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 사망 후인 1994년 7월 15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김일성 사망이후 북한 핵문제 해결방안과 남북정상회담 재개 전망 등에 관해 통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렇게 분위기가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 가운데 1994년 7월 11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고·질의·답변이 있었다.
이홍구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김용준 대남담당비서가 정상회담의 연기를 통보해왔다고 보고했다. 나는 이 보고를 듣고 "김정일 체제가 되더라도 정상회담을 계속하겠다는 화해의 신호"로 해석했으며 정부에 조문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했다.
나는 조문에 4가지의 전제조건을 달았다. 첫째 북한체제와 대화를 해야 한다면, 둘째 김정일 후계체제의 안정이 대화와 협상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을 정부가 갖고 있다면, 셋째 정상회담이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넷째 우리 국민의 양해가 성립된다면 등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이라면 정부가 조문할지 물은 것이었다.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런 발언이었다.
그 정도의 발언에도 남북관계 추이에 불만을 가졌던 강경보수 인사들은 과잉 반응을 보였다. 여당인 민자당은 "수백만 명을 죽인 전범인 김일성은 실정법상 여전히 반국가 단체의 수괴이므로 조문이란 말도 안된다"고 반발했고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나를 비난했다. 나는 정부의 정책을 질의했는데 여당과 보수언론은 도덕을 내세웠다. 지난 며칠 전까지도 정상회담을 당연시하던 태도는 어디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1994년 조문 논쟁은 교훈을 얻어야 할 역사
그 이후 17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두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1994년 조문파동' 논란이 우려되는 것이 현실이다. 다음은 인제대 통일학부 김연철 교수가 2010년 11월 <한겨레21>에 기고한 글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1994년 조문 논쟁은 교훈을 얻어야 할 역사다. 1994년 조문 논쟁은 남북관계 악화를 가져왔다. 실패한 정책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도덕의 늪에 빠져 외교를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조문 논쟁으로 '우리 안의 냉전'이 부활했다. 좌파 내부의 논쟁도 있었고, 냉전 반공주의의 광기를 폭발시켰으며, 공론의 후진성을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중략) 냉전 세력은 당시의 정세 변화에 당황했고 불안해했다. 불만도 많았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용기 있는 방북으로 전쟁 직전까지 갔던 한반도 정세가 정상회담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정세는 다시 불투명해졌다. (중략) 김영삼 정부는 신공안정국을 조성하며 조문 논쟁에 개입했다. 이영덕 총리는 7월18일 국무회의에서 김일성을 '동족상잔의 전쟁을 비롯한 불행한 사건들의 책임자'로 규정하며 사회 일각의 조문 움직임에 '유감'을 표명했다. 정부의 기본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북한의 비난과 남북관계 악화의 근거로 작용했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 정치를 조문외교보다 중시했다. 조문외교는 '필요하면 적에게도 미소를 보낼 수 있는 외교적 행위'다. 남북한은 전쟁을 경험했기에 다른 나라와 다를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장제스가 1975년 대만에서 사망했을 때, 중국은 조의를 표명했다. 마찬가지로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도 대만은 조의를 표명했다. 국공내전을 치른 당사자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올 때, 누군가는 시대의 1막이 끝났음을 알려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야 다음 무대의 막이 올라가지 않겠는가." 당시 나는 조문외교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1989년 일본 왕인 히로히토가 죽었을 때 강영훈 국무총리가 조문사절로 간 것을 예로 들었다. 아무도 당시 일왕에 대한 조문이 일제 36년의 압제와 수탈을 망각한 채 이루어졌다고 비판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의 대응은 미국과 비교해도 말이 안되는 태도였다. 다음은 다시 김연철 교수의 글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김일성 사망 직후 '미국 국민을 대신해 북한 주민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전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당시 제네바에서 북한과 핵 협상을 벌이던 갈루치 차관보가 제네바 현지 북한 대사관으로 가서 조문했다. 절제된 내용과 형식이지만, 협상 상대에게 예의를 표시했다. (중략) 미국이 조의를 표명하자, 김영삼 정부는 당황했다. 민자당은 아예 '클린턴에게도 문제가 있다'(이세기 정책위의장)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들이 종교처럼 숭배하는 한-미 동맹도 냉전 반공주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한국의 보수가 미국에 할 말을 할 때가 바로 이럴 때다. 미국이 탈냉전을 지향할 때 말이다. (중략) 김영삼 정부는 국내의 조문 논쟁을 관리하지 못했다. 오히려 냉전 반공주의에 정치적으로 편승했다. 정상회담을 할 뻔한 남북관계는 이후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 변변한 회담 한 번 못하고, 그렇게 김영삼 정부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