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요구에 모욕감 '울컥'... 정말 너무합니다

'간단한' 서명조차 힘겨운 장애인들, 대책이 절실하다

등록 2012.04.19 09:58수정 2012.04.19 09:58
0
원고료로 응원
서울 목5동에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인 강아무개(37)씨는 지난 3월 말 주민자치센터에 들렀다가 분통을 터뜨려야 했다. 개인적 필요에 의해 주민등록등본과 인감증명서 등을 발급받아야 했는데, 담당 공무원의 꽉막힌 업무처리 때문이었다. 문제는 민원서류를 발급받는데 필요한 본인 확인 절차에서 불거졌다. 주민자치센터 직원이 본인 확인 절차에 필요한 서명을 반드시 본인이 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아서였다.

"제가 중도에 실명해 글자는 알고 있지만, 글자를 써본 지 오래돼 글씨가 삐뚤빼뚤 하거든요. 저는 어릴 때 왼손잡이였어요. 어른들이 오른손을 사용하라고 자꾸 말씀하셔서 오른손을 사용하게 됐지요. 덕분에 오른손 필체는 더욱 엉망이 됐고요. 그래서 남에게 초등학생 같은 글씨를 보여주기 꺼려집니다.

주민자치센터 직원에게 서명 대신 지장을 찍으면 안 되는지, 아니면 동행한 누나가 대신 서명을 하면 안 되느냐 문의했습니다. 또, 누나가 제 손을 잡고 쓰면 안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담당 공무원은 무조건 안 된다며 '서명은 반드시 본인이 해야 한다'고만 했습니다."

"본인 서명만 하라고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무조건 본인 서명을 강요하면, 서명을 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지는 영화 <토탈 이클립스> 중 한 장면. ⓒ 우일영상


결국 강씨는 삐뚤빼뚤한, 그래서 남에게 결코 보여주기 싫은 글씨로 서명을 해야만 했다. 강씨의 이런 경험은 이번 뿐만이 아니었다. 강씨는 자신이 오랫동안 이용해오던 한 은행에서 신용카드를 발급 받기 위해 방문했을 때도 유사한 일을 겪었다.

은행 측은 "신용카드 신청서에 서명은 매우 중요하므로 본인이 해야 한다"며 한사코 강씨의 신청서 접수를 거부했다. 강씨는 이후 거래 은행을 바꿨다. 하지만, 이런 일은 바뀐 은행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통장을 개설할 때나, 신용카드를 만들 때, 대출을 받고자 할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서명 문제가 강씨를 괴롭히고 있다. 강씨는 다음과 같이 하소연했다.

"서명이라는 게 어떤 행위에 대해 본인을 증명하고 이에 동의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본인을 확인하고 담당자가 본인의 의사를 확인한 후 대필을 하거나 지장 또는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본인 서명'만을 강요하면 서명을 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사람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강씨처럼 그나마 글씨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은 편인지 모른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의 경우, 특수학교에서 일반 문자가 아닌 점자로 문자를 익힌다. 그렇기 때문에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은 문자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엔 서명을 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장애인 대필 서명 가능 여부는 창구 직원 마음?


확인결과, 창구 직원이 누구냐에 따라 각기 다른 기준이 적용되고 있었다. 이미지는 영화 <수상한 고객들> 중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지난 17일, 강씨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주민자치센터 민원서류 담당 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서명이 어려운 사람의 경우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해당 부서의 한 공무원은 "공무원이 입회한 상태에서 동행인에게 위임 사항을 확인한 후, 동행인이 대필 하거나 대신 서명을 하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같은 주민자치센터의 또 다른 공무원은 규정을 확인한 뒤 "본인이 사인하는 것이 기본이고 만약 이를 이행하기 힘든 상황이면 무인을 찍도록 돼 있다"며 "도장은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같은 주민자치센터에서도 공무원마다 민원서류 발급에 대한 설명이 다른 것이다. 기자는 강씨가 당한 일에 대해 묻자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서명의 문제는 시각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거나 손이 절단되는 등 신체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경우 서명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경우 보완책이 필요한데 현재는 이런 경우에 대한 방법이 별로 없는 상황. 목5동 주민자치센터의 경우처럼 창구 담당 직원의 재량에 따라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손글씨 요구에 모욕감 느낄 때도 있어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누리집 '넓은마을' 첫 화면. 시각장애인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끔 텔넷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 넓은마을 누리집 갈무리


