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때문에 3천만원 날렸지만... 행복해요

[내 아이의 사춘기②] 반항 가득했던 딸아이, 이렇게 했더니 바뀌었다

등록 2012.05.08 21:08수정 2012.05.0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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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딸이 가장 애착을 품는 것들로는 '55요금제 3년 약정'의 스마트폰과 모 남성 3인조 가수, 그리고 가깝게는 중학교 멀게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다져온 다양한 부류의 친구들이 있다. 아이의 하루는 스마트폰 문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문자에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을 작동하면서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최신 발라드 곡을 듣는다. 그러면서 종종 친구들과 문자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오감이 모두 스마트폰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어 부모인 남편과 나는 눈빛 한 번 교환하기가 어렵다.

주위에 아랑곳없이 오로지 핸드폰만 들여다 보는 아이 모습에서, '스마트폰 중독'이란 말이 실감난다.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딸의 손놀림은 거의 신기에 가깝다. 컴퓨터 자판 기준 1분 700타에 육박한다는 타자속도는 스마트폰 문자열에서도 어김없이 그 진가를 발휘한다.

친구들과의 대화창은 늘 열려 있어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친구들과 소통이 가능하다. 무슨 비밀은 그렇게나 많은지 상체로 핸드폰을 가린 채 문자를 주고받거나 소곤거리며 통화하는 딸의 밝고 행복한 표정은 부모인 우리 앞에선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다.

부부싸움 불러오는 '사춘기' 딸아이

영화 <은교>의 한 장면 ⓒ 정지우 필름


친구들이랑은 잘도 재잘거리는 아이가 엄마 아빠한테는 주로 '네', '아니오'의 짧은 단답형이다. 주어와 술어가 꼴을 갖춘 3형식 문장 이상의 대화를 나눠본 지가 언제이던가. '싫어요', '별로요', '됐거든요' 등등 정나미 떨어지는 대답 중 가장 압권은 '글쎄요'다. 배가 고픈지, 체육복 값은 어디에 수납해야 하는지, 수학여행 날짜는 언제쯤으로 잡혀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돌아오는 답이 부정도 긍정도 아닌 '글쎄요'. 엄마 말을 전혀 귀담아 듣고 있지 않는 무성의함의 극치다.


모처럼 긴 대화였댔자 말도 안 되는 불평을 털어놓을 때나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나열할 때뿐이다. '이런 반찬을 어떻게 먹으라고요', '오리 훈제 왜 안 사놨어요', '이번 주말에 친구들이랑 시내 나갈 거니까 용돈 좀 넉넉히요'. 유일한 직계비속인 딸의 그런, 냉랭하고 야속한 처사에 부모인 우리 부부는 깊은 상처를 받는 동시에 그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느라 자주 다투게 된다.

"이게 다, 당신이 하나만 낳았기 때문이야. 적어도 둘은 돼야 된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고? 이게 아이를 잘 기르는 가정의 모습이냐? 우리랑은 눈도 한 번 안 마주쳐. 허구한 날 핸드폰만 들여다 보고 앉아서 아빠가 뭐라 한마디 하면 톡 쏘고, 대들고." 

"나 낼 모레 폐경이야. 둘째 타령은 이제 접을 때도 됐잖아? 외동이라 그런다는 선입견부터 버려. 라훌라는(딸의 가명) 그냥 사춘기 절정에 와 있는 것뿐이야. 물론, 정도가 좀 지나치긴 하지만..."

"난 정말 이해 할 수가 없다. 엄마, 아빠가 저 하나 위해 이 고생하는 것이 안 보여?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저 편하게 학교 다니게 하자고 그 불편을 감수하면서 이사까지 했잖아."

우리가 고등학생이 되는 딸을 위해 가장 많이 신경 쓴 부분은 통학거리였다. 그동안 세 놓았던 아파트를 일찌감치 처분하고 아이의 고등학교 배정이 확정되기를 대기하고 있었다. 무조건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중학교 3년 동안 부모 사정 때문에 버스로 다섯 정거장씩 통학을 하게 했던 것이 마음 아파서 고등학교만큼은 집 가까운 곳에서 편하게 다니게 하고 싶었다. 집을 팔아서 조성된 현찰이 연 2%대의 저조한 이율로 은행에서 잠자고 있는 동안 우리가 판 아파트는 열 달 만에 무려 3000여만 원가량 올라 버렸다.

