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아버지가 없어서 이 지경?... 순진하긴

[주장] 정부의 '학교폭력대책'에 던지는 질문들

등록 2012.02.08 17:00수정 2012.02.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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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 비장한 표정으로 학교폭력을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밝힌 국무총리의 발언은 듣고 있기조차 민망하다.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세상의 끝자락에서 홀로 느꼈을 암흑 같은 절망을 떠올리면 죄스럽다"는 말이 그 대책의 비열함과 조야함을 가리는 수사로서 동원되고 있을 뿐임을 생각하면 죽어간 이들에게 더더욱 죄스럽다. 구정물을 유리컵에 옮겨 담았다고 해서, 그 위에 꽃잎 몇 개 띄웠다고 해서 마실 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이 실효성이 있느냐 없느냐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효성이 없다면 현상 유지라도 되겠지만, 접근방식에서부터 근본적 문제를 내재하고 있다면 사태는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번 정부 대책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매우 심각한 의문이 떠오른다.

썩은 사과가 문제인가, 썩은 상자가 문제인가

a  김황식 국무총리가 6일 오전 정부중앙청사에서 관계장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김황식 국무총리가 6일 오전 정부중앙청사에서 관계장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부대책은 썩은 상자는 내버려둔 채 눈에 보이는 썩은 사과 몇 개를 골라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해학생 몇 명을 솎아내 처벌하고 추방하면 학교폭력은 사라질 것인가. 사람은 장소적 존재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고 버려진 공터는 순식간에 쓰레기장으로 변하지만 거기에 누군가 꽃밭을 만들어 놓으면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학교폭력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관계이고 문화이다.

지난해 초 발생한 해병대 총기참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다시 한 번 깨달았듯이, 무릇 폭력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싹트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가해학생들을 괴물로 지목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을 뿐, 정작 폭력을 만들어내고 침묵하고 방관하는 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입시문제로만 수렴되어서는 안 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고 착취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전수하는 약탈적 경쟁교육을 그냥 둔 채 폭력이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최소한 일제고사 폐지도 포함되지 않은 것이 학교폭력 대책인가. 게다가 지배와 복종은 과연 일진과 피해학생 사이에서만 관찰되는 것인가. 성, 장애, 사회적 신분 등에 따른 모욕과 차별이 묵인되고 공공연히 조장되는 공간에서 폭력이 싹트고 묵인되기 마련 아닌가. 이처럼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공간 안에서 자존감은 물론 동료에 대한 애정이나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하지 않는가.

정녕 폭력이 사라지기를 원한다면 관리자-교사-일진-보통 학생-'찌질이'로 이어지는 학교 안 힘의 피라미드부터 해체하고, 폭력의 원인을 외려 피해자에게로 돌리는 차별적 논리('찌질이'는 저런 대접을 받아도 싸다는 논리)와 맞서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정부 대책 어디에도 학교 안 권력관계와 폭력적 문화를 손보겠다는 내용은 담겨 있지 않다.


대신 원인으로 끊임없이 지적되는 것은 괴물이 되어 버린 아이들과 그들의 인성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대책은 학교폭력 해결 대책이 아니라 학교폭력 '관리' 대책, '비가시화' 대책에 불과하다.

회복되어야 할 것은 인성인가, 관계인가


정부는 '아이 하나를 기르기 위해서는 온 동네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까지 인용하면서 전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지만 정작 그 해결 과정의 주인공들을 이상한 자리에 배치하고 있다.

정부대책에서 학생들은 (잠재적) 피해자와 (잠재적) 가해자로 나뉘는 대립적 관계로만 설정되어 있다. 또래 상담과 학생자치법정 역시 학생들 사이의 신뢰와 우정을 회복하는 제도가 아니라 폭력을 관리하는 제도로, 벌을 주는 주체를 교사에서 학생으로 옮겨놓았을 뿐인 제도로 상정되어 있다.

교사와 학생은 또 어떠한가. 교사는 적발자요 감시자로, 학생은 대상으로만 호명된다. 교사가 학교폭력을 드러내고 함께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평가 점수를 높이기 위해 폭력을 적발하는 자의 위치에 놓일 때, 가해학생이 피해학생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라 학교와 교사의 평가 점수나 깎아 먹는 자 취급을 당할 때, '폭력은 안 된다'는 공적 규범은 조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조롱의 대상이 된 규범은 위반에 대한 책임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만 감시자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음지로 폭력을 '이동'시킬 뿐이거나 공공연한 위반을 통해 '센 척' 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우리는 국무총리의 말대로 '세상의 끝자락에서 암흑 같은 절망을 느꼈을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을 수사가 아니라 진정으로 공감해야 했다. 너무도 두렵고 외로웠을 피해자들이 결국 죽음을 택하기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손을 내밀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데서 책임감을 느꼈다면 해법은 들어주는 이, 손을 맞잡아주는 이를 만드는 데서 찾아야 했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낯선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를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기에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가해학생의 '인성'보다는 학교 안의 '신뢰', '동료애'여야 했다. 그럼에도 정부의 대책 어디에도 이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학생들은 동료에 대해서가 아니라 학교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요구받고 있다. 학생 상담이 '신뢰에 기반한 대화'가 아니라 '폭력 적발을 위한 조사'에 불과할 때, '얘기했다간 재미없을 줄 알라!'는 협박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강화된 것은 교사의 폭력 예방 권한인가 관리자의 학생추방권인가

