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위의 소 울음, 우렁차기도 하다

[포토] 금속말을 타고 달려간 오월의 목장 길

등록 2012.05.16 19:15수정 2012.05.1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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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벚꽃을 보러 찾아간 충남 서산의 개심사 가는 647번 국도변은 양편에 초록의 둥그런 언덕들이 쭉 펼쳐져 있어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녹색의 나즈막한 구릉들이 등 굽은 할머니가 덩실 덩실 어깨춤을 추는 것 같고, 파도가 어울렁 더울렁 넘실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정확히는 서산시 운산면으로 운산목장 혹은 서산목장이라 불리는 초원의 목장들이 온통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소에게 옮기는 구제역병으로 목장들마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는 바람에 몇 년 동안 저 푸른 초원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저 눈으로만 감상해야 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좀 나아졌는지 몇몇 목장들 문이 열려 있는 게 아닌가! 목장 길 뒤로 펼쳐진 풍경에 취해 개심사 가는 것도 깜박 잊어 버리고 목장을 향해 달려갔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라만챠의 기사 돈키호테처럼...     
  
a  제주의 오름길을 연상케 하는 서산목장길

제주의 오름길을 연상케 하는 서산목장길 ⓒ 김종성


a  목장길 따라 ♪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길

목장길 따라 ♪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길 ⓒ 김종성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서산 목장은 운산 목장 예전엔 삼화 목장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던 전국 최대 규모의 목장으로 현재 축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넓이가 무려 638만 평이나 된단다. 서산에 이런 드넓은 초원이 있다니... 금속말을 타고 목장 길을 달려가면서도 잘 믿기지가 않는다. 어디를 봐도 펼쳐지는 무척이나 이국적인 풍경에 멀리 외국에 온 것 같다. 전에는 구릉이나 야산이었을 목장은 모나지 않고 드세지 않은 충청도 사람들처럼  둥글고 완만하게 이어진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해 잠시 기억을 뒤로 돌렸다. 인적 드문 고요한 길,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봉긋한 언덕배기, 뒹굴고 싶은 부드러운 사면... 바로 제주의 오름들이 떠올려지는 곳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이 만든 오름과 달리 이 목장은 사람들이 일구어 냈다. 어떤 목장 길은 초입에 벚나무들을 심어놓아 하얀 벚꽃이 피어나면 초록의 목장과 어떻게 어울릴지 상상하게 한다.

a  초원의 목장들 사이로 난 저 길을 달려갈 생각을 하니 무척 설레인다.

초원의 목장들 사이로 난 저 길을 달려갈 생각을 하니 무척 설레인다. ⓒ 김종성


a  인적없는 목장길에 민가와 주민들을 만나면 무조건 반갑다.

인적없는 목장길에 민가와 주민들을 만나면 무조건 반갑다. ⓒ 김종성


미국 땅의 원래 주민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하루라도 평원의 한적한 곳을 거닐면서 마음을 침묵과 빛으로 채우지 않으면 갈증 난 코요테와 같은 심정이 들었다고 한다. 내 몸속에도 그런 피가 흐르는지 컨베이어 벨트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오월의 눈부신 햇살과 푸르른 들판이 그립기만 했고, 그런 와중에 떠오른 곳이 소들이 풀을 뜯는 평화롭고 푸르른 이곳 서산 목장이었다.      

표지판도 이정표도 없는 목장 길을 무조건 달리다 보니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산에서 길을 잃듯 목장에서 길을 잃기도 했지만 크게 걱정되지 않는 건 목장 저 밑에 민가들과 저수지가 손에 잡힐 듯 보이기 때문. 걱정은커녕 언덕위로 오를 때마다 발밑에 펼쳐지는 에스라인의 목장 길을 볼 적마다 저 길 위를 신나게 달릴 생각에 마음만 설렌다.  

a  서산 목장에서 풀을 뜯으며 거니는 소들을 보는 건 행운이다.

