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각 안내문, 꼭 읽으며 다녀야 참된 역사여행

의성여행 (37) 단밀면 정려각

등록 2012.05.19 14:46수정 2012.05.1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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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루에서는 줄곧 낙동강을 보았다. 관수루 자체가 낙동강을 바라보라고 지은 정자이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길을 떠나야 한다. 관수루 아래를 흐르는 낙동강을 타고 천천히 노을이 밀려오는 낌새에 마음이 다급해진다. 아직도 단밀면 안에는 둘러볼 곳이 여럿 남았으니 시간이 없다.

관수루를 내려와 단밀면의 '땅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비로소 땅 위를 걷는 느낌을 맛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멈춰서야 한다. 오른쪽에 정려각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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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효부각 ⓒ 정만진

안동권씨 효부각
효부(孝婦) 권목월(權木月)은 1887년 안동인(安東人) 권대섭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품과 행신이 단정하여 널리 칭찬을 받았다.

남원인(南原人) 양종기(梁宗基)와 혼인한 후에는 시어른을 극진히 모시고 가업을 잘 보살폈다.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워지자 늘 거처를 깨끗하게 돌보고 수저질도 해드려 널리 소문이 났다. 집이 어려웠으므로 낙동강의 어부들이 버리는 치어(穉魚)를 주워와 장만하여 시어머니께 반찬으로 드렸고, 말려서 오랫동안 먹을거리로 썼는가 하면, 철따라 야생 채소류들을 거두어 시어머니의 입맛을 돋우는 데 힘썼다. 이에 남편 양씨도 남의 집 품팔이를 다니면서 값진 담배를 얻어와 어머니께 드렸다.

셋째며느리인 그녀가 시어머니가 87세에 돌아가실 때 남달리 극진히 효성을 다한 소문은 의성군수에게 전해져 표창이 내려졌고, 유도회 비안지부에서 비각 건립을 주도하였다.

길가에 정려각이 있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답사자들이 많다. 그래서는 진정한 역사여행, 문화유산 답사자가 못 된다. 또는, 정려각 앞에 잠깐 서기는 하지만 안내판을 건성으로 읽기도 한다. 그 또한 옳지 않다. 우리가 무심코 정려각들을 보지만, 내용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들은 사실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가. 어렵고 안타깝게 살다가 떠나간 그 분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반성할 것과 본받아 실천할 일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정려각 앞에서 답사자가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정려각의 안내문들을 모두 옮겨서 적어본다. 진정성을 가지고 글을 모두 읽었다는 증거를 나 자신에게 남기려는 것이다. 또 독자들에게 답사의 내용을 온전히 전달해내는 장점도 발휘할 수 있다.)


다행히 이 정려각은 답사자의 마음에 조금의 위안을 준다. 그녀의 이름이 세 글자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옛날의 여성들은 웬만해서는 성씨만 남고 뒤의 이름은 없는데, 안동권씨 이 분은 권목월 세 글자를 모두 남기고 있다. 그녀의 이름 석자가 역사에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권목월 님의 명복을 빌면서, 그 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

조금 더 나아가니 이번에는 길 왼쪽 산비탈에 정려각이 또 있다. 작은 논이 하나 있고, 그 너머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길가에서는 안내판을 읽을 수 없다. 한창 자란 벼들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돌아 정려각까지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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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문 효자각 ⓒ 정만진

김동문(金東文) 효자각
1900년 단밀면 생송리 생물마을 출생 김해인(金海人) 귀하(貴河)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쓰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사람들의 칭찬을 들었다. 온순한 성품에 어버이의 뜻에 순종하였으며, 효행도 남달라 끼니마다 반찬이 없는 경우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어머니를 모실 때에도 효행은 한결 같았고, 한방에 기거하는 어머니가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으며, 하는 일마다 어머니께 여쭙고 실행하였다.

80 노모가 앞을 못 보게 되었을 때에는 업고 다니고 손을 꼭 잡고 다니면서 조금도 어려움이 없도록 하였으며, 언제나 옆을 지키면서 부름에 따라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1965년 어머니가 87세로 별세하자 70 노구에도 3년 동안 어머니의 묘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하였다.

