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만의 흑룡의 해? 또 낚였습니다

'흑룡의 해' 운운하며 소비 심리 자극하는 기업들... 별로네

등록 2011.12.28 10:54수정 2011.12.28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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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좁고 긴 여러 개의 방에서 똑같은 환자복의 산모들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다발적으로 어기적거리는 모습이 다소 어색해 보였다. 2003년 1월 14일, 3kg 딸을 출산하고, 2주 동안 조리원에서 지냈을 당시의 일이다.

지치고 느린 걸음으로 식당과 착유실, 화장실만을 오가는 산모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에 피부 마사지사나 한의사가 들락거렸다. 그들은 앉았다 일어나는 것이 편하지 않은 산모들에게 체조를 시키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경험한 산모들은 조금씩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며 유대감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누군가 아기들의 띠에 대해 운운했다. "흑말띠"라고 했다. 며칠 사이를 두고 출산한 산모들의 아기는 모두 같은 나이, 같은 띠가 되기에 모두들 관심을 보였다. 누군가 그랬다. "백말띠가 아니라 흑말띠라 괜찮다"고.

살면서 자신의 띠에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얼마나 있을지 몰라도, 내게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2003년은 양띠의 해였다. 하지만, 띠는 음력으로 따지기 때문에 내 딸은 흑말띠에 속했다. 사실 그런 계산 방식도 그때 알았고, 왜 흑말띠가 백말띠보다 좋은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래도 '백말띠'보다 좋다던 흑말띠의 해에 태어난 딸은 이제 꽉 찬 9살을 넘길 참이다.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양띠라서 자기도 양띠라 우기는 딸은 "나는 양띠인데 왜 양 소리를 못 내?"라고 묻기도 한다.

은괴에 와인까지... 흑룡만 붙이면 모두 새해맞이 상품?

어느 업체에서 판매한다는 흑룡 은괴 ⓒ 인터넷 쇼핑몰 갈무리


이제 며칠 뒤면 토끼의 해가 지나가고 용의 해가 될 것이다. 업체들은 진작부터 '60년 만에 한 번 돌아오는 흑룡의 해'라며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백말띠가 아니라 흑말띠라 괜찮다'는 것처럼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 황금 돼지해와 2010년 백 호랑이해를 맞을 때와 똑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새해맞이 판매 전략을 내세우는 업체들의 상술은 올해에도 여전하다.

한 오픈 마켓은 '순도 99% 흑룡 은괴'를 단독으로 판다며 열을 올리고 있고, 어떤 업체는 허영만 화백이 그린 '용그림 띠 와인'을 선보였다고 한다. 호랑이와 토끼에 이은 용그림 띠 와인은 띠 와인의 세 번째 시리즈란다. 이 와인은 출시 2주일 만에 7000병이 판매될 정도로 흑룡의 해 덕을 보고 있다.


60년 만의 '흑룡의 해'로 덕을 보는 업체는 한둘이 아니다. 겨울이면 비수기를 맞는 웨딩 업체도 '흑룡의 해 특수'로 인해 2월과 3월 예약률이 높아지면서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길일과 골든타임은 벌써 예약이 마무리된 상태란다.

웨딩 업체뿐만 아니라 출산 용품 업체도 공격적인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출산 용품 업체들은 용기와 비상, 희망을 상징한다는 흑룡의 해에 아기를 출산하려는 예비 엄마들의 심리를 노리고 있다. 업체들은 출산 예정 부부들을 위해 출산 용품 관련 매장을 신설하고, 예비엄마들을 초청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흑룡의 해'는 어떻게 돌아오는 것일까. 궁금했다. 알아보니 매년 육십갑자가 돌아가며 상징하는 색과 동물이 달라진단다. 솔직히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육십갑자를 이루는 10천간은 다섯 가지의 색으로 이뤄지는데, 이것이 띠를 칭하는 12지지와 결합해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2012년은 임진년으로, 검은색을 뜻하는 '임(壬)'과 용을 의미하는 '진(辰)'이 합쳐져 '60년 만에 오는 흑룡의 해'로 불리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니 2013년은 '계사년', 검은 뱀의 해가 되고 그다음 해인 2014년은 '갑오년', 파란 말의 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복해서 결합하는 복잡한 60갑자 덕분에 하얀 호랑이해, 황금돼지(사실은 붉은 돼지)의 해가 탄생하는 것이다. 업체들은 해마다 달라지는 색에 의미를 부여해 '좀 더 눈에 띄는 마케팅 상술'에 열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띠 앞에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가며 매출을 올리려는 업체들의 상술 덕분에 사람들은 '아! 뭔가 길한 기운이 가득한 새해가 다가오고 있구나!'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그 믿음은 이내 소비행위로 연결되곤 한다.

특별 상품 판매하며 소비 부추기는 기업들

경남 함안 방어산 새해 일출. 2011년 1월 1일의 모습. ⓒ 윤성효


한편, 하얀 호랑이의 해나 황금돼지의 해처럼 '뭔가 좋아보이는 해'에 출산율이 높아지기도 한다. 이것은 '내년을 띄우는' 분위기에 휩쓸리는 사람들의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해에 생기는 베이비붐은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는 부모의 특별한 계획일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출산율이 높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만큼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하니까.

'좋은 해'에 우루루 태어난 아이들은 유치원부터 시작해 대입은 물론 취업과 결혼 등 모든 경쟁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입시 교육 위주의 환경에서 경쟁률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백번 양보해서 '흑룡의 해'에 태어난 아이가 신성한 기운을 타고 태어난다고 치자. 하지만 출산을 무턱대고 장려하기에는 우리 주변의 환경은 그닥 좋지 않은 듯하다.

희망의 상징이라는 흑룡의 해, 2012년. 나는 2012년을 앞두고 피부로 느끼는 변화가 있다. 날로 치솟는 물가와 사교육비가 바로 그것. 최근에는 난방비가 올랐고, 연초에는 상하수도 요금이 오른단다. 그저 오르지 않는 것은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의 숫자뿐일지도.

서민 경제를 위한 희소식이 필요한 때, 기업들은 '흑룡의 해'라는 대목을 맞아 특별 상품을 판매하며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왔던 그 해의 특별한 의미, 색깔 등은 대목을 맞은 업체들에만 특별한 의미와 색깔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모든 년도에는 모두 고유한 색깔이 있다. 흑룡이든 백마든 각자 희망찬 한해를 계획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 바르게 키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분수와 계획에 맞는 경제 활동을 하면 되는 것이다. 굳이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

어떤 색에 어떤 띠를 가진 해건간에 2012년은 서민이 살기 편한 해가 되길 바랄 뿐이다.
#흑룡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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