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진통이 예상됐던 제1회 당 중앙위원회는 당권파의 회의 방해와 폭력사태로 결국 중단됐다. 이날 통합진보당 중앙위에는 당 혁신 결의안 등 총 4개의 안건이 보고됐지만, 이중 단 한 건만 통과된 채 무기한 정회됐다.
회의가 무산된 것이 아니라 무기한 정회된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언제 이 회의가 속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비당권파 측은 빠른 시간 안에 발의된 모든 안을 통과시켜 지도부 공백사태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당권파는 사무총장 대행체제로 당을 이끌며 19대 국회 개원을 맞을 태세다. 국회가 개원된 이후에는 그동안 문제로 지적된 비례대표 이석기, 김재연 당선자가 의정활동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달 말까지 버티면 국회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다.
지난 12일 열린 당 중앙위 회의에서 당권파 소속 중앙위원들이 무려 9시간 30분 동안 똑같은 질문을 계속 되풀이하며 시간을 끌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날 오후 2시를 조금 넘겨 시작된 중앙위는 중앙위원 상원보고에서부터 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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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파행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폭력사태로 얼룩졌다. ⓒ 최인성
▲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파행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폭력사태로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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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권파, 조준호 대표 머리채 잡고 대표단 폭행
당권파 소속 중앙위원들은 국민참여당 측 중앙위원들의 명부가 조작됐다며 회의 중단을 주장했다. 유시민 공동대표가 현장에서 직접 상황을 설명하고 천호선 당 공동대변인이 입장을 발표했지만 소용없었다.
당권파 측 중앙위원들이 발언할 때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참관인으로 참여한 학생위원회 소속 대학생들과 당원들은 '불법 중앙위 중단하라' '불법 중앙위 해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회의를 방해했다.
일부 당원들은 폭력을 행사했다. 이날 회의 중 제1호 의안인 당헌 개정안이 중앙위원 만장일치로 통과되자마자 단상으로 뛰어든 것이다. 단상으로 뛰어든 당권파 당원들은 조준호 공동대표의 머리채를 휘어잡았으며, 유시민 공동대표의 안경이 날아가고 옷이 찢어지는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유시민 대표가 엄호한 심상정 의장은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 장내는 곧장 아수라장이 됐고, 대표단이 회의 도중 대피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 같은 폭력사태는 중단과 반복을 거듭하며 2시간 넘게 진행됐고, '정회'를 선포한 뒤에도 지속됐다. 당권파는 단상을 점거한 채 구호를 외쳤고 장외에서는 대표단의 통행로를 차단한 채 진행요원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더 이상 회의가 진행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심 의장은 이날 밤 11시 30분 결단을 내렸다.
심상정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의장은 "더 이상 정상적인 회의가 불가능함에 따라 무기한 정회를 선포한다"며 "속개 시기와 장소는 추후 공지하겠다"고 밝혔다. 심 의장이 무기한 정회를 선언한 뒤 비당권파는 현장을 떠났다.
그러나 단상을 점거한 당권파는 현장을 떠나지 않고 구호를 제창하며 집회를 열었다. 통합진보당 측에서 공식 문자로 더 이상 이 회의를 진행하지 않겠다는 뜻이 천명된 뒤에도 당권파는 현장을 떠나지 않고 속개 상황에 대비하자고 주장했다. 12일 자정을 넘긴 시각까지도 당권파 일부는 회의가 열렸던 킨텍스 제1전시장 앞에 모여 해산하지 않았다.
당권파인 우위영 공동대변인은 폭력 사태에 대해 "중앙위가 파국으로 귀결됐는데, 이를 지켜본 국민들께 송구스럽다"며 "통합과정에서 만장일치 합의정신을 최대한 발휘하자고 했던 약속이 무너진 것에 대한 중앙위원들의 정당한 항의를 거부한 결과"라고 심 의장을 비난하는 논평을 냈다. 그는 폭력사태 발생에 대한 언급 없이 "이후에라도 3자(구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탈당파)간 통합정신을 발휘해 중앙위가 정상적으로 개최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진중권 "사교집단 광란 보는 느낌"... 조국 "비극이다"
이날 9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통합진보당 중앙위 회의를 지켜본 민심은 차가웠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통합진보당 사태를 우려하는 글들이 넘쳐났다. 민주주의 입장에서 당권파를 비판하는 글들은 타임라인을 장악할 정도였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 두 가지가 있다"며 "하나는 이정희마저 그러리라는 것, 다른 하나는 저들이 당 대표들을 구타하기까지 하리라는 것, 마치 사교집단의 광란을 보는 느낌이었다"고 비판했다.
