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둣날 앞에서 울어버린 그녀, 지금은 어디에

[개인사로 보는 사회사 - 잊을 수 없는 얼굴들①] 벽화처럼 새겨진 20년 전 그녀의 눈물빛

등록 2011.12.28 17:13수정 2011.12.2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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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입동의식(무당맞이) ⓒ 이만유

무당입동의식(무당맞이) ⓒ 이만유

얼음이 얼었다. 두껍게도 얼었다. 얼음이 자신의 강도에 못 이겨 스스로 쩡, 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날이면 문득문득 시퍼런 작둣날이 생각난다.

 

신었던 하얀 버선을 벗고, 아이처럼 아담하게 작은 두 발을 동동거리며 춤을 추다가 사뿐, 사뿐, 작둣날 위로 금방 올라갈 듯이, 올라갈 듯이 몇 번이나 애를 태우다가 그만 포기하고 울어버렸던, 얼굴 전체가 거대한 강이 되고 하늘이 되어버렸던 한 여인의 실루엣을, 세월이 오래 흘러버린 지금도 나는 겨울밤이면 가끔 생생하게 떠올리곤 한다.

 

그때가 그러니까 삼 년여를 끌어왔던 자살에의 열망을 내려놓고 '소설이라도 쓰며 살아보자'는 생각을 했던 무렵이었다. 이제 막 소설 공부를 시작했던 그 시기의 어느 하루 수인선 협궤열차에 몸을 싣고 경기도 안산을 갔다. 중견 소리를 듣던 시인이며 소설가인 한 사람의 초대 아닌 초대가 있었다.

 

관심이 있으면 오고, 관심이 없으면 올 필요 없다는 그런 식의 초대는 뭐랄까, 애매라기보다는 차라리 호기심을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호기심이 내 안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마치 수혈이라도 받듯이 들어오는 그런 형용모순의 상태, 그러니 그런 초대는 반드시 오라는 말보다도 더 '반드시' 가야만 하는, 가지 않으면 뭔가 손해가 막심할 것 같은 조바심조차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만났다. 합리적인 문법을 쓰자면 만났다기보다 보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의 상황은 합리라는 단어가 들어설 틈이 거의 없었다. 이른바 신이라고 하는 것, 혹은 신기, 신내림,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스물한 살 육촌 형의 '영혼 결혼식'

 

생일이 빨라서 형이 되는, 육촌 형이 스물한 살 나이에 트럭 전복사고로 죽었다. 방위병 시절이었다. 꽃이 피었다가 지는 늦은 봄날이었다. 늦은 봄날에 방위병 다섯 명이 트럭으로 모래를 운반하는 사역에 동원되었다. 선운사 인근 강가에서 하루 종일 모래를 퍼서 트럭에 싣는 작업을 끝내고 이제 퇴근하는 시간, 그러니까 삽을 트럭에 싣고 부대로 돌아가던 중에 아가씨들을 발견했다.

 

그때가 모내기철이었는데 여섯 시가 넘었어도 아가씨들이 돌아갈 줄 모르고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피 끓는 청춘 방위병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냥 갈 수 없어서 방앗간의 참새들마냥 휘파람을 불어대며 영자야 순자야 어쩌고 난리굿을 쳤다던가 어쨌더다던가. 뒤에 짐칸에서 그 난리굿을 쳐대니까 운전석에 앉은 운전기사 방위병도 따라서 흥이 돋고 피가 끓었을 것이다. 트럭은 어느 순간 미치광이처럼 갈짓자로 휘청거리다가 그만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냇물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크게 다쳤고, 한 사람이 죽었다.

 

방위병도 군인이냐. 그것도 여섯 시가 넘어서 이미 퇴근할 시간의 방위병, 그것도 군인이냐 아니냐를 놓고 군 당국과 가족 간에 지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육 개월 여에 걸친 '투쟁' 끝에 육촌 형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뒤로 십일 년, 당숙모께서 죽은 아들 결혼을 시켜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죽은 아들이 밤마다 나타나서 장가보내달라고, 나는 왜 장가도 안 보내고 이런 데로 보내버렸냐고 아우성을 친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형이면서 친구였던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데 안 가볼 수 없었다. 죽은 사람 결혼이 뭐 대수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봐야 한다는 어떤 애달픔 같은 것이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하필 비가 내렸다.