그의 남다른 효행을 문중과 비안향교에서 알고 표창하였으며, 1971년 돌아가신 뒤 1982년 효자각이 세워졌다. 

조금 전에 본 권목월 님의 비각 안내판에도 있었지만, 이곳 역시 끝 부분은 '권세와 물욕에 집착하는 현실의 세태를 돌이켜보면 효의 길을 스스로 지켜 이 땅에 맥을 잇게 한 귀감(龜鑑)은 우리의 삶에 경종(警鐘)을 울린다. 의성군수'로 되어 있다. 시대가 변해 부모, 형제, 친구 사이에도 참된 사랑이 남아 있는지 의심스러운 세태를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김동문과 같은 분들을 보며 스스로의 잘못을 돌아보며 놀라는[警] 반성의 소리[鍾]를 듣는 마음을 가지자는 뜻이다. 옳은 말이므로,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본다.  

관수루를 떠난 지 10분도 채 안 되었고, 그 사이에 벌써 두 개의 정려각을 보았는데, 김동문 효자각에서 1km 거리에 또 정려각이 나타난다. 권상두 효자각이다. 효자각 앞에 서면 폐교가 된 왕년의 단밀초등학교 울타리가 마을 뒤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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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두 효자각 ⓒ 정만진

권상두(權相斗) 효자각    
1870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부모 공양에 빈틈이 없었고, 커서는 먼 길을 갈 때나 돌아와서 반드시 부모에게 말씀을 올렸다. 또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니 그가 모범이 되어 마을의 교풍(敎風)에 큰 영향이 미쳤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3년간 묘를 지키면서 하루 세 번 옷자락에 피눈물이 흐르도록 울었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지켜주었다. 그 후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려운 형편에도 아버지를 잘 모시기 위해 날마다 짚신을 삼아 내다팔아 장날마다 반찬을 준비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밤에도 (급하면 빨리 의원을 모시러 가야 하므로) 옷끈을 풀지 않고 지냈다. 돌아가셨을 때에는 일제가 개인 묘소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묘지에 모시고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지켰다. 그 3년 세월을 큰 구렁이가 나타나 보호해 주었다.

효행이 널리 알려져 표창을 받았고, 1926년 11월 효자각이 세워졌다. 1993년 의성군청의 지원과 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보수하였다.

어린 권상두가 모범을 보이자 마을의 분위기가 그렇게 따라갔다는 대목이 특히 가슴에 와 닿는다. 개인의 버릇을 '습관'이라 한다. 나라 등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된 습관을 '관습'이라 한다. 한 개인의 모범적인 '습관'을 그와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본받으면 그것은 '관습'으로 발전한다. 우리는 권상두의 예를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권상두 효자각에서 몇 백 미터를 더 갔는지,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또 효자각이 나타난다. 이렇게 효자각이 많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물론 좋지 않은 뜻으로 단밀면을 '다르다[異]'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두 개의 눈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이상한' 괴물 취급을 받지만, 효자가 유난히 많다는 것은 누가 보든 좋은 일이므로, 단밀에 정려각이 많은 것을 두고 나쁜 의미로 해석할 사람은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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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숭 효자각 ⓒ 정만진

김종숭(金鍾崇) 효자각
1856년(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특별한 음식이 생기면 부모님께 드리고 기이한 일을 보아도 꼭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늘 가까이서 모시면서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으나 (종숭이) 13세에 별세하시고 말았다. 다시 어머니가 병을 앓게 되자 약해지실까 걱정하여 몰래 고기를 나물 속에 넣어서 드렸지만 결국 토해내고 채식만 하였다. 3년간 병석에 누워 지내던 어머니가 겨울인데도 참외가 먹고 싶다고 하여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정신없이 들판을 헤매었는데 양지쪽 언덕에 푸른 빛이 보여 가보니 참외가 달려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동안 묘를 지키면서 살았다. 1900년 임금은 벼슬을 내렸고 1902년에는 효자 표창을 받았다. 이윽고 1923년에 세상을 버리니 사람들이 그를 기려 효자각을 세웠다.