"아이고, 내 돈! 놔뒀다 지금 팔 걸. 3000만 원이면 저 징글징글한 중고차를 확 갈아치우는 건데. 아이쿠, 속 쓰려!"

남편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3000만 원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세입자와 계약을 갱신하면 새 학기에 맞춰 팔고 새 집 구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미리 팔았다가 발생한 손실이었다. 소유하고 있던 아파트는 헐값에 팔고 상대적으로 엄청 오른 가격에 새로 아파트를 구입하자니 속이 쓰렸다. 그렇지만 '3000만 원이 대수냐, 아이가 편하게 통학하면 됐어.' 그렇게 애써 위안 삼았다. 제아무리 맹자 엄마라도 학군 때문도 아닌 통학거리 때문에 막대한 금전적인 손실까지 감수하진 못했을 거다.

고등학교 진학 후, 아이의 혼란은 시작됐다

부모의 쓰린 속을 다는 아니더라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 딸아이건만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비단 이사 문제뿐만이 아니고, 아이가 고등학생이 된 뒤 우린 모든 생활 패턴을 아이 위주로 바꿨다. 그렇지만 부모의 그런 노력 따위는 아랑곳없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은 부쩍 신경질과 반항이 늘었다. 늘 밝고 명랑했던 아이였기에 아이의 급작스런 변화에 무척 당혹스러웠다. 상급학교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서 그런 거라 이해했지만, 아이의 불평·불만은 갈수록 도가 지나쳤다.

"하루에 15시간이에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요. '다른 아이들도 다 그렇게 한다, 엄마·아빠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다른 아이들도 다 그렇게 살고 엄마·아빠도 그렇게 했다지만 안 좋은 건 안 좋은 거잖아요. 학생도 사람이라고요. 엄마, 진짜 농담 아니고 우리 이민 가요."

입학식 날부터 꼼짝없이 야간자율학습에 얽매이게 되면서 아이의 혼란은 시작됐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중학교 때까지 비교적 느슨하고 자유로웠다. 학원도 안 다니고 공부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친구들이랑 실컷 어울려 놀고 방학되면 염색도 하고 귀도 뚫는 등 아이는 그렇게 자유롭게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엄마가 권하는 책을 틈틈이 읽기만 하면, 그 무한한 자유가 허용됐다. 그래서 작년 여름 방학, 노랗게 물들인 머리에 한쪽 귀에 두 개의 귀찌를 나란히 하고 거실 대자리에 누워서 엄마의 권장도서 <청년 모택동>을 읽는 중에 "아, 모택동 넘 멋져. 와, 모택동 짱이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던 딸의 모습은 한 폭의 행위예술 같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 권당 얼마씩 소정의 용돈까지 보장해 주었다. 그렇게 평화롭고 행복하던 중학 시절이 끝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아이의 생활에는 일대 변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아이는 지독한 면학분위기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했다.

"힘들면 야간 자율학습 그거 하지 말래? 선생님한테는 엄마가 말씀드릴 테니까."

그랬더니 아이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말이 자율이지, 자율학습은 반강제나 다름없다. 전교생이 다하는 야자를 혼자서 빠질 용기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되면 친구들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 아이 생각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 친구들인데, 친구들 역시 자율학습에 얽매여 있는 처지이니,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라도 자율학습은 필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힘겨운 나날이 계속되고 아이는 더욱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이제 아이의 버릇을 바로잡아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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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고3 수험생들이 방학 중임에도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아이의 투정과 반항은 가정의 잦은 분란을 야기했다. 저렇듯 아이가 힘들어 하는 것은 엄마 책임이 크다며 남편은 나를 몰아세웠다. 내가 너무 무관심한 엄마라는 거였다. 난 억울했다. 평소 난 왕따였다. 3명의 가족 정족수에서 부녀는 늘 결탁해 내 의견은 가볍게 묵살했다. 또 부부싸움을 해도 아빠 편인 딸 때문에 도무지 공정한 판정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엄마 역할 운운하는 남편 주장을 나는 수긍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아빠의 지나친 편애와 관대함이 아이를 저렇게 만든 원인이 아닌가 싶었다. 급기야 아이의 두드러지는 단점을 끄집어내어 상대방의 유전자와 결합시키는 치졸한 방식까지 동원됐다. 

