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당사자가 아니니까 편하게 말할게요. 진상씨 친구 분 시 솔직히 별로예요. 아무리 아마추어라지만 이걸 시라고 썼을까요? 그 친구 그냥 본업에 충실하라 그러세요. 절대 시는 쓰지 말고요. 한마디로 초등학생들도 그렇게는 안 쓰거든요. 어디서 주워들은 말들은 있어서 온갖 폼은 다 잡고 열편도 채 읽어 보지 않았지만 하나 같이 시들이 그 모양이에요."
"저, 그, 그게, 그 시가 그렇게나 형편이 없단 말입니까?"
"형편없는 정도가 아니고 한마디로 유치해요. 진상씨가 그 친구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시는 절대 쓰지도 말고 남에게 보이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 그러세요. 웃음거리밖에 안 되니까요."
"하하하. 그럼 형수님, 그래도 그 친구가 시를 무지 쓰고 싶어 하는데 혹시 개선해야 할 점이나 보완해야 할 점을 좀 알려주시면 제가 전해줄게요.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나중에 잘 쓰게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나는 이런 경우, 함량 미달의 작품을 출품해 놓고 초조하게 지도편달을 바라는 문학도들에게 가해지는 신랄한 혹평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들은 내가 정기구독하는 문학잡지들의 독자투고란이나 문예지 등에서 의욕만 앞세운 '위험한' 신인 문학도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수두룩하게 넘쳐났다. 나는 또 알고 있었다. 문학을 꿈꾸는 자격 미달의 문학도들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가혹한 저주의 말들도 지면상에서는 면책 특권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의, 문학평론가들의 따뜻한(?) 충고는 겸허히 수용하고 앞으로의 장도에 쓴 약으로 삼을 일이었다.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분심을 품어서는 장차 쓸 만한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가망이 없었다.
그러므로 '시'같지도 않은 시를 내밀며 평가를 해달라는 그 누군가를 향해서, 나는 그 숱한 문학잡지에서 보았던 저주의 말들을 그대로 흉내내 쏟아 부었다.
"진상씨. 시는 이렇게 쓰는 것이 아녜요. 멋있는 단어만 어디서 주워대 나열할라치면 그냥 국어사전을 통째로 베끼라 하세요. 친구 분이 쓴 시 제목 중 '구름'이라고 있거든요. 그, <구름>에 나왔던 단어와 문장이 그대로 '그녀'에서 반복돼요.
그리고 <상갓집에서>라는 시에서는요, 나름 멋있다고 생각하는 표현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슬픔이 차마 목젖을 넘지 못하고'라는 표현이 행마다 거의 다 반복돼요. 구체적으로 다 지적하기는 힘들고, 어쨌든 이런 형편없는 시로 시집까지 묶을 엄두를 냈다니 그 친구도 참 무식하게 용감합니다."
"그럼 형수님. 그 <바람 부는 벌판에 홀로> 그 시는 어떻던가요? 그래도 그 시는 꽤 수준 있던데."
"푸하하하! 당연히 수준 있죠. 신동엽 시인이 만든 문장이니까요. 이 사람 아주 가지가지 하던데요? 글쎄 신동엽 시인의 시를 감쪽같이 일부 베껴놨어요. 누가 모를 줄 알고. 제가 쓰지는 못해도 책을 다섯 수레는 읽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신동엽은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 시인인데요. 아주 딱 걸렸죠."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진짜 직접 썼는데…. 그 친구가 말이에요, 그 친구가 그 시 쓸 때 제가 옆에 있었거든요. 진짜 직접 쓰던데…."
'가망 없는' 시인 지망생에게 독설을 퍼붓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자신이 감명 깊게 읽었던 글의 문장을 자신도 모르게 인용하다가 깜짝 놀라는 경우가. 명색이 시에 심취해 있다면 그 정도의 실수는 무의식적으로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의 시가 전혀 '가망'이 없다는 데 있었다.
