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주화인 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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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 학자인 김용만은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거래된 노비 151명의 몸값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노비는 일반적으로 5~20냥에 거래됐다. 이 돈이면 노비 본인과 그 자녀들을 대대로 고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주로 노비가 노동을 담당했다. 그러므로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 1명을 평생 고용하는 데 그만한 돈이 들었던 셈이다. 10냥이란 돈, 얼마나 큰 돈인가!
100냥이 넘는 가격에 노비가 거래된 사례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일반적인 노비 매매가 아니었다. 첩을 삼을 목적으로 여자 노비를 사는 경우였던 것이다. 고가에 거래된 노비는 십중팔구 첩이었다고 보면 된다.
경제학자인 이영훈과 박이택은 <농촌미곡시장과 전국적 시장통합, 1713~1937>이란 논문에서 경상도 경주의 쌀값 추이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쌀 1가마니의 평균 가격이 18세기 전반에는 0.8냥, 18세기 후반에는 0.9냥, 19세기 전반에는 1.1냥, 19세기 후반에는 2.9냥이었다.
경제학자인 전성호는 <18~19세기 물가 추세>란 논문에서 전라도 영암의 쌀값 추이를 조사했다. 이에 따르면, 1744~1850년에 쌀 1가마니의 최고 가격은 3.0냥, 최저 가격은 0.4냥이었다.
쌀값에 비해 노비 값이 너무 싼 게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조선시대의 인건비가 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쌀값이 오늘날에 비해 현저히 비쌌다고 생각하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판단이다.
땅값과 비교해 봐도, 조선시대 쌀값의 비중을 이해할 수 있다. 쌀값과 땅값의 비중을 시소에 비유하자면, 오늘날에는 후자 쪽으로 시소가 현저히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후자 쪽으로 약간 기울었을 뿐이다. 이 말은, 조선시대에는 쌀값의 가치가 오늘날과 달리 매우 높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쌀 1가마니가 '몇 냥'이었으므로, 그 몇 냥은 '지금의 20만 원도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쌀 1가마니의 가치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전제하에, 쌀 1가마니에 해당하는 '몇 냥'의 가치를 계산해야 한다. 정리하면, 조선 시대에는 쌀값이 엄청나게 비쌌고, 1가마니 사는 데 드는 '몇 냥'도 오늘날의 20만 원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말이다.
이런 연구 결과들을 보면, 주화 10냥이 얼마나 큰 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돈이면 값싼 노비 1명을 평생 부릴 수도 있었다. 또 시기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쌀을 몇 가마니나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조선시대의 쌀 1가마니는 오늘날과 달리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노비도 살 수 있고 쌀도 많이 살 수 있는 10냥. 그래서 웬만한 서민들한테는 '전 재산'이라고 할 수도 있는 10냥. 10냥의 가치가 조선 후기에도 이처럼 높았다면, <해를 품은 달>의 시대적 배경인 조선 전기에는 훨씬 더 높았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드라마 속의 연우는 그런 거액을 그저 껌값 정도로 생각하고 '화끈하게' 시장에 뿌렸다. 그깟 돈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그것도 땅바닥에 앉아서 관람하는 공연을 위해 거액을 아낌없이 던진 것이다.
인형극 한 번 보여주고 거액을 받거나 떡·과일 몇 개 팔고 거액을 챙기는 사극 속의 상인들. 거액의 돈으로 시시한 상품을 구매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는 사극 속의 서민들.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들의 상행위와 씀씀이를 지켜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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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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