 

"아따야 동생아, 너 오랜만이다-잉."

 

빗속에 한참을 넋 놓고 서 있었을 것이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로 하얀 천을 싹뚝싹뚝 잘라대던 무당이 돌연 칼을 내던지고 떡시루를 들어올리더니 내 앞으로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떡시루를 내 머리 위에 얹었다. 신기하고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아마 얼결에 두 손을 들어 올려 떡시루를 잡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무당이 떡시루를 내 머리에 올려놓고 돌아서는 순간 바닥으로 떨어져서 박살이 날 것 같았지만, 그러나 떡시루는 마치 내 머리에 무슨 강력 본드로 붙여놓은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도 떡시루는 그대로 머리 위에 있는 것이었다.

 

소리 없이 신음하던 그녀, 고국으로

 

그런 진귀한 체험을 가슴에 품고 있는 내게 그날 안산에서의 '퍼포먼스'는 예사로울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른바 내림굿이라고 하는 그런 행사를 여러 차례 목도하기는 했지만, 상황이나 지역 혹은 장소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여주곤 했기 때문에 호기심이 충족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날의 내림굿 주인공이 박사 학위 하나에 전공이 다른 석사 학위 하나를 갖고 있으면서 또 다른 석사 공부를 하는 중인 이십대 후반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나는 글쎄, 뭐라고나 할까, 그냥 까놓고 말해서 삿되다고나 할까, 그런 어떤 말초적인 호기심마저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제일교포 2세였다. 국제정치로 박사를 하고 관련기관에 일자리를 얻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학교로 가서 국제법으로 석사를 하고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역시 좌절되었다. 지금은 좀 달라졌다고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비전향' 제일교포 2세가 공직에 진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녀의 부친이 귀화를 거부하고 끝내 한국 국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대장성 내규상 외국인 신분인 그녀가 외교라든가 국제정치 같은 분야에 진출하기는 하늘에 별을 따기보다 어려웠다.

 

소설가 이문열씨가 한때 자기는 부친의 좌익 경력 때문에 판검사에 임용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사법시험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야 알고 포기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녀는 공부하기 전이나 혹은 중간에 사실을 알고 포기한 게 아니라 더욱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제정치나 외교가 자신의 적성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적성에 맞고, 실력도 괜찮고, 그러면 다 된 거 아니냐. 안 되는 이유가 있어야 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그렇게 거듭 부딪혀보았지만 바위에 계란 던지기, 씨도 먹히지 않았다.

 

소리 없는 신음으로 괴로워하던 그녀는 어느 날 홀연 한국으로 날아온다. 무슨 연고를 찾아서 온 것은 아니었다. 약속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하나, 그것뿐이었다.

 

이른바 고국이라고 하는, 모국이라고 하는, 그 이름자만으로도 가슴에서 먹먹한 것이 마구 생산되는 그런 곳을 왔지만 그녀는 외국인이었다. 한국인이면서도 외국인인 그녀, 관광비자를 들고 일 년 남짓 한국의 곳곳을, 고국의 도처를, 모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아니 어쩌면 필연적으로, 무당 연구로 책도 여럿 낸 어느 유명인사를 알게 되었다. 그 유명인사와 각별한 교류가 시작되었고, 그 인사의 권유로 그녀는 한국에서 다시, 또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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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굿 ⓒ 심규상

무당굿 ⓒ 심규상

 

무병을 앓고, 사람들 앞에서 작두를 타게 되는데

 