"네. 그렇군요. 그 시들이 그렇게 형편없었군요. 아무튼 형수님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꼼꼼히 읽고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친구는 대책없는 문학병 중증이네요. 재능은 안 따라주고 의욕만 앞서서…. 안쓰러워 어쩌죠? 아무리 취미로 쓰는 거라지만 그런 시는 절대, 네버(never), 앞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비전이 없어요. 이제 그 친구 분한테 시 같은 거 긁적거리지 말고, 예술은 예술가들에게 맡기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 그러세요. 그것이 그 친구 위하는 길이니까. 근데 진상씨, 당사자한테 설마 이대로 전할 건 아니죠? 흐흐흐. 이런 말 본인이 직접 들으면 아마 충격으로 쓰러질 걸요? 흐흐흐. 그러니 살살하세요. 적당히 알아듣게. 흐흐흐흐."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시를 쓰는 친구 대리인으로 나에게 평가를 의뢰한 남편 후배에게 충분히 알아듣도록 악담을 해서 보냈다.
"오늘 진상이가 대체 당신한테 무슨 일로 찾아왔던 거야?"
"응, 당신도 좀 봐봐, 너무 웃겨. 진상씨 친구 중에 취미로 시를 쓰는 사람이 있대요. 그 친구가 쓴 시를 이렇게 뭉텅이로 들고 와서 나한테 평가를 좀 해 달라네요. 뭐 이런 쪽으로 어쩐지 내가 가장 잘 통할 거 같다나 뭐라나. 그런데 그 시가 너무너무 유치하고 형편없는 거예요. 눈이 아플 지경으로. 그래서 보고 느낀 대로 다 말해줬어요. 다시는 그 친구 시 같은 거 쓸 엄두 못 내게."
그런데 건네받은 시 뭉치를 한 장 한 장 살피던 남편의 얼굴이 점점 새파래졌다. 나중엔 손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사정없이 째려보는 것이었다.
"당신 설마. 아까 나한테 했던 말들, '발로 써도 이보단 낫겠다' '이 시를 보면 한글 창제한 세종대왕이 통탄할 것 같다' 그런 말들을 진상이한테 그대로 한 건 아니지? 그대로 말이야. 아까 당신이 했던 그 악담들."
"거의 비슷하게 했지. 진짜 솔직하고 제대로 평가해 달라고 주문했었대. 그 진상씨 친구가."
"당신 정말 그렇게 눈치가 없어? 이 시 진상이가 쓴 거잖아! 딱 보면 모르겠냐? 와! 돌겠네. 그렇잖아도 여린 녀석이 얼마나 상처 받았을까. 어쩐지 아까 터미널에서 전화 건 목소리가 완전 풀이 죽어 이상하다 했지. 그래서 그랬구나. 으이그, 이 천지분간 못 하는 악녀야."
솔직한 것이 최고? 때론 침묵이 나을 수도
그 말을 듣고 보니 나 또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충분히 진상씨가 그 시의 주인공이라는 확증들이 하나둘씩 그제야 떠올랐다. 대학교 때는 국악에 심취해 학업을 작파하고 절에 들어가 1년여를 보내며 식구들 애간장을 졸였다는 일도, 지금도 직업과는 하등 관계가 멀어 보이는 문화예술 관련 인사들과 더욱 친분이 두텁다는 것, 무엇보다 우리 집에 올 때면 책장 가득 놓여 있는 책들을 부러운 눈으로 흘끗거리던 일들…. 정말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남편 추측대로 그 시는 모두 진상씨 본인이 쓴 시였던 것이다.
나는 그런 청년의 순수한 시심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잔인한 말들을 한정 없이 쏟아 부었던 것이다. 아무리 취미로 시를 쓰는 아마추어라지만 순진한 문학도에게 그것은 저주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망이 없다니. 책을 다섯 수레나 읽었음 뭐하나. 순수한 문학청년의 치기 하나 받아들여 주지 못하고.
가망 없다니. 무엇을 성취하기 위한 가망이었더란 말인가. 아아! 나는 어쩐다고 그렇게 신랄한 말들을 여린 문학청년에게 가차 없이 퍼부어 댔을꼬. 그는 단지 시를 좀 쓰고 싶었을 뿐이다. 바쁘고 딱딱한 이공계열의 일상에 부드러운 시 한 편으로 위안받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인데.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솔직한 것만이 최고라는 덕목을 차선으로 삼았다. 차라리 거짓이, 속임수가 진실보다 더 인간을 구원하고 윤택하게 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타인에게 가차 없이 쏟아 붓던 말발을 자제하고 신중하고 조심하게 됐다. 도저히 감정 조절이 안 될 땐 차라리 침묵했다. 아마추어 시인 지망생에게 쏟아 부었던 악담을 계기로 내 언어는 순화과정을 거쳐 사용됐다.
