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사위만 자식이고 딸은 자식이 아니야?

아빠의 편지에 가슴이 아린 이유

등록 2012.03.23 11:05수정 2012.03.2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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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파트 경비실에서 등기 우편물을 찾았다. 대구에서 친정 아빠가 보내주신 연말정산용 의료비 영수증이었다. 하얀 봉투 겉면에 익숙한 아빠의 필체가 날아갈 듯 푸른 잉크로 쓰여 있었다. 참 잘 쓴 글씨였다. 일흔 중반도 한참을 넘어 이제 팔순을 바라보시니 외양에선 나이 드신 티가 역력하지만, 필체만큼은 여전하셨다.


그러나 그 멋진 아빠의 필체로 쓰여 있는 수신자 부분의 내 이름을 확인하자 여느 때처럼 가슴 한 쪽이 싸하게 아려왔다. 이 증상은 아빠의 손으로 쓰여진 우리 집 주소와 내 이름을 확인 할 때 마다 느껴지는 것이다. 거기엔 숨겨진 사연이 있다.

내가 결혼한 후 아빠는 우편물 겉봉에 내 이름이 아닌 남편 이름을 써서 보내셨다. 처음 한 두 해는 그러려니 했는데, 단 한 번도 내 이름으로 우편물을 보내지 않으시자, 점점 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딸 셋이고, 내가 맏딸이다. 딸을 시집 보내면 친정 아빠가 제일 아쉬워한다던 말은 우리 집과는 상관 없는 얘기였다. 내가 고향이 아닌 서울 외지에서 홀로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한 터라, 아쉬움 보다는 든든함이 앞서서 그러셨는지, 남들보다 10년은 더 늦은 나이에 본 자식을 결혼시키는 감격에 겨워서 그러신건지, 어쨌건 결혼식 내내 감정전달율 100% 인 아빠 얼굴에선 싱글벙글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웬 걸, 집안에 사위라고 하나,둘 남자가 생기자 그 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남녀 유별이 친정 집에서 유난해 지기 시작했다. 명절 때 친정을 찾으면 남자와 여자 상이 구분되기 시작했고, 술도 잘 못하는 아빠가 유난하게 사위들에게 술을 권했다. 그간은 눈치채지 못한 아들 욕심이 있으셨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결혼을 해서 친정과는 또다른 시집의 문화를 겪어보니, 상대적으로 친정의 분위기가 엄하고 가부장적인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친정에선 식사할 때도 어른이 숟가락을 들기 전엔 밥을 먹지 않았고, 어른용 밥그릇도 따로 있었다. 나는 여전히 친정부모님의 딸이었지만,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를 때의 딸과 결혼한 후의 맏딸노릇은 무척 다르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렇게 얻은 사위가 너무 좋아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한 집의 가장은 남자이니 딸네집에 보내는 우편물이라도 가장의 이름으로 적어야 한다는 아빠 시대의 발상에 충실하게 따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빠의 우편물 속 수신인은 항상 남편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빈정이 상해가기 시작했다. 혹자는 지나친 오해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생네 아들 돌잔치에서 아빠의 아들 미련을 확인하면서 내 막연한 짐작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울분이 갑작스레 엄마에게 쏟아졌다.


"아니, 아빠는 왜 딸 집에 우편물을 보내면서, 늘 사위 이름만 쓰신대? 딸은 자식이 아닌가?"

감정 섞인 내 발언은 엄마를 통해 곧바로 아빠 귀에 들어갔고, 아빠는 한 마디 언급도 없었지만, 그 후론 항상 내 이름으로 우편물을 보내주신다. 그런데 막상 내 이름으로 된 우편물을 받기 시작하자 애초 생각과는 달리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같은 말이라도 어른들 기분 좋을 때 농담처럼 한 마디 찔러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정색을 하고 섭섭하다 그랬던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았다. '뭐, 하긴 내가 달리 아빠 딸인가? 내 성격 역시 그대로 아빠다'하며 애써 위안하기도 해 보지만 신통치 않았다.


경비실에서 우편물을 찾으며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이런데, 아빠는 우리집에 편지를 보내며 겉봉에 이름을 쓸 때 마다 그 때를 떠올리며 딸의 서운한 감정을 되새김질 하진 않으실까? 그만한 불효가 어디 있나 싶어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괜스레 불편한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으로 생전 하지 않던 문자를 아빠에게 보냈다.

'아빠, 등기우편 보내신 거 잘 받았어요. 빨리 보내주셔서 고마워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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