"덜렁거리고 정신머리 없는 것은 영락없이 당신이다."
"뭐? 집중력 없고 산만한 것이 내가 보기에 딱 당신 유전자거든! 당신 어릴 때에 길가 집에 살아서 동네 애들 지나갈 때마다 참견하느라 한시도 책상 앞에 진득하게 앉아있지 못했다며? 운동신경 둔한 것만 내 유전이고 나머지는 당신 복제품이야. 난 저러지 않았어."

엄연한 생물학적, 법적 부모들이 각자의 열성인자를 들춰가며 치졸한 싸움도 불사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극적으로, 이 싸움의 원인 제공자인 딸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고 '이제야말로 아이 버릇을 바로 잡아야 할 때'라는데 생각이 모아졌다.

우린 충분한 사전 협의 끝에 이번만큼은 아이의 버릇을 단단히 바꿔 놓되, 처음에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로 마음을 열게 하자는 회유 작전에 합의했다. 그런데 막상 벼르던 회담에 임하고 보니 초반부터 엄마 아빠를 압도하는 쪽은 딸이었다. 삼겹살을 굽고 엄마·아빠는 소주를, 딸한테는 사이다를 따라서 건배를 하며 시작된 자리에서 딸은 요즘 자신이 품은 고민을 또박 또박 풀어냈다.

"엄마는 나한테 너무 무관심해요. 솔직히 나 고등학교 갈 때까지 한 번이라도 내 교과서 본 적 있어요? 없죠? 다른 엄마들은 엄청 열성적이에요. 아이들 스펙 쌓아준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어떤 애들은 내신관리도 엄마가 알아서 해줘요. 엄마처럼 무관심한 엄마는 없어요. 그리고 아빠는 안 그런 척 하면서 모든 이야기 결론을 공부로 끌고 가죠. 고등학교는 진짜 빡세요. 제가 언제 공부를 해봤어야 말이죠.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한데 엄마는 관심도 없고 아빠는 알아서 못한다고 야단이고."

"엄마는 어디까지나 너 존중하는 마음에, 스스로 하기 바랐던 건데, 이젠 엄마도 신경 쓸게."

"엄마를 잘 아는데, 하루아침에 바뀌시겠어요? 대신 옆에서 '공부 안 해도 사는데 별 지장 없다' 그런 한가한 소리만 하지 말아 말아주세요. 고등학교는 정말 공부 안 하고 버틸 수가 없는 분위기예요."

아이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공부스트레스였다. 공부는 너무 어렵기만 하고 막막한데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더욱 스마트폰, 친구, 좋아하는 가수 등으로 해소하고 있는 듯했다. 처음엔 불만으로 시작됐지만 대화가 진척될수록 아이는 상당히 명랑해졌다. 예의 착하고 발랄하던 모습으로 되돌아 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이가 쉽게 마음을 열어준 것에 감격해서 한 잔, 두 잔 술이 잘 들어갔고 분위기는 상당히 호전되었다.

"딸아. 엄마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데 이 사람이 사춘기 때 엄청 문제아였대. 오죽했으면 기숙학교 교장이 가정방문을 온 거야. 아버지한테, 애가 너무 문제아니까 신경 좀 쓰라고 충고하러. 근데 그 아버지가 뭐라 그랬게? '15살이면, 다 큰 녀석을, 뭘 아비더러 이래라저래라 하라는 거요? 이봐요, 선생, 앞으로 이 녀석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비굴하게 처신하는 것 말고는 이따위 일로 다신 날 찾아오지 마시오. 알겠소?' 그랬대."