이런 일이 일상생활에 그저 불편을 초래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다행일지 모른다. 또 다른 시각장애인 A씨는 지난 4·11 총선 당시 겪은 내용을 시각장애인 통신 공간 '넓은마을' 자유게시판을 통해 털어놨다.

A씨는 지난 4월 12일 치로 게시된 자신의 글에 "투표 당시 명부에 서명을 대신해 도장을 사용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고 적어놨다. 서명 문제가 일상 생활의 불편이 아니라 참정권이라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당할 수도 있는 순간임을 밝힌 것.

또, A씨는 같은 게시글에서 "오늘(4월 12일) 은행을 방문해 보니 통장을 만들 때 서류작성도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 직원이 대리 작성할 수 없으니 내게 전화번호와 주소 등을 적게 했다"며 "내가 전맹(全盲)이기 때문에 글씨가 좋지 않은데, 이런 요구를 받으면 매번 하는 일임에도 부끄럽고 때로는 모욕감도 느낀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잘 적어도 부끄럽고 걱정되는 판국에 수치스럽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며 "개선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명, 모두에게 단순한 절차는 아닙니다

신경호 기자가 사용하고 있는 '사인 가이드'. 미국에서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제품이다(2009년 미국서 구입). 가운데 서명을 할 수 있는 공간에 맞춰 서명을 하면 된다. ⓒ 신경호


이런 시각장애인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서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 관악구에 있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산하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나만의 사인(서명·Sign) 만들기'란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권수진 사회복지사는 "처음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같은 센터의 시각장애인 직원으로부터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보다 훨씬 서명 문화가 정착된 미국에서도 시각장애인들이 서명을 하기가 어렵다고 해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현재 '사인(Sign) 가이드'라는 도구를 제작해 시각장애인들에게 배포하고 필요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사인 가이드란 쉽게 말해 카드 크기의 도구 안에 서명을 할 수 있는 구멍을 만든 것이다.

권수진 사회복지사는 "시각장애인들이 서명을 해야 할 때 이를 제시하면 주위에서 서명이 필요한 위치에 사인 가이드를 맞춰 줄 수 있다"며 "그렇게 하면 쉽게 서명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인(Sign) 만들기 프로그램의 교육 내용은 한글과 알파벳, 나의 이름 한자 모양익히기, 쓰기 연습, 나만의 멋진 서명 완성 등으로 구성돼 있다"고 덧붙였다.

서명은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절차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간단하고 단순한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일반 문자를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또는 초등학생 같은 삐뚤빼뚤한 글씨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런 서명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도 있다. 개인정보 보호가 강화되면서 이같은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작은 절차에도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니 불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별도의 방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는 방법으로, 그러면서도 장애인이 인정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일본전문 JPNews(www.jpnews.kr)에도 송고 됩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송고를 허용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일본전문 JPNews(www.jpnews.kr)에도 송고 됩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송고를 허용합니다.
#시각장애인 #개인정보 #사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자는 1급 시각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과 그 삶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을 기사화하고 싶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김 여사 성형' 왜 삭제? 카자흐 언론사로부터 답이 왔다
  2. 2 [단독] 순방 성과라는 우즈벡 고속철, 이미 8개월 전 구매 결정
  3. 3 해외로 가는 제조업체들... 세계적 한국기업의 뼈아픈 지적
  4. 4 돈 때문에 대치동 학원 강사 된 그녀, 뜻밖의 선택
  5. 5 "모든 권력이 김건희로부터? 엉망진창 대한민국 바로잡을 것"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