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종지가 가운데 놓인 우리 집 식탁정월대보름의 음식들이 아직도 남아 평상시의 식탁이 비교적 풍성한 편이다. 큰 짠조기는 노친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 일 년 내내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
지요하
소금 섭취 줄이기
소금의 과잉 섭취가 사람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사람 잡는 설탕, 만병의 원인 소금'이라는 표어도 일반적인 상식이다. 건강 문제에 신경을 쓰고 사는 사람들은 늘 소금의 과잉 섭취를 경계한다.
나도 소금을 적게 먹으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쓴다. 음식 조리를 담당하는 아내에게 소금을 아예 쓰지 않거나 적게 쓰도록 부탁을 하고, 때로는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친을 모시고 사는 탓에 크게 실효를 거두지는 못한다.
노인들은 대개 미각이 무디어져서 짠 음식을 선호한다고 한다. 노친 역시 음식이 싱거우면 투정도 하시고 아예 외면을 하신다. 노친의 입맛에 맞추려면 소금을 써야 한다. 그래서 같은 음식을 두 가지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집에서는 대체로 소금을 적게 섭취하는 편이다. 노친 입맛에는 맞지만 내 입에는 짠 음식을 조금만 먹거나 아예 먹지 않는 방법으로 소금 섭취를 줄이곤 한다. 문제는 외식이다. 종종 이런저런 일로 가족외식을 하기도 하고 단체 회식에 참석하기도 하는데, 음식점 음식들은 대개 소금과 조미료 사용에 의존한다.
바닷가 동네 사람답게 어렸을 적부터 김과 감태를 노상 먹다시피 하는데, 요즘엔 햇볕에 말리는 재래식 김을 찾아볼 수 없다. 거의가 공장에서 기계로 가공하는 김인데, 김을 구울 때 꼭 소금을 사용한다. 손으로 김을 만지면 고운 소금 알갱이들이 느껴진다. 왜 기계로 김을 구울 때 소금을 사용하는지 알 수가 없다. 참 답답한 일이다.
김은 소금으로 간을 맞출 필요가 없다. 김 한 가지하고만 밥을 먹는 사람은 없다. 밥을 김에 싸서 먹더라도 반찬을 함께 먹게 마련이다. 음식 간은 반찬 몫이지 김의 몫이 아니다. 그래서 김 생산업체를 운영하는 한 지인에게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다.
"김 봉지나 상자에 이런 광고 문구를 만들어 넣어보세요. '○○김은 소금 사용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훨씬 잘 팔릴 겁니다. 김에 묻은 소금을 털어내고 먹을 땐 정말 짜증이 나요. 반찬도 함께 먹는데, 왜 굳이 김에 소금을 바릅니까?"
그리고 아내에게 색다른 제안을 했다. 우체국이나 마트 등에서 판매하는 공장 김을 사 먹지 말고, 예전처럼 시장 가게에서 구워서 파는 김을 사서 먹되, 절대 소금을 넣지 말고 굽도록 단단히 부탁을 하기로.
생김을 사서 먹으면 소금 섭취를 피할 수 있지만, 김에도 칼륨 성분이 있어 신장 치료를 하는 나로서는 생김을 먹을 수가 없다. 반드시 구워서 먹어야 한다. 옛날처럼 집에서 김을 한 장 한 장 구울 수가 없으니, 시장 가게에서 굽는 김을 사서 먹되, 절대로 소금을 넣지 말고 굽도록, 그래야 김을 사가겠다는 조건을 붙이기로 한 것이다.
간장종지에 대한 추억언젠가부터 우리네 밥상에서 간장종지가 사라졌다. 옛날에는 간장종지가 밥상의 중심이었다. 갖가지 성찬이 차려진 밥상이라도, 반찬그릇들 중에서 가장 작은 간장종지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간장종지가 오늘날에는 밥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오늘날의 우리네 밥상에서 왜 간장종지가 사라졌는지 곰곰 생각해본 적이 있다. 외국 음식과 인스턴트식품도 많아지고, 조리법이 발전을 하면서 아예 처음부터 음식 간을 잘 맞추게 되니, 차차 간장의 필요성이 줄어든 탓이 아닐까 싶다.