"와, 그 아빠 멋지다."
"응. 대신 그 아버지는 아들한테 '절대 거짓말 하지 말 것.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비굴하게 참지 말 것.' 두 가지를 항상 강조했어. 당시 나라가 외국식민지 상태였거든. 그 아버지도  독립을 위해 피터지게 싸웠고. 그래서 그 작가는 아버지 가르침대로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소신대로 살자니 엄청 외롭고 힘들었지. 나라에서조차 쫓겨나 외국에서 쓸쓸하게 죽었지만 그래도, 자기는 죽는 순간까지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았기 때문에 후회도 없고 엄청 행복하대."

"그 사람이 죽을 때 엄청 행복했는지를 엄마가 어떻게 알아?"
"응. 그가 죽기 전에 미리 써놓은 묘비명에 이렇게 적혀 있거든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캬! 멋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 누구야?"
"니코스 카잔차키스!"

"어? 우리나라 사람 아냐?"
"응. 그리스 사람. 엄마가 그래서 우리 딸을 그 아버지처럼, 스스로, 당당하게, 자유스럽게  키우자 한 것이 지나쳤나 봐."

"엄마 뜻은 이해하겠는데요, 전 대한민국 고등학생이에요.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엄마 방식은 좀 바꿔주심 좋겠어요."   

화목한 분위기를 살려 그날 나와 딸은 함께 자기로 했다. 안방에 딸과 나란히 누우니 아까 마신 술의 취기가 기분 좋게 올라왔고 그럴수록 모녀간의 대화도 무르익었다.

하룻밤 자고 나니, 싹싹하고 명랑해진 아이

날이 밝아 토요일 아침. 아이는 일찍 일어나 있었다. 기분이 좋은지 나를 대하는 태도는 그지없이 싹싹하고 명랑했다. 역시 대화가 필요했다.

"엄마. 빨리 눈 떠봐요. 어서 돈 입금시켜야죠. 내가 아까부터 인터넷으로 옷 다 골라놨어. 아! 엄마 말처럼 사고 싶은 옷 이 기회에 몽땅 살 거예요."
"갑자기 뭔 옷을 몽땅 사?"

"어? 엄마 설마 기억 안 나요? 약속 했잖아. 내가 옷 사고 싶다니까 몽땅 사라면서요? 진짜 술 취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약속해놓고선... '지나친 결핍과 욕구불만은 오히려 성장기 인격형성을 저해하고' 어쩌고 그러면서, 엄마가 사고 싶은 옷 다 사버리라 그랬잖아."

어렴풋이 그런, '무모한' 약속들이 토막토막 생각나는 듯도 했다.

"아! 그거? 물론 생각나지. 어? 근데 무슨 옷값이 이렇게 비싸?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사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엄마가 아까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그러는데 우선 두 개만 사자."

"아니! 절대 후회 안 해. 진즉부터 사고 싶었던 것들이야. 얼른 입금해야 해요. 수학여행도 얼마 안 남았고 이번 토요일은 방송반들 밖에서 놀기로 했어. 근데 엄마, OO메이커는 인터넷 말고 직접 매장에 가서 고르는 게 낫겠죠? 빨리 씻고 나가게요."
"이 옷 말고도 또 OO메이커 매장을 가자고?"

"어?, 엄마. 왜 자꾸 딴소리예요? 어제, 내가 OO메이커 옷이 입고 싶다니까, 엄마가 그까짓 거 사라 그래서 내가 정말이냐고 계속 물어봤잖아요. '다수대중이 열광하고 따르는 문화를 혼자서만 지나치게 거부하는 것도 원만한 사회성을 방해하고' 어쩌고 그러면서 낼 당장 OO매장 가자 그랬잖아."

딸과의 취중 약속을 이행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거금이 소요되었다.

"끄으응! 엄마가 또 뭐 사준다고 약속 한 거 이젠 더 이상 없지?"
"응. 당연 없죠. 엄마, 이 그릇들 어떤 수세미로 닦는 거예요?"

"네가 설거지를 다 하려고?"
"히힛. 엄마가 어제 밤에 또 그랬잖아.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과 정성을 쏟고 자신을 굽힐 줄도 알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나도, 엄마가 나 옷 사준 거 후회 안 하게 설거지도 도와주고 청소도 하고 그럴 거예요."