그 일은 나에게 뼈저린 교훈으로 남았다. 그리고 다시 애정을 갖고 찬찬히 살펴보니 그의 시는, 진상씨 본인이 쓴 시는 그리 형편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세련된 언어의 조탁은 아니더라도 순수한 문학청년의 순정과 진정성이 느껴졌다. 오히려 지나치게 노련하고 난해한 기성 시인들의 시에 비해서 신선한 맛과 선명한 이미지가 만져지듯 다가왔다.
그렇게 실망해서 올라간 후에도 그들 부부는 고향에 올 때면 광주에 들러 우리 집에서 꼭 하룻밤을 묵고 갔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우리들 우정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는 말이다. 내가 자행한 언어의 폭력을 그는 모두 잊어버린 눈치였다. 그 일로 인한 서운함과 원망을 내비춘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자꾸 생계와는 무관한 일에 관심을 쏟아 가족들 불안을 조장하던 그가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런 것들과 완벽하게 단절한 채 건실한 생활인으로 돌아오게 된 점이었다. 그의 본업은 의사다.
삶이 예술인 그... 지금이 더 좋아요
지난해 서울에 갔을 때 우리는 당연히 그 후배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새로 이사한 지 몇 년째인데 드디어 형님 내외께서 자신들 집을 찾아줘서 너무 기쁘다며 미리부터 유명 맛집을 예약해놓고 우리를 환대했다. 음식도 푸짐하게 마련해 놓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 그 집 거실에서 3차로 캔맥주를 마실 때 술이 들어가 기분이 좋아진 그는 나에게 엉뚱한 자랑을 늘어놨다.
"형수님. 제가 어제 말입니다. 어떤 환자 손가락을 열일곱 바늘을 꿰맸는데 말이죠. 얼마나 감쪽같이, 정교하게 작업을 했는지 육안으로는 완전 다친 손가락 같지가 않는 거예요 이게. 손가락 부위에 열일곱 바늘이면 거의 찢어진 천 조각처럼 되기 십상인데, 제가 그걸 감쪽같이 기워 낸 겁니다.
완벽 그 자체였죠. 오늘 소독하며 보니까 회복도 빨라요. 수술할 때 상처 적게 남기고 신속하게 봉합했으니 당연 회복이 빠를 수밖에요. 환자가 또 얼마나 고마워한지 몰라요. 형수님은 잘 상상이 안 되실 겁니다. 사람 손가락에 열일곱 바늘이면 얼마나 예민한 작업인지. 어마어마한 정교함을 요하는 작업인데 그걸 제가 해냈다니까요. 형수님 그건요. 아! 거의 예술이었어요. 예술!"
술이 들어가 기분 좋아진 그는 벌건 얼굴로 같은 자랑을 반복하며 혼자 도취해 있었다. 나는 열일곱 바늘을 꿰맸다는 그의 자랑 뒤에 자꾸 옛날 일이 떠올라 혼자 웃음이 나왔다. 시를 떠난 그는 삶에서 또 다른 형태의 예술을 구현해 내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찬물을 뿌리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괜찮은 '의사 시인' 한 명 나올 수도 있었는데 당신이 망쳤다"며 그동안 남편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타박을 그 순간만큼은 부인하고 싶었다. 열일곱 바늘을 예술적으로 봉합했다는 그의 자랑 어디에도 과거 시를 쓰고자 했던 미련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젊은 전공의 시절, 그는 다만 시를 쓰며 조금 위안받고 싶었을 따름이었을 것이다. 응급환자를 서둘러 봉합하고 난 후의 보람을 만끽하기 위해서, 가망 없는 환자의 개복된 배를 다시 꿰매고 나서, 때론 사망선고를 내린 환자에게 하얀 천을 씌워주고 나서 그는 직원용 휴게실 의자에 앉아 남몰래 시를 썼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시를 잊은 그가, 열일곱 바늘을 예술적으로 꿰맸다며 자랑하는 현재의 그가 훨씬 더 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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