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를 거부한 고려 충신의 유적

의성여행 (38) 단밀면에 남은 신윤유 신우 부자의 정신

등록 2012.05.21 15:44수정 2012.05.2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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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에는 만경산이 있다. 만경산 등산로 입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길은 이제는 폐교가 되어버린 단밀초등학교 정문에서 면 소재지 방향으로 200m 거리에 있는 김형석 효자각 건너편의 것이다.

이 산은 반드시 올라 보아야 한다. 첫째, 망국과 반역의 시대를 살아가는 선비의 꼿꼿한 자세를 배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 둘째, 다른 그 어디보다도 낙동강과 위천이 흘러가는 모습을 시원하게 보여주기 때문. 셋째, 지리 교과서에도 나오는 안계 평야가 다인, 단북, 단밀, 구천, 안계면 일대에 줄지어 펼쳐지는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 넷째, 천년의 전설을 간직한 천은사가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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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안계평야 너머로 아스라히 만경산이 보인다. ⓒ 정만진


만경산에 올라야 하는 이유를 손가락에 꼽으면서 오르막길을 가다보면, '만경산 등산로 정상 3.5km'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왼쪽의 솔숲으로 들어가면 정상에 닿을 수 있다는 '단밀면 산악회'의 친절한 안내이다. 차를 몰고 왔고, 등산이 목적이라면 이곳에 주차를 한 다음 지금부터 숲길을 걸으면 된다.

그렇지 않고 천은사를 방문할 계획이면 굽이굽이 임도로 난 산길을 한참 더 들어가야 한다.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고, 포장과 흙길도 되풀이 된다. 가는 도중에 삼거리가 나오지만 오른쪽으로 가면 하산하게 되니 그 길로 가서는 안 된다. '창건주 임명순 보살'과 '주지 김청운 스님'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공덕비를 지나면 천은사는 곧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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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의 곶감 ⓒ 정만진

늦가을에 가면, 천은사 대웅전 앞 절벽쪽 뜰에는 곶감이 주렁주렁 햇살을 받으며 아기자기하게 달려 있다. 곱고 소탈한 종일(宗一)스님의 친절한 마음씨만큼이나 곶감들은 연붉은 빛깔에 모양도 예쁘다.

스님과 함께 천은사에 깃들어 있는 전설의 현장을 답사한다. 현장은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이다. 얼핏 쳐다만 보아도 보통의 바위가 아니다. 깃들어 있는 전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쳐다본다는 이 바위. 푸른 이끼와 세월의 무늬가 오래된 옛날 유적을 보는 느낌을 강렬하게 풍겨준다. 게다가 가로로 좍 갈라져 가운데는 커다란 공간을 만들고 있다. 위에 얹힌 바위는 뒤로 몸을 젖히고 있는데 흡사 거북의 모양이고, 배 부분에는 움푹움푹 파인 발자국 모양의 구멍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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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의 장군바위 위에 홀로 앉은 불상이 멀리 낙동강 쪽을 바라보고 있다. ⓒ 정만진

이 바위에는 이름이 있다. 위의 바위가 거북처럼 생겼다고 해서 '거북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장군바위'로 더 유명하다. 이 바위에서 장군이 태어났다는 전설이다. 그때 바위는 중간으로 쩍 갈라졌고, 장군이 말을 타고 달려 푹푹 파인 말발굽 모양의 구멍이 남았다. 그러고 보니 거북바위도 아래에서 쳐다보면 말안장 그대로이다.


하지만 장군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그처럼 대단한 출생 신화를 가진 장군이 어째서 그렇게 일찍 허망하게 역사에서 사라지고 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답은 간단하다. 고려 건국 이후 영남에서는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신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를 떠올려보면, 신라 재건을 목표로 일어난 반란들이 성공할 턱이 없다. 고려 다음은 조선이고, 이성계는 영남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영남 지방에는 엄청난 장군 재목으로 출생하지만 이내 죽고 마는 전설이 유난히 많이 전한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힘깨나 쓰는 '동네 장군'들이 모두 반란에 가담했다가 죽은 것이다.

조금 전에 지나온 낙정 나루터에도 비슷한 장군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나루에서 약 200m 상류 쪽에 있는 용암(龍巖)에 깃든 전설이다.