또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생활도 한몫을 했을 것 같다. 스피드 시대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더 바빠지고 여유를 잃게 되었다. 너나없이 이리저리 쫓기며 사는 형국이다. 그런 생활에 적응하려면 음식 간도 처음부터 맞아야 한다. 간장종지에 숟가락질을 하여 간을 맞추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다.
옛날에는 일단 음식을 싱겁게 만들고 보았다. 간을 맞춘다는 것은 싱겁지도 짜지도 않게 만든다는 뜻이지만, 대개는 싱겁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는 각자 간장으로 자기 입맛에 맞게 간을 맞추었다. 모든 음식을 한가지로 간을 맞추는 게 아니라, 일단 싱겁게 만든 음식을 자기 입맛에 맞게 간을 맞추어 먹도록 꼭꼭 끼니때마다 밥상 한가운데에 간장종지를 놓았던 것이다.
나는 간장종지에 대한 기억들이 튼실한 편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큰댁에 가서 기제사를 지냈던 추억도 많다. 추석과 설 명절과 정월대보름 차례는 물론이고 조부모와 증조, 고조까지 제사를 지내니 일 년에 예닐곱 번은 큰댁을 갔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음복을 하는데, 매번 상 가운데에 간장종지가 있곤 했다(숙모와 사촌형수들이 생기기 전에는 큰댁 제사음식 장만에 내 모친의 노고가 컸다. TV는 물론이고 라디오도 없던 시절, 밤 12시 제사 시간을 기다리는 일은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었는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큰댁 제사상에서도 간장종지가 사라졌다. 음복을 할 때 제각기 숟가락으로 종지 안의 간장을 떠다가 미역국 간도 맞추고, 젓가락으로 전을 집어 간장에 찍어 먹고, 김에 간장을 묻혀 밥을 싸 먹고 하던 그 풍경이 어느 사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예 간장종지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돌이켜보면 옛날 밥상 한가운데의 간장종지는 깊은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음식을 싱겁게 먹어야 하고, 정 싱거우면 스스로 입맛에 맞게 간을 맞추어 먹으라는 뜻 외로도 소금의 과잉 섭취를 경계하고 견제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소금을 그대로 먹거나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 지침 같은 것이 간장종지에는 어려 있었던 것이다.
간장은 그 자체로 음식이기도 하고 조미료이기도 하다. 간장은 소금을 이용하여 만드는 것이지만, 소금이 가지고 있는 나트륨 등의 독성들이 거의 제거되고 짠맛과 여러 가지 영양분만이 남게 된 액체다.
그리고 간장은 인체에 꼭 필요한 소금의 독성을 일찍부터 파악한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창조 능력의 또 한 가지 결정체다. 간장은 오랜 세월 우리 한국인들의 건강을 살갑게 지켜온 값진 음식이었던 것이다.
다시 간장 종지를 식탁의 중심에 놓기로내가 1986년까지 살았던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서문 밖' 길가 옴팡집의 뒤란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비록 작은 옴팡집일망정 펌프우물이 있는 뒤란에는 번듯한 장독대가 있었고, 된장단지며 고추장단지며 간장독 등이 늘 어우러져 있었다.
뒤란의 낮은 돌담과 울타리 둘레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곤 했다. 채송화, 맨드라미, 백일홍, 분꽃, 국화 등이 피고지고 했고, 나비와 꿀벌들이 날아들었고, 오이와 호박도 조금씩 따먹을 수 있었고, 쇠파리들도 한몫을 하려드는 장독대에서는 된장과 간장 익는 냄새가 풍겨나곤 했다.
때로는 장독대 돌판 끝에 앉아 책을 읽기도 했는데, 불현듯 그 풍경을 떠올리다 보면 핑 눈물이 돌기도 한다. 아, 어떻게 다시 그때의 그 풍경 속으로 돌아갈 수 있으랴. 이미 오래 전에 모두 사라진 풍경이 되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풍경들….