김종숭 효자각은 권목월 효부각, 김동문 효자각, 권상두 효자각과는 달리 길가에 있지 않다. 도로를 그냥 달려서는 볼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도로를 가운데에 놓고 볼 때 단밀초등학교 맞은편, 도로를 따라 지어져 있는 집들의 뒤편 산비탈에 있다. 따라서 길에서는 보이지 않고, 천은사 입구라는 이정표를 보고 집 사이 좁은 길로 따라 들어가면 논 뒤에 세워져 있는 정려각을 볼 수 있다.

김종숭 효자각을 보고 돌아나와 다시 길을 떠난다. 하지만 단밀초등학교 운동장 끝을 겨우 200m나 벗어났을까 싶은데, 왼쪽 길가에 김형석 정려각이 나타난다. 수양대군이 자신의 형인 문종의 아들, 즉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는 사건과 관련이 있는 정려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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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정려각 ⓒ 정만진

김형석(金炯石) 정려각
1848년 출생. 김녕(金寧)김씨. 단종 복위 운동 때 죽은 김문기의 후예로 충북 영동에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이 마을로 왔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열 살 때 이미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의를 깨달았다. 또 힘이 매우 세었다. 하루는 호랑이가 집에 들어와 가족들을 해치려 했는데, 아버지와 함께 그 호랑이를 때려잡았다. 그 때 아버지가 호랑이에 물려 큰 상처를 입었고, 형석이 입으로 고름을 빨아 낫게 하니 모두들 감탄하며 효성을 칭찬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어머니가 병을 앓게 되었을 때 대소변 처리와 빨래도 직접 하였다. 6월 염천(炎天)에 어머니가 쇠고기를 먹고 싶어 하여 상주까지 구하러 갔으나 고기를 얻지 못했다. 형석은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여 쇠고기를 구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탄하면서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까마귀들이 울면서 몰려와 나무 위를 맴돌았다. 쳐다보니 쇠고기 한 꾸러미가 나무 위에 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기이한 일들이 모두 그의 효성 덕분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어머니의 대변을 찍어 맛을 보아가면서 병세를 판단하여 약을 지어드렸고, 급할 때에는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을 하였다. 이윽고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다하고 72세에 돌아가시니 마을 뒤편에 묘소를 짓고 하루 세 번씩 3년 동안 한결같이 시묘(侍墓)하였다.       

면소재지 안에도 단밀면의 자랑인 정려각이 또 두 곳이나 있다. 단밀중학교 정문 옆에 정악 숭효각이 있고, 뒤에는 안동권씨 표열각이 있다. 정몽주의 후손으로 1779년에 태어 1839년에 타계한 정악 선생의 정려각과, 1696년에 태어나 겨우 21살의 꽃다운 나이에 애통하게 죽은 안동권씨의 정려각을 순서대로 답사하고 그 안내판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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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악 숭효각 ⓒ 정만진

정악(鄭岳) 숭효각(崇孝閣)
어릴 때부터 효심이 남달라 12세 때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에 상처를 내어 그 피를 드렸다. 하지만 그렇게 간절하게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 했으나 아버지는 44세에 그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는 불효가 원통하니 네가 할머니를 잘 모셔다오' 하고 유연을 남겼으므로 그 이후 조모 모시기를 30년 동안 하루도 변함없이 정성을 다했다. 천수를 다한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는데, 밤이면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지켰다. 그의 12세와 9세 된 두 어린 아들들도 아버지를 따라 날마다 묘소에 와서 잤으며,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3년상이 끝난 후에도 1년 동안 매일 산소에 와서 성묘하였다. 1839년 60세에 별세하니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고, 유림에서 1981년 비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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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안동권씨 표열각 ⓒ 정만진

열부(烈婦) 안동 권씨 표열각(表烈閣)
1696년 안동인(安東人) 권진걸(權震傑)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병중인 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신 끝에 완치되도록 하였으며, 바느질, 길쌈, 음식솜씨 등 부덕(婦德)을 두루 갖추어 유림(儒林)의 칭찬을 받았다.