조선조 말엽, 낙정 역촌(驛村)에 윤(尹)아무개 역졸(驛卒)이 있었다. 어느 날 문서를 낙정나루역의 상급 기관인 유곡(幽谷)역에 전달할 일이 생겼는데, 도저히 갈 형편이 못 되었다. 그 때, 마을 앞 백사장에서 놀고 있던 아들이 오더니 '제가 대신 다녀 오겠습니다'하고는 200리나 되는 먼 길을 떠났다. 그런데 오후에 보니 아들녀석이 백사장에서 놀고 있는 게 아닌가. 당황한 아버지는 심부름을 가지 않고 논다고 생각하고 아들에게 호통을 쳤다. 아들은 문서를 전달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보내 공문이 유곡역에 전달되었는지 확인해보았다. 아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 불안에 떨게 되었다. 당시 나라에서는 일반백성의 집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뒷날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면서 집안 전체를 감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어느 날 밤, 잠든 아들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겹쳐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아버지는 미친 사람처럼 새끼줄로 자는 아들을 묶고는 바로 죽였다. 이런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온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까지 모두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들이 죽자 갑자기 새파랗던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몰려들었고, 천둥소리에 벼락이 치고 큰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용바위 아래에는 큰 용마(龍馬)가 모래사장 위로 뛰어나와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죽은 주인(아들)을 위해 대성통곡을 하더니 강변 숲속으로 들어가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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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산 정상의 정상석. 헬기장을 조성하는 중인지 땅에는 갓 공사를 한 흔적이 뚜렷하고, 또 편편하다. ⓒ 정만진

천은사에서 돌아나와, '입산 통제' 안내판과 '만경산 정상 3.5km'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잠깐 쉰다. 이제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신발끈을 조여매고 팔다리를 움직여 준비운동도 한다. '산림법 제 97조 제 1항의 규정'에 따라 '11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산불예방 자연환경보전 기타 산림보호'를 목적으로 '단밀면 생송리 산 67-1번지 외 15필지 만경산 일대' '228ha'에 대해 '입산 통제'를 하며, '신고 없이 입산하면 산림법 제 125조의 규정에 의거 20만 원 이하의 과태료'의 죄를 묻는다는 안내판 앞은 오고가는 차들이 서로 비켜갈 수 있도록 넓고 편편하게 닦아놓아 준비운동하기에 적격이다.

'만경산 정상 해발 499m'이라 쓰인 작은 화강암을 본다. 어디에서?  만경산 정상이다. 산꼭대기를 표시하기 위해 돌을 세워놓고 거기에 산이름과 높이 등을 새겨놓은 것을 흔히 정상석이라 하는데, 제법 큰 바위를 놓는 경우가 많고, 설치한 등산모임의 이름까지 적혀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산의 높이를 사실에 맞지 않게 새겨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산이름까지 틀리게 파놓기도 하며, 자연 그대로인 바위 위에 정상석을 놓으면서 시멘트를 짓이겨 붙여 놓기도 하는 등 문제가 많다. 그러나 이곳 만경산의 정상석은 작고 깔끔하다. 정려각이 그토록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역시 다르다 싶다.

만경산은 고려말의 선비 신윤유(申允濡)의 인생이 서려 있는 곳이다. 본래 이름이 원유(元濡)인 공은 지금의 장관에 해당되는 판도판서(判圖判書)라는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이성계에게 협조하지 않고 단밀로 와서 살았다. 공은 달마다 초하루 보름이 되면 499m 산에 올라 멀리 서울(개경)을 마라보고 세상을 한탄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산을 망경산(望京山)이라 불렀다. 뒷날 발음하기 쉽게 '만경산(萬京山)'으로 이름이 바뀐 망경산, 나라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깊은 산골마을로 들어가 꼿꼿하게 살아간 지조 높은 선비의 애달픈 한이 깃들어 있는 '역사의 산'인 것이다.

아버지 신윤우 공이 단밀로 올 때 그의 아들 신우(申祐)도 함께 온다. 이미 아버지 신윤우 공이 고령(高齡)의 노인이었으므로 아들인 신우 공이 모시고 왔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아버지 신윤우 공이 고려의 멸망과 이성계의 득세에 실망하여 이곳으로 왔고, 또 '망경산'에 올라 '고려의 서울' 개성을 바라보며 시대를 한탄한 지조 높은 선비이기도 했지만, 그의 아들 신우 공 또한 이성계를 거부하고 단밀로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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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 유허비각 ⓒ 정만진

단밀면 소재지 한복판에 있는 신우 유허비각의 안내판을 알기 쉽게 풀어서 읽어보자.

신우 공은 고려말 개성에서 태어났다. 전라도 안렴사(按廉使, 지금의 도지사)를 역임하였는데 이성계가 왕이 된 후 형조판서(지금의 법무부장관)로 불렀으나 거절하고 아버지와 함께 단밀 땅으로 와서 은거하였다. 그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고려의 충신이었던 것이다.

