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온지 15년 만에 투표, 첫술에 배부르랴"

[현장] 4·11총선 재외국민투표 첫 날... 뉴욕, 청년층 40% 투표

등록 2012.03.29 19:03수정 2012.03.2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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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총선에서 처음 도입된 재외국민 투표가 28일 전 세계 107개국 158개 공관별로 차례로 시작됐다. 사진은 미국 뉴욕 한국총영사관 투표소에서 한 재외 유권자가 투표하는 모습. ⓒ 최경준




"지역구에 어떤 후보가 출마했는지 알고 계세요?"


28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 45번가 한국총영사관 1층, 투표소 안으로 들어서자 투표사무원이 밝게 웃으며 묻는다. 한국에서처럼 우편으로 후보자들의 홍보물을 받아볼 수 없는 재외 유권자들은 사전에 인터넷을 통해 후보자들과 정당의 공약, 정보 등을 스스로 찾아봐야 한다.

미국에 온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투표한다는 전국재(53·뉴욕·회사원)씨가 잠시 머뭇거리자, 투표사무원이 책상 앞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키며 "여기서 확인해 볼 수 있다"고 안내했다. 옆에 있는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 뒤 신분증을 제시하자, 앞에 있는 작은 프린터기에서 2장의 투표용지가 인쇄되어 나온다. 약 30cm정도 긴 것은 비례대표 투표용지이고, 짧은 것은 지역구 투표용지다. 투표사무원으로부터 2장의 투표용지와 노란색 회송용 봉투를 건네받고 기표소로 향한다.

기표를 마친 뒤 투표용지를 봉투에 접어 넣고, 봉투 입구를 단단히 봉했다. 투표함에 봉투를 넣은 뒤 투표소를 나온 전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랜만에 하는 투표여서 다소 생소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재외 유권자의 선택은?... "한미FTA 반대" VS "강력한 대북정책"

투표사무원이 투표용지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 최경준

4·11 총선 투표가 이미 시작됐다. 한국에서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직전인 28일, 전 세계 107개국 158개 공관에서 차례로 헌정사상 첫 재외국민 투표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 재외국민 투표는 뉴질랜드 오클랜드 분관에서 이날 오전 8시(한국시간 오전 4시) 시작돼 내달 2일 오후 5시(한국시간 3일 낮 12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최종 마감된다.


전체 재외선거권자(223만여 명)의 5.5%인 12만3571명이 사전에 투표자 등록을 마쳤으며, 중국이 8.1%로 가장 높고, 일본 4%, 미국 2.7% 순이다. 재외국민 투표에 드는 비용은 모두 293억 원이다. 재외국민 1명의 투표에 23만7110원의 국고가 소요되는 셈이다. 국내 유권자(3885만 명) 1인당 비용(6983원)에 비하면 34배가 더 투입되는 셈이다.

사전에 투표하겠다고 등록한 재외국민 유권자가 4600여 명인 뉴욕 투표소는 대체로 한산한 분위기 속에서 교민·주재원·유학생 등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이날 오전에는 주로 고령층이 투표에 참여한 반면 오후로 접어들면서 직장인이나 유학생 등 청년층의 투표 참여가 눈에 띄게 늘었다. 뉴욕 주재 선관위에 따르면 이날 투표를 마친 재외국민 유권자는 모두 193명이며 이들 중 약 40% 이상이 40대 이하 젊은층인 것으로 파악됐다.

전국재씨는 "재외국민 선거에 투입된 비용에 비해 투표 등록률이 저조하기는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 않느냐"며 "한국 정치 흐름에 따라서 분명히 대선 때는 투표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많은 교민들이 한국 정치에 무관심한 척하지만 그냥 척일 뿐"이라며 "한국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클 뿐이지 관심이 없는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정치 개혁은 하루아침에 될 수 없다"며 "개혁을 확실히 지향하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밝혔다.