해마다 누런 콩을 삶아 절구에 찧어 메주를 뜨곤 했다. 어린 손으로 메주 뜨는 일은 고역이기도 했다. 메주덩이들은 한 동안 온돌방의 한쪽을 다 차지했고, 집 처마 밑과 재래식 부엌 천장에는 볏짚으로 묶은 메주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메주덩이들을 애지중지했고, 그 메주로 간장도 담그고 된장도 담그곤 했다.
모친이 매년 메주를 쑤어 간장 담그는 일에 열성을 기울이는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었다. 전주에서 신혼살림을 하다가 남편의 고향인 충청도 태안으로 이주를 해왔을 때 살림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하루는 어린 딸에게 간장종지를 주어 100미터쯤 떨어진 큰댁에 가서 간장을 얻어오게 했다.
모친은 간장을 얻으러 보내면서 큰 그릇을 들려 보낼 수는 없었다고 했다. 종지를 들려 보내면 큰 동서가 좀 큰 그릇에 담아 보내거나 종지에 담아 보내더라도 간장을 흘리지 않도록 종지를 다른 큰 그릇을 담아서 보내줄 줄로 예상했다고 했다.
그런데 큰 동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종지에다 간장을 담아서 어린것에게 들려 보냈다. 어린것이 간장종지를 들고 오면서 간장을 흘리지 않으려고 한 발 한 발 느릿느릿 조심조심 갖은 애를 다 쓰며 왔는데도 그만 간장을 거지반 흘려서 옷이 다 젓은 상태가 되었다.
어린것이 생고생을 하고서도 간장을 거지반 흘린 채 집에 들어서는 순간 모친은 큰 동서의 소견머리에 절망 같은 것을 느낀 나머지 어린 딸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는 간장을 얻어먹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모친이 담근 간장 맛이 썩 좋다는 말이 돌자 큰댁에서 우리 집 간장을 얻으려 내 사촌누이를 보냈다. 모친은 예전 생각이 나서 사무치는 바가 있었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간장을 보내지 않았다. 뚜껑도 있고 주동이도 있는 제법 큰 그릇에 간장을 담고, 그 그릇을 손잡이가 있는 바구니에 담아서 보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언젠가 한번 모친이 그 얘기를 했는데, 며칠 전에도 식사 자리에서 옛날 간장 얘기가 나오자 노친이 또 그 얘기를 했다. 그리고 노친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간장 담그는 방법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전통 방식으로 직접 간장을 담가 먹을 기회는 쉽게 올 것 같지 않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는 그게 가능치도 않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전통 방식으로 만든 '조선간장'이 있다(노친은 지금도 조선간장과 왜간장을 구분해서 부른다). 남산리 농가에서 사시는 사돈댁에서 보내준 간장이다. 7년 전에 가운데 제수씨가 세상을 뜬 이후로도 우리 집과 남산리 사돈댁은 꾸준하게, 서로 애틋한 심정으로 사돈관계를 잘 유지해오고 있다. 그래서 안사돈이 담근 조선간장을 우리 집에서도 해마다 받아먹는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아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남산리 사돈댁에서 온 조선간장을 음식 만드는 일에만 쓰지 말고 매끼니 종지에 담아 식탁 한가운데에다 놓고 먹자는 제안이었다. 일단 모든 음식을 싱겁게 만들어 먹되, 정 먹기가 힘들면 간장으로 간을 맞춰 먹자는 애기였다.
하지만 아내는 도리질을 했다. 당장은 어머니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당신 입맛에 맞지 않으면 투정을 하시고 외면을 하시니 어떻게 음식을 싱겁게 만들 수 있느냐는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간장종지의 자리를 옛날처럼 복원시키자는 내 제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밥상의 중심을 차지했었던 간장종지의 복원. 재미있고 뜻있는 표현일 것도 같다. 참으로 간장종지의 복원이 필요하지 싶다. 오늘날 영양상태가 좋은데도 많은 이들이 성인병에 걸리고 고생하는 것은 간장종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네 밥상에서 간장종지가 사라진 이후부터 많은 이들에게 건강문제가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밥상의 중심을 차지했었던 간장종지. 간장종지의 복원. 많은 이들이 깊이 생각해보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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