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이요? 제 인생의 내비게이션이죠"

[인터뷰] 족발 만드는 천하장사 박광덕

등록 2012.02.24 18:11수정 2012.02.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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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9월께 기자(왼쪽)가 찾았던 씨름선수 박광덕(중앙)의 천하장사 족발집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 박 사장은 손님들이 기념촬영을 요청할 때 마다 환한 웃음으로 기꺼이 함께 찍어 주고 있다.
작년 9월께 기자(왼쪽)가 찾았던 씨름선수 박광덕(중앙)의 천하장사 족발집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 박 사장은 손님들이 기념촬영을 요청할 때 마다 환한 웃음으로 기꺼이 함께 찍어 주고 있다. 이정민

올해 나이 마흔 하나. 약관의 나이에 모래판의 람바다로 명성을 날리며 씨름계를 평정했던 프로선수 박광덕. 1990년 프로무대 데뷔 후 백두장사(3회)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지만, 그에게 천하장사(준우승 5회) 타이틀은 끝내 쥐어지지 않았다. 불운이었을까. 박씨는 씨름계의 흥행 아이콘이라는 별명을 뒤로하고 이후 인생의 가장 큰 전환기를 맞이한다.


1996년 은퇴 선언 이후, 강호동의 뒤를 쫓아 연예계에 발을 디딘 그는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탁월한 유머 감각과 재치 있는 애드립(즉흥 연기)으로 단 번에 예능계를 들어 올렸던 박광덕. 이 덕분인지 예쁜 부인과도 함께 출연, 닭살스런 잉꼬부부 모습도 보여줬던 그는 한 순간에 쓰러진다. 

문제는 과욕이었다. 마냥 잘나갈 것 같았던 자신의 오기와 자만이 화를 부른 것이다. 연예계 방출, 지인들의 사기, 씨름 복귀 선언 후 이중계약 논란 등으로 자살의 위기까지 그를 내몰았던 것. 이후 그는 사업에 손을 대며 인생역전을 꿈꾸었지만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연이은 사업 실패에 빚만 늘어났다.

하지만 7전 8기라 했던가. 수많았던 참혹한 시련들이 그를 깨우쳐 주는 동기가 됐다. 그것은 바로 '(욕심을)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이후 그는 각종 행사와 카페, 밤무대, 식당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빚을 청산한다. 

그리고 새롭게 얻은 그의 타이틀은 족발집 사장님. 아직 2년밖에 안됐지만 그의 익살끼 넘치는 너스레와 족발 맛을 알아본 손님들은 20평밖에 안 되는 작은 식당을 연신 찾고 있다. 지난 2월 22일, 그를 식당에서 만나 근황을 들어봤다.

 콜라겐이 풍부한 족발은 여성 손님들에게 각별한 인기를 얻고 있다. 가격에 따라 한라장사 족발, 백두장사 족발, 천하장사 족발로 나누어 판매한다.
콜라겐이 풍부한 족발은 여성 손님들에게 각별한 인기를 얻고 있다. 가격에 따라 한라장사 족발, 백두장사 족발, 천하장사 족발로 나누어 판매한다. 이정민

- 족발 맛에 중독됐다는 사람이 많다. 특별한 맛의 비결이 있다면.
"(잠시 생각하다)주방 총괄실장이 더 잘 알겠지만, 무엇보다 냉동 안 된 생 족발이 중요하죠. 오래 알게 된 유통회사와의 거래 믿음으로 직접 확인해 골라 씁니다. 거기에 재료가 30여 가지가 첨가되고요. 특히 통째로 넣는 바나나와 오렌지는 비린내를 잡는 특효약입니다.


그날 준비한 재료는 몽땅 판매하지요. 그러다 한두 개 남으면 저희가 먹을 정도니까요(웃음). 모든 재료를 알맞게 배합해 맞춤형 족발이 탄생되는 거죠. 모양도 좋고, 맛은 분명하고, 영양가에 구색까지. 거기에 친절서비스는 덤이라고나 할까요. 이름 걸고 하는 장사인데 장난으로 하면 안 되죠."

- 단골손님이 많다고 들었다. 손님들이 계속 찾는 이유는 뭐라 생각하는가.
"손님들이 맛을 인정해줘요. 365일 변함없는 맛을. 단골 고객이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가 또 친구들이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셈이죠. 손님들이 맛있게 먹었다는 소리가 그저 행복할 따름입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 있잖아요. 그저 연예인이라는 타이틀로 부담만 주고 맛은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럴수록 더욱 신경 써야죠. 구파발에서 온 어느 손님은 입덧이 심한 신부에게 주려 왔다가 (문을 닫아)다른 족발 사갔다고 이혼하자고 했다 합니다(웃음). 저 같아도 그냥 다른 곳 갔을 텐데 그래도 갈 때는 '잘 먹었다'고 만족해하더라고요."

 천하장사 왕족발집 내부 전경. 식당 벽 곳곳에는 20년전 그가 왕성하게 씨름했던 모습들의 기사가 가득 붙어 있다.
천하장사 왕족발집 내부 전경. 식당 벽 곳곳에는 20년전 그가 왕성하게 씨름했던 모습들의 기사가 가득 붙어 있다. 이정민

- 내부 인테리어가 특별하다. 씨름 선수 시절의 인터뷰 기사가 즐비하다. 각별하게 이렇게 붙여 놓은 다른 이유는.
"20년 전 씨름 기사들이에요.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나도 한때는 이렇게 잘 나갔다', '나도 알고 보면 열정적인 프로선수였다' 등등. 즐거웠던 사연, 맘 아팠던 시절들을 돌아보는 하나의 추억영화죠. 기다리는 손님들 보면서 재밌어 하시기도 하고요."

