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방 기념 인터뷰하는 민청련 의장 김근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군사독재와 맞서던 저의 대학시절, '김근태' 당신은 그 이름만으로 저에게 희망이었고, 용기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현실적 국민운동으로 만들어 낸 당신을 따라 우리는 청춘을 걸었습니다. 당신은 탁월한 논리와 용기를 가진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형이고, 선배였습니다. 당신이 정치참여를 선언하던 때, 당신의 정직과 진실함이 대한민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정치여정은 고달팠습니다. 당신의 정직과 원칙은 냉소와 멸시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그 서럽고 불편한 몸조차 조롱거리가 되는 그 잔인한 정치현실을 지켜보며 당신의 길을 따르기가 저는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금권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며 '정치자금 양심고백'을 했을 때, 사람들은 이적행위자라며 공상주의자라며 손가락질 했습니다. 당신 편에 있던 이들도 '어리석은 짓'이라며 당신을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2년 후 금권정치 청산은 모두의 화두가 되었고, 당신의 용기는 정치개혁의 물꼬가 되었습니다.
'서서 죽을지언정 무릎 꿇지 않겠다'고 할 만큼 목숨을 건 투쟁을 해온 당신이지만, 엄혹하던 그 시절에도 단식농성만큼은 반대해 왔던 분이 당신입니다. 그러던 당신이 2007년 '한미 FTA 반대 단식농성'을 하셨습니다. "단식이 김근태에게 큰 생채기가 되더라도 생채기를 피할 수 없고, 얼마쯤 가지가 부러지고 타 버리더라도 천둥번개를 피하지 않고 제 몸으로 막아내는 들판의 나무 한 그루처럼, 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냉소했고 외면했습니다. 어떤 이는 당의장까지 지낸 여당의원이 참으로 무책임하다며 혀를 찼습니다.
그때 국회의사당 본관 앞 농성장의 싸늘했던 찬바람과 그 속에서 절박감과 무력감으로 고뇌하던 당신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저는 아직도 가슴이 시립니다. 그리고, 온 국민이 반대하는 가운데 2011년 한미 FTA 비준안 통과를 병상에서 지켜봐야 했을 당신의 아픔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1997년 국민경선 주장,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의 '사회적 대타협'의 제안, 공공주택 분양원가 논쟁! 당신은 부조리한 권위와 관행에 늘 맞서 왔고, 그 때마다 세상은 조금씩, 때로는 크나큰 물결이 되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만든 파장이 물결을 일으키고, 그것이 파도가 되어 온 세상을 휩쓸고 간 자리에 늘 김근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들은 당신을 실패한 정치인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정치현실에 분노하고 울분을 토하는 후배들을 다독이며 정직과 진실의 가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의 분노가 세상의 분노가 되고, 당신의 이상이 많은 이들의 현실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또 그렇게 묵묵히 그 길을 가자했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함께 했던 이들은 자주 서럽고 너무 억울했습니다. 저, 이제 눈물을 삼키며 당신의 마지막 길에 뒤늦은 회한의 헌사를 올립니다. 반독재 민주화투쟁보다 더 힘겨웠던 현실 정치의 여정이었지만, 아무도 김근태 정치의 성공을 말하지 않지만 늘 그렇듯, 당신의 길이 옳았습니다.
양심을 내던지더라도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정치라고 하는 이가 있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떠올릴 것입니다. 민주개혁세력이 집권했다 하여, 우리 안의 부당함과 싸우지 않는다면 김근태를 기억할 것입니다. 거대한 권력 앞에 모두가 숨죽일 때,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