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합격' 현수막을 바라보며...

<영월에서살기> 비교하지 말자, 한줄 세우기 이제 그만

등록 2011.12.25 12:06수정 2011.12.2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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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합격 현수막이 보여주는 학벌 위주의 슬픈 현실

합격 현수막이 보여주는 학벌 위주의 슬픈 현실 ⓒ 김광선

'누구네 집 아들이 어느 대학을 갔다'라는 사실을 옆집 해현이 엄마한테 들은 게 아니다. 그냥 스스로 알게 되었다. 피아노 학원을 가는 길, 영월로타리 네거리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는 현수막에서 봤다. "축 어느 고등학교 누구누구 서울대 합격"이라고 써 있었고 그 아래에는 '어디에 근무하는 누구의 자제'라고 한 줄 더 있었다.

서울대 축하, 왜?

의문이었다. 서울대 들어간 게 축하할 일이며, 누구의 아들인지가 중요한 사실이며, 아무 상관없는 내가 알아야 할 일인가? 이걸 보고 난 얼굴을 찌푸렸지만, 같은 고3학생이 봤다면 서울대 못 간 자신이 초라해 보였거나 심리적으로 위축됐을 거고, 글씨를 아는 초등학생 정도면 '아, 나도 서울대를 가고 싶다. 이런 게 자랑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식을 둔 부모들이 봤으면 '효자구나. 아버지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높였어'라고 뿌듯해 했을 거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음, 내 후배야'하며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을 거다. 등록금을 못 내 학기마다 아르바이트 하느라 고생인 요즘 대학생들은 '고액과외 많이 들어와서 좋겠다. 저 정도면 나도 편하게 공부했을 텐테...'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 거다.

99%가 슬픈 현수막 현상

제발 대학 합격 현수막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기 싫다. 횡단보도 지나갈 때마다 눈을 감고 갈 수도 없고 매일 욕을 하면서 다닐 수도 없는 일이다. 그 학생을 찾아서 설득이라도 해야 할까? 서울대 간 게 자랑이 아니라고 아버지께 전화라도 걸어야 할까?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본 내 나이(37) 정도면 다 아는 상식이다. 명문대 진학,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좋은 대학 나와서 자신을 달달 볶으면서 사는 사람들 많이 봤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엄마, 아빠가 아닌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내가 뭘 하면 기쁜지를 모른 채 자라나 성인이 되어 방황하며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투명가방끈들의 모임'을 지지하는 이유

지난해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씨는 대학을 기업의 부품생산 하청업체에 비유했다. 대학은 '학벌을 얻고, 스펙을 쌓는 곳일 뿐, 인간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 이웃에 대한 애정도 길러주지 못하는 곳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이번 해 서울대를 자퇴한 유윤종씨는 '중. 고등학교 교실의 병폐와 인권 억압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대학입시 제도를 거부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대학거부 선언을 한 '투명가방끈들의 모임'은 "명문대라는 한길을 강요하는 교육, 대학으로 인간 가치가 결정되는 학벌 사회의 폭력을 거부하겠다"며 경쟁과 줄 세우기 교육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 모두를 지지한다.

내 남편도 11년 전, 대학교 한 학기를 앞두고 자퇴한 사람이다. 필요할지도 모르니, 한 학기만 더 다녀 졸업장을 다시 따라는 결혼 초 나의 요구를 무시했다. "대학 나오는 게 뭐가 중요해?"하면서 나를 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결혼신고서에 남편 학력을 나는 대학 중퇴라고 적었는데, 남편은 고졸이라고 다시 썼다.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들 남편은 적어도 학사에 대체로 석사, 그리고 박사들도 많은데, 남편은 이력사항에 꼭 '고졸'을 고집한다. 그런데 살면서 그 졸업장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았다. 졸업장보다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 인간에 대한 이해와 남과 잘 지내는 법, 아이를 내 스스로 키우고 가치를 가르칠 수 있는 능력, 나를 비우고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성, 뭐든지 배우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 이런 게 훨씬 중요했다.

비교하지 말자. 한 줄 세우기 이제 그만

거부하자. 현수막부터 집어 치우자. 한줄 세워서 행복한 사람들은 명문대 나와 자랑하고 잘난 척하면서 사는 일부다. 그들을 위해 살아주지 말자. 존중할 가치가 없으면 과감히 버리자.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의무"가 있다는 <시민 불복종>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살자.
#대학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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