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길 왼족이 이광복 소설가 맨 오른쪽이 안수길 소설가의 셋째 아들 안병찬 씨, 토론회가 끝난 후 차를 마시며 환담하고 있다.
김학섭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지만 그의 문학 정열은 멈추지 않는다. 1953년 단편 '제3인간형'을 발표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에 근무하면서 '먼 후일,' 첫 창작집 '북원' 제2창작집 '제3인간형'을 발간한다. 이 창작집으로 1955년 아시아자유문학상 수상하게 된다. 같은 해 '초련필담' '화한' '먼 후일' '소년수호지'를 출간한다.
이후에도 병마는 안수길을 계속 괴롭힌다. 1956년 건강악화로 잡지 신문에 연재하던 소설을 모두 중단하고 서라벌예대 창작학과장직까지 사임하게 된다. 이때 안수길은 파스칼의 '신음하면서 탁구하는 자만을 시인할 수 있다. 이 명구를 좌우명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1959년 사상계 '북간도' 제1부를 발표하고 1961년 제2부 1963년 제3부, 1967년 제4부 제5부를 전작으로 완성하게 된다. 작품의 내용은 이한복 일가의 4대의 삶이 광할한 북간도를 주 무대로 웅대하게 펼쳐진다. 두만강 건너 만주로 이주한 우리 겨례의 피눈물나는 이야기를 '북간도'를 통해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했고 최일수는 한국현대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수작이라고 논평했다. 이후 안수길 문학을 이야기 할 때 '북간도'는 빠지지 않았다. 국제펜클럽한국본부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안수길은 첫창집 '북원'에서 '북간도'에 이르기까지 쉬지않고 달려왔다.
문학이 좋아서 문학을 했고 쓰기 좋아서 써왔다는 안수길은 어떻게 사느냐가 그의 문학의 일관된 화두였다고 한다. 작가로서의 고뇌는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정직하고 탐욕이 없고 매사에 자상하고 다른 사람을 자기의 살점같이 아끼고 인품이 고매해 그를 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1977년 봄, 대수롭지 않은 감기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종암동 자택을 나설 때 마지막 길인지도 모르고 원고지와 만년필, 잉크를 가지고 갔다니 그의 작품에 대한 집념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병이 악화돼 그해 4월 18일 향년 67세로 안수길의 고된 문학작업은 끝이 나게 된다.
토론자 이광복 소설가는 말미에 안 선생은 목숨을 걸고 작품을 쓰신분이라며 안 선생은 살아 생전 열심히 활을 쏘았습니다. 화살이 너무 빨라 가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안 선생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노래의 방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떠난지 35년. 이제 선생의 노래와 화살은 '안수길전집'으로 묶여 있다며 토론을 끝냈다.
이날 토론회 자리에는 안수길 셋째 아들인 안병찬 씨가 참석해 토론회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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