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기생, 대체 얼마나 뛰어나길래...

[역사소설 수양대군57] 날 버린 조국, 복수하고 싶었다

등록 2012.01.17 10:14수정 2012.01.1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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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이 한명회를 불렀다.

"이번 왕비 고명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신은 몸이 비대하다지?"
"뚱뚱한 정도가 아니라 걸어가는 건지 굴러가는 건지 모를 정도랍니다."
"4인교 가지고는 안 되겠군."
"8인교는 준비해야 될 것 같습니다."
"먹는 것도 좋아하겠군. 팔도의 진미를 모아야 하지 않나?"
"여자를 밝힌답니다."
"여자를?"
"주제에 날씬한 여자를 좋아한답니다."


수양은 어이가 없었다. 양물도 없고 고환도 없는 환관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세된 환관이 어떻게 여자를?"
"거시기가 없으니까 희롱하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취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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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생 ⓒ 이정근

팔도의 기생 소집령이 떨어졌다. 젊고 예쁘고 나긋나긋한 기생 중 한수(漢水) 이남 기생은 한양으로, 경기 강원 기생은 개성으로, 평안도와 함경도 기생은 평양으로 모이라는 것이다. 특히 허리가 가늘고 날씬한 세요(細腰) 기생을 빠트리면 그 고을 수령은 엄히 문책할 것이라는 경고도 뒤따랐다.

관기는 수령의 통제와 관리를 받는다. 공공재나 다름없다. 수청들라하면 들어야 하고 거절하면 핍박이 뒤따른다. 심하면 칼을 쓰고 옥에 갇혀야 한다. 허니, 일편단심 춘단이라면 모를까 거역하기가 어렵다. 애첩으로 끼고 있는 기생을 내보내자니 옆구리가 허전하고 조정의 명령을 묵살하지니 후환이 두려웠다.

도백과 수령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임지를 따라 이동해야 하는 지방관들은 한양에 본처가 있고 부임지 고을에 현지처가 있는 것이 공개된 비밀이었다. 대놓고 첩을 들여놓기가 뭐한 수령은 기생을 끼고 살았다.


소집령에 환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편을 지방관으로 내보낸 경처(京妻)들이다. 기생을 끼고 사는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입을 뻥긋할 수 없다. 속앓이를 하다가 한마디라도 던지면 투기라고 몰아세운다. 겁먹고 납작 엎드리면 그냥 넘어가지만 눈이라도 치뜨면 칠거지악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며 윽박지른다.

이참에 눈엣가시를 걷어 낼 수 있다. 지가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뙤놈'들이 걸친 여자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한다. 이러한 상승기류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다. '사신은 환관이지 않느냐?'고. 하지만 따라오는 사람이 30명이 넘는다. 그들이 1개월가량 조선에 머문다. 잘하면 2~3개월 넘기지 말란 법도 없다. 흐미! 입이 째질 수밖에 없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은 기회다, '절호의 기회를 살려라'

수양이 다시 한명회를 불렀다.

"성삼문은 지금 어디 있는가?"
"의주에 있습니다."
"준비는 착오 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네."
"그럼 곧바로 떠나라."

중국에게 여진족은 두통거리다. 그냥 두자니 만리장성을 유린하려들고 밀어부치자니 그들의 기동력이 부담스럽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 했던가? 동이를 이용하여 그들을 제어하고 있지만 그래도 화근이다.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며 회유해보지만 거칠고 사납다. 기름진 압록강변에서 호시탐탐 북경을 엿보던 여진족을 김종서가 육진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두만강변 황무지에 묶어놓았으니 고마운 존재다.

김종서는 명나라에서도 인정하는 장수다. 그러한 장수를 죽였으니 북경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찍히면 피곤하다. 추진 중에 있는 비장의 계책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왕도가 없다. 무조건 잘해주어 점수를 따는 수밖에 없다. 지금 들어오는 사신이 누구인가? 지근거리에서 황제를 모시는 환관이 아닌가. 이렇게 좋은 기회도 없다.

칠삭동이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평양찍고 의주까지 뛰어라'

수양의 밀명을 받은 한명회가 한양을 떠났다. 혜음령을 넘은 한명회가 임진강을 건너고 개성을 거쳐 해주 감영에 들어갔다. 기향(妓鄕)의 고장 송도를 지나면서도 술 한잔하지 않았다.

"지금 봉명사신이 들어오고 있다. 그와 함께 오는 내사(內史) 정통(鄭通)이 신천(信川) 출신이다. 하여, 다음과 같이 명한다."

우부승지 한명회의 입을 빌렸으나 임금의 명으로 하달된 유시(諭示)다. 황해도 관찰사가 무릎을 꿇었다.

"첫째, 그의 옛집이 그대로 있는지 살펴보아 수리할 것이 있으면 즉각 수리하고 부득이 새로 지어야 할 것 같으면 즉시 착공하고 사후 보고 하라. 둘째, 부모의 무덤을 살펴서 아뢰어라. 셋째, 그의 족친을 초치하여 사신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고 만약 사신이 만나보고자 하거든 감영에서 과실과 술을 준비하여 대접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해주를 떠나 평양에 들어간 한명회가 평안도 관찰사에게 유시했다.

