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농부의 농한기

겨울 숙지원 단상

등록 2012.01.16 16:32수정 2012.01.1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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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여름·겨울 방학은 교사와 학생들이 한숨 돌리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농부들에게는 여름 방학이 없다.
돌아서면 자라는 풀, 베는 일만으로도 기나긴 하루해가 금방 가고 만다.
감자캐기, 콩밭의 김매기, 고추 따고 널어 말리기, 옥수수 따기….
오히려 만물이 왕성하게 자라는 논밭을 지켜야하는 문자 그대로 농번기다.
겨우 텃밭 농사를 하는 사람도 수당 없는 특근(?)을 숱하게 하는 계절이 여름이다.


그러나 텃밭 농사하는 농부들에게 겨울은 대학생들의 방학만큼 긴 방학이다.
쇠스랑도 튕기는 바위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에 심을 작물도 없으려니와 옛날처럼 남자들은 가마니를 치거나 멍석을 만들고, 여자들은 물레를 잣거나 베틀에서 북을 놀리는 일도 없다. 시설농업을 하지 않는다면 겨울은 온전히 농한기인 셈이다.

숙지원에도 특별히 힘들여 할 일이 없다.
가끔 마음 내키면 훌쩍 차를 몰지만, 대체로 사나흘에 한 번 꼴로 다녀온다. 
하우스에 다시 비닐 터널을 만들어 씨앗을 뿌렸는데 날씨가 추운 탓인지, 아니면 채소들도 농한기임을 아는 것인지 억척스럽게 자라려는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탓할 수 없는 일.
우리 가족이 먹기에도 빠듯한 양이지만 솎아 오는 재미가 쏠쏠해 거르지 않는다.
 
a 하우스 안의 채소밭      날이 추운 탓인지 성장이 더디다.

하우스 안의 채소밭 날이 추운 탓인지 성장이 더디다. ⓒ 홍광석


요즘 숙지원의 널따란 잔디밭은 황금색이다.
텃밭의 마늘, 양파, 겨우 싹이 튼 완두콩이 어떻게 저런 몸으로 겨울 추위를 이길까 싶은데 아주 생생하다.
언 땅에 뿌리를 감춘 감나무, 뽕나무, 매실, 자두나무들도 잎이 없어 추워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따스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홍매와 자두나무에 깨알만한 꽃망울이 경이롭고, 울타리에 심은 된 남천에는 불을 밝힌 듯 빨간 열매가 주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가꾸는 꽃밭이라고 조용한 것은 아니다.
튤립은 싹을 내밀고 있다.
바람이 가려진 양지 쪽에는 끈끈이대나물과 수레국화, 샤스타데이지가 벌써 푸르다.
나무들 사이에는 꽃양귀비가 밭을 이루고 있다.
땅에 엎드린 파라솔은 추위에도 굳건하고, 연약하게 보이는 비올라는 제법 실한 꽃망울을 밀어 올리는 중이다.
어렵게 싹을 틔운 매발톱도 추위에 기죽지 않고 있다.
아마 올해 아내의 꽃밭에는 지난해보다 더 다양한 꽃들이 셀 수 없이 피고 질 것이다.

a 남천       숙지원 철쭉길 울타리에 심은 남천은 겨울에 붉은 열매를 볼 수 있다.

남천 숙지원 철쭉길 울타리에 심은 남천은 겨울에 붉은 열매를 볼 수 있다. ⓒ 홍광석


그렇게 숙지원에 가지 않는 날이면 아내와 나는 집에서도 금년에는 무엇을 어디에 얼마나 심을 것인지 텃밭 농사 계획을 이야기한다.
3월이 되면 가장 먼저 심는 감자는 두 줄만 심을 것이다.  
야콘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자리를 바꾸어 100주를 심을 계획이다.
멧돼지가 먹어버린 고구마는 텃밭에 심지 않을 것이다.
고추 100주는 기본으로 하고, 옥수수는 두 이랑만 심을 작정이다.
지난해 연작으로 인한 가지와 토마토농사의 실패는 거울로 삼을 것이다.
강낭콩, 메주콩, 팥, 참깨, 토란, 생강….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화를 내는 일은 없다.  

이제 우리는 한 작물을 결코 많이 심지 않는다.
채소류와 콩 종류, 마늘과 양파 등을 자급하는 것이 목표이다. 
욕심껏 많이 심는 것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건강을 지키자는 텃밭 농사인데 욕심을 부려 몸에 무리가 된다면 그건 차라리 처음부터 하지 않음만 못한 일이 된다. 더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무리하면 쉽게 몸을 상할 수 있다.
지금도 내가 가끔 더 심을까 하는 욕심을 말하면, 아내는 욕심이 사람 잡는다고 말린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금년에 참깨를 좀 더 심겠다고 벼른다. 


사실 농작물을 많이 심으면 수확하고 치우는 일도 힘들뿐만 아니라 수확한 작물을 보관하는 것도 힘들다. 물론 과일이나 채소를 저온 저장고에 일정 기간 보관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제철에 먹는 맛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과학적으로도 오래된 채소와 과일은 영양가가 파괴돼 맛을 잃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부패해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때문에 우리는 마늘 양파 감자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제철 과일은 그때그때 먹고 말 작정으로 많이 심지 않는 것이다.

텃밭농사.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힘들고 어려움을 넘는 재미와 보람을 더 느낄 수 있는 일이다.
텃밭 농사는 요즘처럼 먹을거리가 불안한 시대에 직접 생산한 안전하고 싱싱한 농산물을 내 가족과 이웃들이 먹을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다.
무엇보다 텃밭 농사로 우리 부부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점도 감사할 일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는 분들께 텃밭 농사를 권하고 싶다.
어린 자녀들과 텃밭 농사를 한다면 흙의 소중함과 자연의 섭리를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고, 꽃을 보고 식물을 만지게 한다면 착한 심성을 기르는 일이 되지 않을까한다.


a 마늘밭      오른쪽은 마늘, 왼쪽은 양파와 완두콩을 심었다.
여리면서도 추위에 강한 것이 신통하다.

마늘밭 오른쪽은 마늘, 왼쪽은 양파와 완두콩을 심었다. 여리면서도 추위에 강한 것이 신통하다. ⓒ 홍광석


지금 농촌은 해를 거듭할수록 채소 등 농산물을 생산할 여력이 급격히 줄고 있다.
그동안 농촌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먹을거리를 생산해왔던 노인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뜨거나 농사를 포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마늘, 고추, 참깨 등 잔손이 많이 들어가는 농산물의 생산량이 감소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농산물의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어 가난한 서민들은 사먹기 어렵게 될 것이다.
텃밭 농사는 그런 어려움에 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텃밭 농사에 뜻은 있어도 여건이 안 돼 못하는 경우에는 요즘 활발해지는 도시 텃밭 운동이나 주말 농장 같은 작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올해는 설이 빨라 농사도 열흘쯤 앞당겨지겠지만, 2월 중순까지는 숙지원의 농한기는 이어질 것이다.
텃밭 농사, 이제 6년째 접어들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마을 노인들을 따라하며 모르는 것은 물을 작정이다.
설을 쇠고 언 땅이 풀리면 우선 쟁기질부터 시작해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필통, <귀농사모> 등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겨레> 필통, <귀농사모> 등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텃밭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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