서산 목장에서 풀을 뜯으며 거니는 소들을 보는 건 행운이다. ⓒ 김종성


a  우적우적 풀을 뜯는 소들의 한가로운 풍경이 한폭의 그림같다.

우적우적 풀을 뜯는 소들의 한가로운 풍경이 한폭의 그림같다. ⓒ 김종성


가끔 차가 지나갈 뿐 인적 없는 목장을 달리다 좀 심심하다 싶을 즈음 저 멀리 푸른 동산 위에 뭔가 꾸물꾸물 움직인다. 구제역 파동으로 보기 힘들었던 멋진 일출을 보는 것만큼이나 만나기 어렵다는 목장의 소들이 나타난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는데 이상한 금속말을 타고 다가오는 내가 멀리서도 느껴지는지 음메~하고 소리치는 소의 목소리가 참 건강하고 우렁차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들려오는 소들의 우적우적 풀 뜯어 먹는 소리도 정겹다. 도시에서 태어나 쭉 살아온 내게 이렇게 소들이 초원위에서 한가로이 거니는 것만 봐도 흐뭇하고, 목장길 곳곳에 떨어져 있는 소똥이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문득 호기심 어린 의문이 든다.


a  나무 그늘 아래 평상과 자전거가 있는 고향삼고 싶은 집

나무 그늘 아래 평상과 자전거가 있는 고향삼고 싶은 집 ⓒ 김종성


'씨소'라고 하는 튼실한 소들의 풍경을 그림처럼 감상하다가 이제서야 개심사 벚꽃이 떠올랐다. 페달 한 번 구르지 않고 구불구불 내리막 목장길을 신나게 달려 내려간다. 용현리 구민회관이 나오고 동네에 어울리는 가게 '목장 슈퍼'가 하산하는 자전거 여행자를 반긴다. 소소한 논밭도 보이고 주위에 저수지도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지만 가옥들이 뜨문뜨문 떨어져 있고 주민들도 적다. 소들이 풀 뜯는 푸르른 초원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쓸쓸함이 배여 있다.  

나무 그늘 아래 눕고 싶은 평상이 놓여져 있고 그 옆에 자전거가 서있는 어느 집, 마음속의 고향집 삼고 싶은 마음에 쉬이 지나치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어깨 양옆에 거름통을 진 아저씨가 작은 밭을 오가며 심어논 채소 위로 거름을 뿌리고 있다. 마당안 소쿠리에 아주머니가 캐어온 듯한 푸른색의 고사리가 포개져 있다. 자전거탄 외지인이 집 마당에서 야생 고사리를 신기한 듯 만져보며 이렇게 어슬렁거리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다. 자전거만 보면 짖어대는 멍멍이가 그리울 정도다.


a  왜 아기손을 보고 왜 고사리손이라고 표현했는지 알게 한 푸른 고사리

왜 아기손을 보고 왜 고사리손이라고 표현했는지 알게 한 푸른 고사리 ⓒ 김종성


5·16 쿠데타의 주역 김종필씨는 그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 서산 운산면 일대의 드넓은 야산을 목초지로 바꿔 이렇게 목장을 만들었다. 한없이 낭만적이고 목가적으로 보이는 목장이지만 어찌 보면 넓은 산림을 훼손한 것이고 그것에 기대어 살던 농민들의 삶터를 잃게 만든 현장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서산은 현대그룹 정주영씨에 의해 '국토확장'과 '식량자급'을 명분으로 한국 제일의 황금어장이라고 하는 천수만 갯벌을 간척해 농경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서산은 국가를 위해 산과 바다와 갯벌 그리고 그곳에서 대대로 살던 주민들의 삶을 내주었다. 다시 개심사로 가는 국도변, 그늘도 흔한 벤치도 없는 버스 정류장 팻말 옆에 서있는 아주머니에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한 건 왠지 이 고장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서산목장 #운산면 #한우 #자전거여행 #운산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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