- 혹시 팬들의 기억에서 잊히는 게 두려운 건 아닌가.
"절대 아닙니다. 성격 자체가 그래요. 20대 전성기 시절도 그러했지만 나를 안 알아준다고 서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오히려 알아봐 주는 게 창피할 정도였죠. 나름 쑥스러움을 잘 탔거든요. 오히려 숨어 다닐 정도였어요. 왜냐고요? 제가 그렇게 유명한 줄 몰랐었거든요."

- 요즘 건강관리를 따로 하나.
"해야죠. '자식이 용돈 드릴 능력되자 부모는 돌아가신다'라는 말이 있어서 부모에게 더욱 잘해드리고 있고요. 제 건강 관리는 솔직히 잘 못하고 있죠. 하루에 세 갑씩 피는 담배도 단번에 끊기는 어렵지만 줄여야죠. 예전엔 조기축구도 했지만 운동 그만두면서 많이 아프더라고요. 운동선수는 일반인보다 두세배는 더 아파요. 노화도 일찍 오고요. 운동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죠."

- 나이 마흔을 넘겼다. 이전 생활과 다른 느낌들이 있나. 책임감도 무게감도 많이 더해질 텐데.
"정말 그런 게 있어요. 요즘 느끼는 거지만 젊어서 버는 돈은 내 돈이 아니라는 걸 절감합니다. 또한 만병의 원인이 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젊었을 때 포부나 야망은 그때 뿐이더라고요. 성공 패턴에 따라 사는 사람은 몇 안 된다는 걸 배웠습니다.

한창 때는 한 방을 노린다는 생각보다 평소 준비하지 않았던 제 모습이 더욱 힘들었어요. 한 마디로 제 인생은 찌그러진 깡통이었어요. 밟아도 더 찌그러질 수 없는 깡통이요. 근데 이게 참 오묘한 게 누군가에게 또 발로 차였을 때 오히려 그때부터 조금씩 펴진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맘을 바꿨습니다. '남에게 돈을 빌리지 말자'는 철칙도 이때 생겼고요. 지금은 짜장면 하나 시켜먹을 때 탕수육 하나 더 시킬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됐지만, 내가 버는 진짜 돈의 의미를 생각하며 잘 쓰는 법을 고심하고 있습니다."

- 요즘도 씨름계 선후배들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지. 혹은 다시 씨름계로 들어가 후배양성이라도 할 의향은 없는지 궁금하다.
"연락을 가끔 합니다.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고요. 씨름 동문회가 있어 드문드문 여러 지인들을 만납니다. 프로선수 시절, 15명이 한 팀이다 보니 절친도 있잖아요. 그분들과는 서로 연락하면서 가끔 소주 한 잔씩 하며 회포를 풀기도 합니다.

후배양성이요? 당연히 의향은 충분히 있죠. 예전 씨름 그만두고 두 세군데서 지도자 요청이 왔었는데 거절했어요. 제가 그 구단 지도자로 감으로써 기존에 있던 코치나 감독이 그만둬야 되잖아요. 그게 싫었어요. 저 때문에 누군가의 자리가 빼앗기는 걸 차마 수용하기가 어려웠어요. 요즘 다 힘들잖아요. 하지만 그런 상황 아니고 대학팀이나 실업팀에서 요청이 온다면 꼭 하고 싶어요. 씨름 활성화 차원에서라도 말이죠. 그래도 아직 들배지기, 밀어치기, 빗장걸이 등의 기술은 여전합니다.(웃음)"

- 간단히 물어볼께요. 박광덕에게 씨름이란?
"(잠시 회상에 젖으며)저의 존재감 그 자체입니다. 아마 씨름이 아니었으면 박광덕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씨름과 박광덕은 삶의 존재를 이어주는 생의 고리인 셈이죠. 지금의 내 모습을 가르쳐 준 것도 씨름이었고, 씨름이 있었기에 박광덕 이름 석 자가 존재할 수 있었죠. 더불어 씨름판에서 람바다를 추지 않았더라면 많은 팬들이 기억해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웃음). 제 인생의 네비게이션이 곧 씨름입니다."

- 지인들의 사기, 여러 사람들과의 불행한 관계로 인해 많이 힘들었는데요.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이 수 억 원이지 그 돈 떼이고 안 죽은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한 아픔은 사람까지도 잃어버려야 했다는 겁니다. 이후로는 돈은 절대 빌리지도 않고 신중하게 사람을 대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또 말도 쉽게 내뱉지 않고 심사숙고하며 소통하려하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회 수업료 지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라도 긍정해야 지금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겠지요. 

이건 여담인데, 최고로 답답한 사람들은 '이민이나 가서 돈이나 벌어야지'하는 분들이에요. 그게 다 방송 탓이지요. 프로그램 보면 해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만 소개하다보니 혹 하고 떠나버리는 거죠. 제가 다섯 번 정도 강의에 초청돼 언급했던 말이 '프로'와 '선'이라는 말이었어요.

무얼 하더라도 프로정신으로 하되 절대 선을 넘지 않는 본분을 지켜야 한다고. 특히 잘난 체 하는 순간 공든 탑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는 말이죠. 진심이면 반드시 통하고 열정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최선을 다하는 모습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없으니까요."
#박광덕 #씨름 #천하장사 족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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