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마른 시래기 다발, 마음 녹이는 국이 되고

바람과 햇빛에 잘 마른 시래기 다발을 보며

등록 2012.01.10 18:04수정 2012.01.1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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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래기 바람, 햇빛, 낮과 밤에 말라가고...

...시래기 바람, 햇빛, 낮과 밤에 말라가고... ⓒ 이명화


시래기는 무청에서 왔다. 무를 다듬으면서 싹둑 잘라낸 무청을 햇볕과 바람에 잘 말린다. 시래기는 국이 되고, 추운 겨울 언 몸과 마음을 녹이는 국이 된다. 귤이 겨울철에 맛있고 굴, 떡국, 만두국이 찬바람 부는 겨울에 제 맛이듯 시래기 국은 겨울 김장 끝나는 초겨울부터 한 겨울까지가 제철이다. 요즘은 계절에 상관없이 먹지만 여름에 먹는 시래기 국은 생뚱맞다. 누구 말대로 '청년들 노는 곳에 노인이 불쑥 끼어든 꼴'이다.


"시래기가 온전히 아름다울 수 있을 때는 한 여름의 열기와 습기가 완전히 가신 때라야 한다. 깊고 깊은 가을날, 열매도 잎도 모두 떨어지고 없는 빈 감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시래기 다발은 가히 아름답다. 뻐근한 아름다움이다. 왜 뻐근한가. 이제 올 겨울에도 다른 건 몰라도 시래기 국은 원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안심이 들어서." (공선옥 <행복한 만찬> 127쪽)

한 겨울 내내 시래기 국을 원 없이 먹을 수 있기를 바라진 않지만, 어쨌든 추운 겨울날 빈한한 살림살이에 따뜻하고 무난한 시래기 국이 제 맛인 것은 분명하다. 시래기 국은 부담 없고 친근하다.

시래기 국 하면 먼저 떠오르는 추억은 오래 전에 재래시장에서 채소를 팔던 엄마다. 콩나물, 시금치, 무 등 고만고만한 채소들을 펼쳐놓고 시장 골목에서 장사하던 엄마는 같은 장소에서 꽤 오래오래 장사를 하셨다. 배추우거지랑 무시래기 등을 푹 삶아 팔았고 단골로 대먹는 식당들에 배달을 해 주곤 했다. 추운 겨울이면 연탄난로 하나 달랑 피워놓고 언 손발을 녹였고 무더운 여름이면 또 무더위를 고스란히 견디며 장사를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어린 동생들은 그 손의 힘으로 자랐다.

"시래기를 엮어서 시래기를 말리는 것은 제 눈물을 엮어서 제 눈물을 말리는 일. 그래서 시래기국을 먹는다는 것은 햇빛과 바람과 잘 마른 누군가의 눈물을 먹는다는 것이다." (공선옥 <행복한 만찬> 129쪽)

지난 늦가을, 아랫집 윗집 모두 겨울 김장을 하고 난 바로 다음 날 오후, 무청을 짚으로 이리저리 잘 엮어서 시래기다발을 만들었다. 지금도 옆집 할머니 집 앞 담벼락에는 물기가 빠진 시래기다발이 고슬고슬 바삭바삭 말라 가고 있다. 옆집 할머니는 뭐든지 잘 말린다.


봄, 여름, 가을만 말리는 줄 알았더니 한겨울에도 무를 채 썰어 말리고 호박을 썰어 또 말리고 또 말린다. 그것들을 잘 단도리 해뒀다가 때가 되면 구포시장으로 간다. 할머니가 말린 시래기다발이 그 누군가의 손에 팔려가서 또 누군가의 밥상에 따뜻한 시래기국 한 그릇 올라가리라.

이 추운 겨울, 시래기국은 겨울 내내 소박한 밥상에 인기리에 오르고 있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간소한 밥상에 오르는 시래기국처럼 따끈따끈한 그 무엇이라도 되고싶다. 꽁꽁 언 마음 녹이는 따뜻한 그 무엇이.
#시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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