정부는 이번 대책의 핵심이 '교권의 강화'에 있다고 말했다. 한국교총 역시 '선생님에게 힘이 실려야 학교폭력이 근절될 수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가해학생 즉시 격리 조치, 일수 제한 없는 출석정지, 징계사항 생활기록 기재, 학생면담 결과의 학부모 통지 등은 교사의 권한이라기보다는 관리자의 '학생추방권'을 강화하는 조치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이런 조치들은 사실상 교사들에게 학교폭력의 전적인 책임을 물릴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정부가 대책을 발표한 같은 날, 서울 양천경찰서는 학교폭력을 방치한 책임을 물어 교사를 불구속 입건하는 정치적 퍼포먼스까지 감행했다.

학교폭력 문제에 교사가 관심을 두고 중요한 책임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교사가 학교폭력에 정당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으려면 학생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 대책 어디에도 교사가 학교폭력 문제에서 전문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떻게 뒷받침하겠다는 약속이 없다. 대신에 교사들은 평가 점수 감점이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은 감시노동을 수행하게 됐다.

학교 평가 점수 관리 차원에서 관리자가 가해학생을 가차 없이 학교 밖으로 내몰아도 교사들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추방된 학생에 대한 사후 책임과 지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조차 없다. 그러하기에 '선생님이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라'는 국무총리의 주문은 교사에게도, 학생에게도 독(毒)이 될 수밖에 없다.

정부와 교총, '아버지의 귀환' 노리나

정부대책 가운데 가장 소름이 돋는 것은 바로 '밥상머리 교육 범국민 캠페인'이다. 무서운 남 교사가 적어서 학교폭력이 이 지경이 됐다던 교총의 투정은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고급스러운 옷으로 새로 단장하고 대책의 반열에 올랐다. '무서운 가부장'의 부재 때문에 해 애들이 저 모양이 됐다고 혀를 끌끌 차는 이들이 돼먹지 못한 애들을 제대로 혼내고 훈육할 수 있는 아버지의 귀환에서 해답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아버지의 밥상머리 훈육과 학교장의 학생 처벌권 강화는 그런 의미에서 쌍생아에 해당한다.

당연히 이들에게 '딸·아들의 반란'을 연상시키는 학생인권조례는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교총은 학교폭력 근절을 위해 학생 생활지도를 강화하려면 학생인권조례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면서 또 다시 '학생인권조례 폐기'를 강력주문했다. 이 같은 요구가 정부의 2차 종합 대책이란 옷으로 갈아입고 언제 재등장할 지 모를 일이다. 과연 학생인권조례는 학교폭력 해결에 걸림돌인가.

무서운 아버지에게 치도곤을 당한 큰형님이 어머니와 동생들 위에 다시금 군림했던 것처럼, 무서운 남 교사에게 끌려가 혼찌검이 난 일진들이 만만한 여교사와 학생들 위에 다시금 군림해온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바로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학교문화를 만들기 위한 학생인권조례였다. 폭력으로부터, 폭력을 정당화하는 차별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라 폭력과 차별에 대해 일상적으로 성찰하는 문화다. 인권에 대한 논의가 봉쇄된 채 무서운 감시자의 호령만 있는 공간에서는 더더욱 폭력이 깊이 똬리를 틀고 은폐될 수밖에 없다.

학생인권조례는 일방적 훈육과 지도의 자리를 대신해 '생각할 줄 알고 공감할 줄 알고 말할 줄 아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교육과 대화'를 갖다 놓았다. 의사표현의 자유, 자치활동권 보장, 인권교육 강화, 폭력과 차별에 맞서는 민주적 생활교육, 이를 위한 교사·동료학생과의 수평적 관계 형성 등이 그 구체적 내용으로 담겨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학교폭력의 유일한 해법은 아닐지언정 중요한 해법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이유다.

진정한 반성이 없는 자리에 진정한 해결책이 들어설 리 만무하다. 학생들에게서만 원인을 찾는 것은 비겁하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에서 피해학생들의 고통과 죽음은 처참하게도 책임을 져야 할 구조를 가리는 연막으로 사용되고 있다. 학교폭력을 진정으로 염려한다면 가해자의 인성이 아니라 가해학생이 처해있는 상황,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만 뒤바뀔 뿐 폭력을 지속해서 양산해 내는 학교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최소한의 노력부터 시작해야 한다.
#학교폭력 #학생인권 #학생인권조례 #학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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