평양은 색향이지 않은가? '색향본색을 보여주시오'

"사신 고보(高黼)의 어미가 증산(甑山)에 살고 있으니 쌀 10석, 콩 5석, 장 1옹(甕), 소금 2석을 갖다 주도록 하라."
"즉각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끝을 흐린 한명회가 관찰사의 귀를 빌렸다.

"제 몸은 뚱뚱하면서 허리가 능수버들처럼 하늘거리는 날씬한 여자를 좋아한다 하오. 준비는 차질 없겠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암튼 여기서 적당히 만져서 보내야 하오."
"피양 기생이 공연한 허불명전이 아닙니다. 히 히 히."

평양 감사가 허허로운 웃음을 날렸다.

"감사께서 실수하셨습니다. 허불명전이 아니라 명불허전(名不虛傳)입니다."
"하, 하, 하. 이놈의 입이 주가 책이 되어 말이 헛나갔습니다. 허리를 분질러 올려 보낼 테니 책임지라는 소리는 마십쇼."
"색향본색(色鄕本色)을 보여주시오."

느끼한 관찰사의 웃음을 뒤로 한명회는 북행길을 재촉했다. 대령강을 건너 의주에 들어간 한명회는 은밀한 곳에 숙소를 마련하고 의주목사를 불렀다.

"성삼문은 어디 있소?"
"의주관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신은 언제 온다 하오?"
"강 건너에서 내일 배를 탄다하옵니다."
"알겠소. 내가 여기와 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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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압록강에서 바라본 의주. 앞이 백마산성이고 뒤가 의주 삼각산이다. ⓒ 이정근


중국 사신 흠차소감(欽差少監) 고보(高黼)가 내사(內史) 정통(鄭通)과 두목(頭目) 15인을 거느리고 의주에 도착했다. 원접사와 의주목사 그리고 한양에서 파견된 선위사가 성대하게 환영했다. 두목은 무역을 목적으로 따라온 사람이지만 사신일행과 같이 들어오기 때문에 사신에 준하는 예우를 했다.

의주에 첫발을 내디딘 고보는 만감이 교차했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밟아볼 수 있을까? 가슴에 살아있는 조국 땅이지만 그에겐 낯선 땅이었다. 일곱 살 어린나이에 중국으로 끌려가던 소년. 그에겐 조국이 원망의 대상이었다.

조국이 날 버렸다...복수하고 싶다

어린 아이 하나 보호해주지 못하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 조국. 동녀(童女)를 보내라. 동남(童男)을 보내라는 중국의 호통에 아무소리 못하고 보내야 하는 조국. 귀엽게 생겼다는 것이 죄가 되어 뽑힌 자신. 그에게 조국은 고마운 나라가 아니라 미운 나라, 보복 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북경에 도착하여 아직 자라지도 않은 음경이 잘리고 고환이 발라지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는 칼을 갈았다.

"어린 몸 하나 보호해주지 못한 조국, 제나라 백성을 내팽개친 조선.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자식이라고 찍어 낸 호방(戶房). 언젠가 조국에 나가면 복수하고 말리라."

소년은 성장해서 명나라 황실의 환관이 되었고 이번에 흠차소감이 되어 조국 땅을 밟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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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뱃놀이 단원 김홍도가 그린 <평양감사 향연도> 중 <월야선유도> 부분도. 중국 사신을 위한 뱃놀이는 이보다 더 성대했다고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소장 ⓒ 이정근


성삼문의 위무를 받은 요동 도사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성삼문의 역할을 여기까지다. 북경에서 중국 사신이 출발하면 북경관구 군사가 심양까지 호송한다. 심양에서 요동까지는 심양관구 군사가 담당하고 요동에서 압록강까지는 요동 도사가 호위한다. 남행하는 사신접대는 영접사 몫이다.

부어라, 마셔라, 안겨라. 물량공세가 이어졌다. 사신이 입국하면 보통 의주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남행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사흘을 묵었다. 청천강을 건너 평양에 들어간 사신일행에게 또 다시 물량공세가 퍼부어졌다. 대동강에 배를 띄워라. 을밀대에 잔치를 벌여라. 여자를 떼로 붙여라. 그야말로 '색향(色鄕)이 바로 이런 것이다'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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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 얼어붙은 박연폭포 ⓒ 이정근


개성도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박연폭포 앞에 차일을 친 개성유수는 여자는 물론 시인묵객을 동원하여 사신의 발길을 잡았다. 잔치 상 앞에서 난(蘭)이 쳐지고 일필휘지(一筆揮之)가 춤을 추었다.

"백구야 펄펄 나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성상이 바라시니 너를 쫓아 예 왔노라."

도드리 장단이 멋스러운 백구사(白鷗詞)가 이어졌다. 정가(正歌)다. 이어 내리 꽂는 폭포수 소리와 함께 상사별곡(相思別曲)이 흘렀다. 이어졌다 끊어지고 끊어질듯 이어지는 애잔함에 사신들은 넋을 잃었고 혼줄을 내려놓았다. 조선에 이렇게 품격 높은 문화가 있다는 것에 탄복했다. 이어 권주가(勸酒歌)가 귀에 감기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드디어 사신일행이 홍제원을 지나 모화관에 도착했다. 여느 때 같으면 의주를 출발한 사신이 한양에 입성하는데 열흘 걸렸지만 이번에는 열아흐레가 걸렸다. 사신이 한명회의 의도대로 따라 주었고 조국을 미워하는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평양 #의주 #압록강 #박연폭포 #색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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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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