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안수길, 왜 주목받지 못했을까

병마와 싸우면서도 작품을 놓지 못한 학같은 소설가 안수길을 평가하다

등록 2012.04.28 16:05수정 2012.04.2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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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길  이광복 소설가는 안수길 선생은 목숨을 걸고 작품을 쓰신 학 같은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안수길 이광복 소설가는 안수길 선생은 목숨을 걸고 작품을 쓰신 학 같은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학섭

지난 27일,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제34회작품토론회가 있었다. 매월 실시하는 이번 토론회는 '북간도'를 비롯해 '제3인간형'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한 안수길의 문학과 생애를 재조명하는 시간이었다. 주제 발표에 앞서 정종명 문협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목동 사옥으로 이사온 후 처음으로 실시하는 작품 토론회여서 뜻이 깊다고 말하고 앞으로 한국 문학 활성화를 위해서 문학특강과 토론회를 병행 더욱 내실있게 발전 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어서 토론자 이광복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는 지난해는 안수길 선생 100주기가 되는 해였고 또 가족들의 염원인 '안수길전집'이 발행된 뜻깊은 해였다며 금년 4월 18일이 안수길 35주기념일이어서 이번 작품토론회는 뜻이 있는 행사라고 말했다.


안수길 선생은 우리 문단에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동시대 작가들에 비해 평가에 인색함을 보여 주었다고 강조했다. '북간도'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높이 평가 하고 있으면서 그외 다른 작품들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며 이는 형편성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남한 출신 작가들은 똘똘 뭉쳐 기득권을 누리는 가운데 대학강단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으나 안 선생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안 선생은 월남한 작가인데다 이곳에 특별한 연고가 없고 한때 대학강단에 선 일이 있지만 그것 역시 잠시 였다며 평생 전업 작가로만 살았기 때문에 문학에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조명을 받지 못하는 이유라고 주장했다. 

소설같은 그의 삶

안수길은 1911년 음력 11월 3일, 함흥에서 부친 안용호 선생, 모친 김숙경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6년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했으나 1927년 일제에 항거하는 동맹휴업을 주도 자퇴하게 된다. 1928년 서울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했으나 다음해인 1929년 광주학생 의거가 발생하여 안수길은 이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15일간 구류를 산다. 이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1931년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했으나 부친의 병환으로 급거 귀국한 후 가정형편으로 학교에 돌아가지 못하고 1932년 용정에서 천주교 계통의 소학교인 해성학교에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안수길은 어렸을 때 백일해를 앓은 후 몸이 쇠약해 1933년 건강회복을 위해 해성학교를 사직하고 흥남 석왕사에서 요양한 뒤 용정으로 돌아온다.


1935년 동창생 김현숙에게 '나는 문예에 재주가 있는 것 같은데 건강이 문제다. 도와주면 고맙겠다'라고 말해 김현숙이 승락하자 결혼하여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부인 김현숙씨가 열심히 내조하여 그해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적십자 병원장' 콩트 '붉은 목도리'를 응모해 당선된다. 

안수길  왼족이 이광복 소설가 맨 오른쪽이 안수길 소설가의 셋째 아들 안병찬 씨, 토론회가 끝난 후 차를 마시며 환담하고 있다.
안수길 왼족이 이광복 소설가 맨 오른쪽이 안수길 소설가의 셋째 아들 안병찬 씨, 토론회가 끝난 후 차를 마시며 환담하고 있다. 김학섭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지만 그의 문학 정열은 멈추지 않는다. 1953년 단편 '제3인간형'을 발표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에 근무하면서 '먼 후일,' 첫 창작집 '북원' 제2창작집 '제3인간형'을 발간한다. 이 창작집으로 1955년 아시아자유문학상 수상하게 된다. 같은 해 '초련필담' '화한' '먼 후일' '소년수호지'를 출간한다.


이후에도 병마는 안수길을 계속 괴롭힌다. 1956년 건강악화로 잡지 신문에 연재하던 소설을 모두 중단하고 서라벌예대 창작학과장직까지 사임하게 된다. 이때 안수길은 파스칼의 '신음하면서 탁구하는 자만을 시인할 수 있다. 이 명구를 좌우명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1959년 사상계 '북간도' 제1부를 발표하고 1961년 제2부 1963년 제3부, 1967년 제4부 제5부를 전작으로 완성하게 된다. 작품의 내용은 이한복 일가의 4대의 삶이 광할한 북간도를 주 무대로 웅대하게 펼쳐진다. 두만강 건너 만주로 이주한 우리 겨례의 피눈물나는 이야기를 '북간도'를 통해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했고 최일수는 한국현대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수작이라고 논평했다. 이후 안수길 문학을 이야기 할 때 '북간도'는 빠지지 않았다. 국제펜클럽한국본부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안수길은 첫창집 '북원'에서 '북간도'에 이르기까지 쉬지않고 달려왔다. 

문학이 좋아서 문학을 했고 쓰기 좋아서 써왔다는 안수길은 어떻게 사느냐가 그의 문학의 일관된 화두였다고 한다. 작가로서의 고뇌는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정직하고 탐욕이 없고 매사에 자상하고  다른 사람을 자기의 살점같이 아끼고 인품이 고매해 그를 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1977년 봄, 대수롭지 않은 감기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종암동 자택을 나설 때 마지막 길인지도 모르고 원고지와 만년필, 잉크를 가지고 갔다니 그의 작품에 대한 집념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병이 악화돼 그해 4월 18일 향년 67세로 안수길의 고된 문학작업은 끝이 나게 된다.

토론자 이광복 소설가는 말미에 안 선생은 목숨을 걸고 작품을 쓰신분이라며 안 선생은 살아 생전 열심히 활을 쏘았습니다. 화살이 너무 빨라 가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안 선생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노래의 방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떠난지 35년. 이제 선생의 노래와 화살은 '안수길전집'으로 묶여 있다며 토론을 끝냈다.

이날 토론회 자리에는 안수길 셋째 아들인 안병찬 씨가 참석해 토론회를 지켜보았다.
#안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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