"쩝! 술김에 모처럼 괜찮은 말도 했네. 오늘 30만 원이나 쓴 거 아빠한테는 비밀이다."

쾌활하고 싹싹해진 딸의 모습에 남편은 감격했다. 저간의 사정을 모른 채 막바지 회담에 최선을 다한 나의 지혜로운 노력을 연거푸 칭찬했다. 이튿날부터 딸이 주문하고 내가 결제한 옷들이 차례로 배달됐다. 야간자율학습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그 옷들을 하나하나 입어보는 딸의 예쁘고 발랄한 모습은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의 그것이었다.

그날 딸과의 대화를 선심성 물질공세로 끌고 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빠와 딸이 예전처럼 속닥거리는 장면이 자주 목격되고 둘이 슬그머니 외출을 하는 일이 잦더니만 알고 보니 아빠라는 이는 약정이 아직도 2년이나 남은 딸 스마트폰을 갱신해 주기로 그만 얼떨결에 약속해버린 것이다.

딸아이의 사춘기, 85% 진행 중

딸한테 따끔한 충고를 해서 버르장머리를 바로 잡자던 문제의 그날 밤에 양쪽의 취약점을 최대로 활용하여 이익을 극대화한 쪽은 징계대상이었던 딸이었던 것이다. 아직 맘에 드는 스마트폰 기종을 정하지 못한 딸은 지금 무척 행복한 고민 중이다.

그렇지만 그날의 회담은 가족 모두에게 성공적이었다. 다시금 밝아진 딸의 모습에서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했던 불안감은 많이 사그라졌다. 딸도, 엄마·아빠의 마음을 알아주고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수학여행 떠났던 이틀째 밤, 새벽 4시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선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다'던 딸과의 통화는 감동이었다.

수학여행지 제주도에 풍랑주의보가 내려 딸은 예정보다 하루 늦게 육지로 돌아왔다. 올 때는 심한 풍랑에 배가 흔들려 대다수 학생들이 멀미를 했고, 겨우 몇 명만이 멀쩡했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자신이었노라 했다. 딸 핸드폰 앨범에는 너른 갑판 위에 동일한 체육복을 입은 학생전원이 실신하다시피 널브러져 있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엄마, 보이지? 단체로 쓰러져있는 친구들. 선생님이랑 학생들 다 멀미에 난리가 아닌데 나랑 몇 명만 멀쩡했어. 이것도 수학여행 추억이 될 거 같아 내가 찍어왔어."
"어? 너만 멀미 안 했다고? 아빠 닮은 거야~ 내가 섬 출신이라 배 멀미도, 차멀미도 일체 안 하거든. 거참 신기하네. 그런 게 다 유전 되냐?"

대체 쟤가 누굴 닮아 저 모양이냐, 한동안 푸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자신의 유전자 전이를  극구 부인하던 사람이 딸의 사소한 장점 하나를 날름 챙겨 자신을 닮았다며 대견해 했다.

아직은 삼한사온처럼 변덕이 심한 딸. 사춘기 징후가 앞으로 얼마나 더 자주 돌출하여 부모인 우리를 또 지치게 할지 모르겠지만, 이젠 두렵지 않다. 딸은 인내심 없는 부모였던 우리가 한때나마 속단했듯이 결코 그런 아이가 아니다. 다만 끝물 사춘기의 통과의례를 힘겹게 치르고 있을 뿐이다. 수치로 환산해 보는 딸의 사춘기 그래프는 현재 약 85%쯤 진행 중인 것 같다. 얼마 남지 않은 막바지 사춘기를 아이가 슬기롭게 헤쳐 나오기를 엄마인 나는 터널 밖에서 기다리며 서서히 출구전략을 구상 중이다.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려는 딸에게 다시금 주입시켜야 할 말이 있다. '헛된 것을 바라지 않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게 되고 그러면 너의 영혼은 자유로울 것이다'. 나의 이 가르침을 따르다보면, 세상살이가 다소 외롭고 힘들겠지만 내가 아는 인생의 유일한 진실은 이것뿐이다.
#사춘기 #가정 #사춘기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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