장 반대 싸움에도, 새만금간척을 반대하는 3보1배의 동영상 속에서도, 이라크파병반대 집회에서도 그를 볼 수 있었지만, 실제 그 모든 곳에 서 있는, 서 있을 수 있는 신부님의 삶의 내력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책이 묶여 나왔다. <다시 길을 떠나다-길 위의 신부 문정현>이다.
사실 이 책을 사진작가 노순택이 불쑥 들고 왔을 때, 나는 그가 책을 들고 온 게 아니라, 어떤 태산 같은 말씀을 들고 왔다고 느꼈다. "야, 이눔아 까불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라는 무서운 다그침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근 몇 년, 지척에서 신부님을 뵈면서도 나는 늘 신부님을 피해 왔다. 경외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들 중 그 누구보다도 소년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나보다 더 어린 인권활동가들과도 진짜 친구처럼 경계 없이 만나는, 정말 거의 드문 어른이라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건만, 난 늘 근거리보다는 원거리를 택했다. 무엇보다 더 가까이 갔다간, 타협을 모르는 신부님의 불호령과 지팡이에 호되게 맞을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잡놈으로 살아가는 나의 임기응변과 불순함과 불철저함, 천박함 등이 명경처럼 투명한 그 분의 삶과 예지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 두려웠으리라.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순택처럼, 미영처럼, 윤엽처럼, 약골처럼, 군처럼, 진처럼, A처럼, 또 누구처럼 신부님께 살갑게 대하지 못해도 가슴 한편엔 나이와 세월을 넘어 내게도 신부님은 큰 어른이면서도 고향 뒷동산처럼 편한 어떤 곳이 되어 있다.
그렇다. 고백하자면 내게 신부님은 어느 순간부터 한 인격체를 넘어 어떤 한 큰 사물처럼 다가온다. 아무 때나 올라가 뒹굴고 놀다 볕 좋으면 한숨 푹 자고 내려와도 좋을 뒷동산, 배고픈 날 저 밤하늘에 떠오른 만월, 큰 바위산, 하나의 얼굴이 아닌 수많은 군중의 얼굴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80년대 초반 장수군 내의 장계성당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함께 한, 분노한 농군들의 집단적인 얼굴로 나타나기도 하고, 80년대 중후반 전주교구 내 세 군데 노동자의 집 책임신부로 있으면서 함께 했던, 이제 막 깨어나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새만금, 부안, 대추리, 용산, 기륭, 한진, 강정에서처럼 세계화의 논리, 자본의 논리, 개발과 폭력과 경쟁의 논리에 의해 쫓겨나야 했던 수많은 이들의 뒷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중미 선생이 우스개처럼 말했지만 정말 이 야만의 지구화 시대, 쓰레기인생들처럼 버려진 거리의 노숙인들의 쓸쓸한 얼굴들로도 그는 나타난다.
나는 왜 용산에 오라고 신부에게 간청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