신우 공은 또 지극한 효자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지금의 구천면 소호리 청신마을에 묘소를 마련한 뒤 3년 동안 거기서 살았다. 공의 효성에 하늘도 감동한 것일까, 3년 시묘(侍墓)가 끝나자 무덤 앞에는 쌍죽(雙竹)이 돋아났다.

그의 효행(孝行)은 널리 알려져 <동국여지승람> <삼강행실록> 등의 책에 실렸고, 정려가 내려졌다. 그가 살던 마을을 효자리라 불려졌다.

비각은 여러 차례 중수(重修)를 거치다가 1992년 의성군청의 지원과 지역민들의 도움을 얻어 2칸으로 증축(增築)되었다. 공을 제향(祭享)하는 속수서원이 가까운 북쪽에 있다.

중국 <후한서>에 삼한(三韓)의 진한(경상도 지역)에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등 12개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757년(경덕왕 16)에 한자식 개명이 이루어질 때 '난미리미동'은 소리가 비슷한 '丹密(단밀)'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단밀의 역사가 만만하지 않다는 말이다.

단밀면 소재지에는 지금도 고실, 강골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고실(古室)은 '오래된(古) 집(室)'이니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뜻이고, '강골(官谷)'은 '관(官)청이 있는 골(谷)'이라 하여 '관골'이라 부르던 것을 발음하기 쉽게 바꾼 것이다. 단밀이 오랜 역사를 지닌 곳임을 말해주는 지명들이다.

신우 부자는 이성계가 있는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다가 오랜 역사를 지닌 단밀로 옮겨왔다. 그들 부자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전국의 지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을 터, 낙동강을 건너는 중요한 나루인 낙정 너머의 단밀을 조용히 살기 좋은 고장으로 판단한 듯하다. 강은 본래 국경이 되기도 하고 이별의 장소이기도 하므로, 그들 부자는 큰 강을 넘어야 닿는 단밀이 이성계 세력과 확실한 거리를 두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동네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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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산 정상부에서 바라본 전통의 낙정나루 아래 낙단보 ⓒ 정만진


만경산을 오르면서 내내 북쪽을 바라본다. 관수루가 있는 낙정나루 북녘 하늘 아래에 서울이 있다. 지금의 서울도 물론 그쪽에 있지만, '고려의 서울' 개경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높은 관리로 있었으면서도 망국을 막지 못한 자괴감, 역신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 선죽교에서 죽어간 정몽주 등 벗들에 대한 그리움 등이 뭉쳐 공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 산에 올라 멀리 낙정나루 너머 북녘땅을 바라보았을 것을 생각하며, 답사자도 만경산 아래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물을 멀리 바라본다.

낙정나루가 한눈에 보인다. 관수루는 안 보이지만, 상주시로 넘어가는 다리는 눈앞인 듯 아주 또렷하게 보인다. 과연 만경산은, 신라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 망부석에 올라 남편이 오는가 동해를 바라보았을 때 울산 앞바다를 오가는 배가 그 깃대까지 선명하였듯이, 서울로 가는 나룻배에 탄 사람의 숫자까지도 헤아려질 곳이다. 공은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지금도 고려의 임금이 개경을 지키고 있다면 당장 산 아래로 뛰어내려가 저 배를 타리라, 가슴을 치고 또 쳤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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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산 정상부에서 바라본 안계평야의 일부(안계면 소재지 방향). 경상북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로, 중고교의 지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들판이다. ⓒ 정만진


뒤를 돌아보면 안계평야가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위천이 흘러가는 굽이굽이 물줄기도 화선지에 그린 붓선처럼 곱다. 다인면 넘어가는 비릿재 고개에서는 너무나 멀어보였던 경치가 이곳에서는 눈앞에 잡힐 듯 가깝다.

단북 월봉산도 이곳 아니면 볼 수 없겠다. 의성의 향토사학자 김종우 선생이 저술한 <의성의 유훈>에 따르면, 안계가 신라의 '작은 서울' 대접을 받을 때에 '서울 뒷산'으로 불렸다는 월봉산이다. 월봉산은 그저 얕은 동네 야산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평야 한복판에 있는 탓에 달이 떠오르면 마을과 들판에 짙은 산그림자를 드리웠다. 또, 안개나 구름이 서리면 어두운 달무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 처녀 셋이 호미를 들고 산을 갈라쳐 셋으로 나누었다. 산은 세 봉우리로 나뉘어져 흩어졌으며, 또 낮아졌다. 그 후 달무리도 달그림자도 없는 밝은 마을이 만들어졌다.
#의성여행 #만경산 #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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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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