김병주(43·뉴저지·사업)씨는 "북부 뉴저지에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투표하러 오기가 어렵다"며 "투표 장소를 늘리고 투표 시간도 연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의 가치를 높이고,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투표했다"며 "한미FTA 반대, 경제 민주화, 재벌 감시 등을 투표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미국에 온 지 20년 됐다는 황종원(62·뉴욕·무직)씨는 "그동안에 투표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앞으로는 한국 정치에 더욱 관심을 많이 갖게 될 것 같다"며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북한과 거리를 두고 강경한 대북정책을 펼 수 있는 정당에 투표했다"고 말했다. 박민규(30·뉴욕·유학생)씨는 "국민의 의무를 다 한 느낌"이라며 "공약의 실현가능성, 후보의 과거 전력, 군복무 이행 여부, 세금 납부 여부 등을 기준으로 후보자와 정당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28일부터 4·11 총선 재외국민 투표가 시작됐다. 김경미(가운데)씨가 페이스북 친구인 구본정(왼쪽)씨, 박원영씨와 함께 투표를 하기 위해 뉴욕 한국총영사관 투표소를 찾았다. ⓒ 최경준


뉴욕에서 영화 제작 일을 하는 김경미(35·뉴저지·영화PD)씨는 페이스북 친구인 구본정(40·뉴저지·예술가)씨, 박원영(43·뉴욕·사업)씨와 함께 투표소를 찾았다. 김씨는 "제가 아직 영주권자인 이유는 미국시민보다는 한국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이 더 강하기 때문"이라며 "재외국민 투표를 통해 해외에 나와 있는 젊은 친구들이 더욱 정치의식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본정씨는 "몸은 나라 밖에 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한국 뉴스부터 검색할 정도로 관심이 많다"며 "한국 소식을 볼 때마다 항상 화가 나고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작지만 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박원영씨는 "아무리 판을 만들어줘도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스스로 우리의 힘을 축소시키는 꼴이 된다"며 "올 초 뉴욕에 '혁신과 통합'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특정 후보나 정당 지지 활동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를 통해 적극적인 투표 참여 운동을 벌여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투표함에서 금고로 옮겨진 193장의 봉투

오후 5시 투표가 마감되자, 투표사무원들이 투표함을 열고 안에 담겨 있던 회송용 봉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투표사무원들이 봉투의 개수를 세고, 참관인들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투표함에서는 모두 193장의 봉투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자, 회송용 봉투는 흰색 포대자루에 담겨 다시 봉합됐다.

회송용 봉투는 투표가 마감되는 내달 2일까지 한국 총영사관 금고에 보관했다가 항공편으로 국내에 보내진 뒤, 다시 해당 시군구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보관하다가 총선 당일인 내달 11일 투표 마감 후 개표할 예정이다.

4·11 총선에서 처음 도입된 재외국민 투표가 28일 전 세계 107개국 158개 공관별로 차례로 시작됐다. 미국 뉴욕 한국총영사관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감한 뒤, 참관인들이 투표함을 열고 투표용지가 담긴 회송용 봉투를 확인하고 있다. ⓒ 최경준


선관위 측은 평일보다 주말에 더 많은 재외국민들이 투표에 참여할 것으로 전망했다. 진승엽 뉴욕재외선거관은 "첫날 당초 예상보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외국민들이 투표에 참여해주셨다"며 "앞으로 남은 닷새 동안 더 많은 재외국민들이 투표소를 찾아줄 것을 기대하고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외국민에 대한 참정권 부여라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을 통한 투표 참여율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영주권자의 경우 선거인 등록과 투표를 위해 먼 거리에 있는 공관을 두 번이나 방문해야 하는 점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재외국민 투표가 너무 일찍 시작되는 바람에 재외 유권자들은 후보·정당의 정책과 공약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고, 후보자들도 재외국민을 상대로 한 선거운동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진승엽 선거관도 "중앙선관위는 이번 재외국민 선거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점, 특히 투표 참여 편의성 등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권에 지속적으로 개선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4.11 총선 #재외국민선거 #재외국민투표 #투표소 #한미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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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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