이번에는 국제청치도 아니고 외교도 아닌, 그런 것들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문화인류학이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경계인' 레벨의 그녀가 걸어야 할, 걸을 수밖에 없는, 걷게 되어 있었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가슴에 이미 엄청난 상처를 안고 있었던 그녀는 문화인류학을 순수하게 그냥 '문화인류학'으로만 접할 수가 없었다. 그 세계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가슴에서 뭔가가 뛰고, 머릿속에서 뭔가가 만들어지고, 핏속에서 뭔가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녀는 학문적 차원의 문화인류학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무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고, 그녀는 바야흐로 새끼무당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날, 그러니까 내게 와서 보고 싶으면 오고 생각 없으면 오지 말라고 중견 소리를 듣는 시인이자 소설가가 말했던 그날 작두타기 시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공개적으로 작두타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부터 무모한 기획이었다. 예의 유명인사와 학교 당국이 담합해서 아마 그렇게 널리 알렸을 것이다. 좋게 보자면 그 세계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자는 것이고, 나쁘게 보자면 학교 광고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문화계 인사들에게 알린 것까지는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그런데 신문이며 방송사 카메라까지 동원한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 해도 당사자인 그녀에게는 어리둥절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뭐 그랬다. 대충 잡아도 이백여 명의 사람들이 커다랗게 둥근 원을 그리고 있었고, 원의 중앙에 작은 제단이 설치되어 그 위에 작두가 배치되었고, 징소리 북소리에 호적소리가 신을 부르는 속에서 어미무당은 "어이, 어이 음으으음" 하는 구음(口音)으로 신이 내려올 장소를 지정하는 한편 찬양하고 있었으며, 작둣날을 밟아야 하는 새끼무당 그녀는 신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내용의 숨이 막힐 듯한 춤사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의 춤사위는, 그것은 일종의 도움닫기 같은 성격이었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나 넓이뛰기 선수가 전심전력을 다해 달리다가 지정된 선 앞에서 우뚝 멈추는, 멈추기는 하지만 멈춘다는 흔적도 의식도 없이 멈춤과 동시에 자신의 몸무게를 제로 상태로 해서 아주 가볍게 훌쩍 날아오르듯이, 그녀는 초반의 숨 막히는 춤사위를 통해 자신의 모든 기를 한 곳으로 모은 뒤에 작둣날이라고 하는 지정된 선 위에 아주 가벼워진 몸으로 사뿐 오르게끔 되어 있었다.

 

무너져버린 그녀... 잊을 수 없는 '눈빛'

 

하지만 그녀는 예정된 코스를 완주하지 못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시도했지만 세 번 다 실패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지는 속에서 그녀의 의식이 고양되기는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비처럼 가벼워져야 할 그녀의 몸은 거꾸로 무거워지고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할 작둣날이, 다만 하나 선으로만 보여야 할 작둣날이 시퍼런 칼날로 보이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날이 면도날처럼 예리한 작두는 아니었다. 소설 같은 데서는 흔히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로 묘사되곤 하지만 그날 내가 본 작두는 그렇게까지 날이 서 있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붉은 기운의 녹이 슬어 있었고, 날이 있는 부분은 깔끔하게 은빛을 내고 있기는 했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것은 아니고 무뎌 보였다. 그렇다 해도 사람이 올라서면 그 무게로 인해 발이 잘려나갈 것은 자명해 보였다.

 

어쨌든 그날의 그녀는 나비가 되지 못했다. 나비는커녕 새도 되지 못한 채로 풀썩 무릎을 꺾었다. 작두 바로 옆으로 무너져내리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고, 눈물이 쏟아지는 눈으로 그녀는 주변을 흘낏 돌아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마 의식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녀의 그 눈빛은 내 안으로 아주 깊이 들어와버렸다.

 

나는 그날 이후 한 달 가까이를 그 눈빛에 시달렸다. 눈을 감으면 보이고, 눈을 떠도 보이고, 술을 마셔도 보였다. 처연이라고나 할, 어쩌면 절망인 것도 같은, 아니 어쩌면 차라리 웃음이었던 것도 같은 그녀의 눈빛으로 인한 괴로움은 한 달 남짓만에 해소되기는 했지만, 햇살을 머금은 그 눈물빛만은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에 마치 벽화처럼 새겨져서 무슨 적당한 계기가 되면 떠오르곤 했다.

 

이를테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그런 추상적인 질문이 불쑥 일어날 때, 그런 때 그녀의 그 눈물빛이 마치 "나를 봐, 나를 보면 알게 될 거야"하고 속삭이는 것처럼 시나브로 떠올랐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새삼 궁금하다. 그날 이후 그녀의 행보가, 운명이, 세상과의 대결이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지 궁금하다.

#내림굿 #작두 #무당 #문화인류학 #재일교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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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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