20세에 성산인(星山人) 이민화(李敏華)와 결혼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부군이 학문에 힘을 기울일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했다. 마침 전염병이 창궐(猖獗)하여 시아버지가 먼저 별세하고 이듬해에 남편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따라죽으려고 마음먹은 것을 눈치 챈 시어머니가 극구 만류한 끝에 친정으로 보냈다.

친정에 돌아온 그녀는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삼베짜기에 매달리더니, 어머니에게 '남편의 염습(죽은 사람의 몸을 씻고 삼베로 감사는 일)이 미흡했으니 다시 해달라'면서 '먼저 저 세상으로 가서 죄송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 나이 21세, 남편을 잃은 지 46일만이었다.

임시로 토감(土坎)을 했다가 남편과 합장(合葬)을 하기 위해 파내니 오색 무지개가 일어나 무덤까지 뻗쳐 피어올랐다. 1728년 암행어사 박문수가 임금께 아뢰어 그 이듬해 표창을 받았다.

남편이 죽었다고 줄곧 굶다가 따라서 죽는 일을 지금 세상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배우자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만은 언제나 사람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움이다. 생각해 보라. 안동권씨는 얼마나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었을까! 그녀에게 행복한 다른 세상이 다시 한번 주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온 길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단밀면에는 정말 정려각이 많았다. 의성군청이 <의성 관광> 홍보책자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스스로 '義(의)와 禮(예)의 고장'이라고 자화자찬했는데, 단밀면의 정려각들을 보면 과연 이곳이야말로 '예'의 고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 이만한 고장이 있을까! 삼한 시대부터 나라를 이루고 살아온 사람들답다는 존경심이 저절로 샘물처럼 일어난다.

정려각 앞에 세워진 안내판들도 단밀면의 것들은 달랐다. 정려각마다 말끔한 안내판이 준비되어 있었고, 하나같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 읽기에 아주 좋았다. 작은 일 같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속에 든 것이 많은 사람은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이' 겉모양도 말끔하게 단장하고 행동도 아름답게 하는 법이니, 정려각의 주인공과 같은 분들을 기리는 유적과 문화유산은 특별히 잘 관리하여 지금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도록 지켜가야 한다. 정려각들을 허술하게 관리하면 아이들이 그 가치를 낮춰볼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려각들을 유난히 잘 관리하고 있는 단밀은 크게 칭찬받아 마땅하다.

면소재지가 끝나면 이제 위천을 넘어 안계면으로 들어간다. 면소재지에서 다리까지 닿기 전에 왼쪽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산비탈에 속수서원이 있다. 안계평야를 훤히 바라보는 얕은 산등성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이 서원은 신우 선생을 모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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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무 효자각 ⓒ 정만진

다리가 보일 만한 지점에 삼거리가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위중리 입구에 임성무(林盛茂) 효자각이 있다. 대단한 효자였던 그에게는 전설이 따라다닌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큰 병에 걸렸을 때 그가 약을 구하러 나서자 홍수 상태였던 위천이 문득 거꾸로 흘러 강을 건너게 해주었고, 낙동강에 잉어를 구하러 가니 솔개가 잉어를 낚아채어 공의 집에 떨어뜨려 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3년 동안 만경산에서 시묘살이 할 때에는 갑자기 맑은 우물이 생겨나 그를 편하게 해주었고, 밤에는 호랑이가 보호해 주었다. 마을에 큰 불이 나서 불길이 공의 집에 닿으려 하자 문득 역풍이 불어와 공의 집과 빈소(殯所, 묻기 전에 시신을 보관하는 곳)를 지켜주었다. 

과연 단밀면은 '예'의 고장! 정려각이 끝이 없네

위천을 건넌다. 이곳 역시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나룻배를 타고 건넜던 곳이다. 단밀면은 서쪽 끝인 낙정의 낙동강도 나룻배를 타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었고, 동쪽 끝과 북쪽 끝인 위천도 나룻배를 타야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은 만경산과 청화산으로 막혀 있었다. 신우 선생 부자가 어째서 이곳 단밀면으로 와서 고려에 대한 마음을 지키고 이성계를 멀리하려 했는지, 지도를 펼치고 보면 바로 이해가 된다. 게다가 '예'의 고장이었으니!
#단밀 #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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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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