조국 서울대 교수는 "통합진보당 중앙위가 아수라장이 됐다, 유시민·심상정·조준호 공동대표는 당권파에게 멱살을 잡히고 구타를 당했다"며 "당권파가 저런 선택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비극이며 이는 야권연대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걱정했다.
여균동 영화감독은 "통합진보당은 진짜 싸워야 할 곳, 현장으로 돌아오라"며 제주 해군기지에서 싸우고 있는 문정현 신부의 말을 인용해 "해군기지 공사는 계속되는데 진보정당은 뭘 하고 있나, 이럴 거면 없어지는 게 낫다"고 비판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이념은 세계를 보는 틀, 사회문제를 해석하고 해법을 구하는 데 이념의 차이는 불가피하다, 문제는 과잉이며 차이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적과 동지의 이분법', '타자의 악마화', '민주주의의 부정'이 이뤄진다"며 "통합진보당 사태는 상식 대 비상식,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의 문제"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을 지지해온 진보인사들의 비판이 거세지고 민심이 차가워지면서 지지율도 급락하고 있다. 리얼미터의 정당 지지율 조사에 따르면, 통합진보당의 최근 지지율은 5.1%다. 이 지지율은 통합하기 전인 민주노동당 지지율 4.8% 수준에 맞먹는 수치다.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지난 8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만일 4.8% 이하로 지지율이 떨어진다면 민노당 지지층마저 이탈한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당권파, 국회 개원일까지 버티기?
하지만 당권파는 당 중앙위를 사실상 무산시킬 방침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지속적인 회의 방해로 당 중앙위를 무산시킨 뒤 지도부 공백사태가 발생하면 당권파인 장원섭 사무총장 체제로 임시 지도부를 구성하고, 내달 1일 국회가 개원하면 원내대표를 선출해 원내대표가 사실상 당을 운영하는 체제로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비당권파는 당권파의 의지대로 당이 운영되도록 하지는 않겠다는 뜻이 분명하다. 12일 폭력사태로 '무기한 정회'된 중앙위 회의를 늦어도 13일까지는 속개해서 상정된 모든 안건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당 혁신 결의안과 혁신 비대위 구성의 건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회의를 열면 당권파 당원들이 가장 먼저 회의장을 장악하고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회의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비당권파 안에서는 이런저런 궁리들이 나오고 있다.
아예 회의장 밖에서 확인된 당직자만 우선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그 확인된 당직자들이 대표단과 중앙위원, 기자들의 신분을 확인한 뒤에 참관인 배석 없이 회의를 진행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전자투표 방안도 거론된다. 전자투표를 통해 제기된 모든 안을 표결처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안에 대한 반대토론이 발생할 경우에는 그것을 받아서 처리할 수 없다. 통합진보당의 한 핵심 인사는 "단위가 1천명 대에 이르는 회의구조에서는 전자투표가 불가능하다"며 "반대토론이 있을 텐데 그것을 처리할 수 없어서 회의장에 모여 종합토의한 뒤 표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저런 묘책이 통합진보당 안에서 논의되는 중이나 현재로서는 특별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12일 발생한 폭력사태로 볼 때 당권파가 이번 중앙위 회의를 무력화 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이번 중앙위가 무산되면 곧바로 당 지도부 공백 사태가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방안은 19대 당선자들을 중심으로 원내대표를 우선 선출해 당 지도부를 대신하자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민주통합당이 지도부 공백사태에서 박지원 비대위를 출범시켰던 것처럼 통합진보당도 19대 당선자들을 중심으로 원내 사령탑을 뽑고 그가 당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방안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한 핵심 인사는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현 상태에서 원내대표 선거를 한다면 당권파가 수적으로 우위이기 때문에 재선의 김선동 의원이 유력하다"며 "그렇게 되면 당은 또 다시 당권파가 장악한 채로 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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