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널리 알려진 책이다. 모든 역사란 과거에만 얽매여 있는 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밝혀주는 까닭이다. 그만큼 그 책은 카의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E. H. 카는 처음부터 역사학자로서 인생을 산 게 아니었다. 그가 학자로서 길을 걷기 전 영국의 외교관으로 일을 했고, <타임스>의 부편집인으로서 언론계에 종사한 적도 있다. 더욱이 도스토옙스키나 바쿠닌의 전기를 비롯해 게르첸과 같은 러시아 사상가들을 다룬 저작들도 많다. 외교관으로 재직할 당시 자본주의와는 다른 노선을 걸은 러시아에 흠뻑 젖어든 까닭이다.
외교관을 떠나 학자로서의 삶을 살 때 처음 관심을 둔 분야는 국제관계학이었다. 애버리스크위스의 '우드로 윌슨 기금교수'직에 임명된 그는 일본의 침략행위와 히틀러의 베르사유조약 폐기, 그리고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침공과 같은 복합적인 국제연맹의 질서들을 파헤쳤다.
그로부터 출발한 1939년의 초기 저작인 <20년간의 위기, 1919-1939>는 양차대전 사이의 국제관계에 대한 탁월한 분석서로 호평을 받는다. 물론 그것은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국제 질서의 필요성을 제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한편 1944년 52살에 집필하여 33년이 지난 85살에 완성한 14권의 <소비에트 러시아사>는 그의 위대한 역작으로 손꼽힌다.
카는 전기 작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양의 출판물 말고는, 1925년부터 1960년까지 쓴 비망록과(그 이후 기록들의 행방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얼마 되지 않은 육필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형편은 카의 삶을 백지 상태에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을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던 까닭이기도 하다.(10쪽)
이는 조너선 해슬럼의 <E. H. 카 평전>에 나오는 머리글이다. 카에 대한 일대기를 그려나가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토로한 것이다. 그만큼 그가 쓴 책들과 몇 몇 비망록 이외에는 그의 인생을 전반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해슬럼이 그를 아는 친인척들을 비롯해 그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까지 직접 찾아다니면서 그에 관한 사항들을 들으려 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18년 4월, 이제 카는 확실히 러시아 전문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다른 외무부 직원들처럼 러시아어에 능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암거래 단속국에서 러시아와 인접 국가들과의 관계를 다루는 북유럽과로 부서를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세 사람으로 구성된 팀의 막내로서 정치적 차원에서 볼 때 볼셰비키 혁명이 만들어낸 문제들을 처음으로 다루게 되었다. 나무지 두 사람은 '보통의 외무부 직원'이었다.(57쪽)
이는 캠브리지를 졸업한 카가 영국의 외교관에 임시적으로 발탁돼 수행한 일을 밝혀주는 내용이다. 물론 그로부터 20년 동안이나 외무부에서 일하게 될지는 카로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 카는 러시아의 물자가 외국으로 흘러가는 공급경로를 보호하고 있었다.이른바 경제전쟁을 수행하는 '암거래단속국(Contraband Department)'의 직원이 그의 일이었다. 물론 그가 수행하는 탁월함에 비해 러시아어가 뒤떨어져 결국 북유럽과로 옮겨가는 설움도 겪는다.
그러나 리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영국 공사관에서 근무할 땐 달랐다. 그는 전 남편에게서 얻은 세 자녀를 데리고 있던 '앤'을 만나 혼인하고, 막내아들 존까지도 새로 얻는다. 그 시절 그는 공사관의 따분한 업무보다 러시아어를 배우는 데 힘을 기울였고, 그것을 계기로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푸시킨,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등의 작품을 읽어나간다. 1929년 4월 런던의 외무부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도스토옙스키> 평전을 본격적으로 써나간다.
카는 이 자리에서 트레벨리언 강연을 되풀이하듯 다음과 같이 강조햇다. "역사가가 무엇인가를 중요하다고 여길 때, 그 기준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필연적으로 현재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움직이고 있고 학문의 대상으로 멈춰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현재 이 대학 강의 내용은 대부분 1914년 이전의 역사이다. 이런 강의는 지금도 여전히 서유럽, 특히 대영제국을 역사의 주인이라고 간주한다. 이런 상황은 말이 되지 않는다."(398쪽)
이는 63살의 카가 모교인 캠브리지 대학 트리니칼리지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개혁파교수들과 함께 '교과과정 개편'에 관한 제안서를 이사회에 제출한 내용이다. 그만큼 그는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거부한 학자였던 셈이다. 그걸 계기로 대학 당국은 미국학 연구를 비롯한 많은 근현대 연구자들을 충원했다고 밝힌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카의 인지도가 가장 급부상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가 책으로 나오기 전,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강연한 캠브리지 밀레인의 '트레벨리언 강좌'와, 그 강연 내용을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인 '이사야 벌린'의 공격은 카의 인지도를 끌어올리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그 전과는 확실하게 다른 대학당국의 개혁바람이 카의 인지도를 실제적으로 끌어올린 배경일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박원용 교수는 이 책이 카의 개인사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드러낸다. 그의 역작인 <소비에트 러시아사>가 담고 있는 그 의미와 비중에는 약하다는 뜻이다. 러시아사를 전공한 학자로서 보는 당연한 안목이지 않을까?
다만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카의 인생역정을 비롯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점철된 국제질서, 그리고 카를 중심으로 다룬 아놀드 토인비와 루이스 네이미어와 아이작 도이처와 이사야 벌린 등의 사상적 논쟁을 읽어나가는 데 너무나 좋았다.
E.H.카 평전 - 사회적 통념을 거부한 역사가
조너선 해슬럼 지음, 박원용 옮김,
삼천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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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왜 높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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