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전의 염불과 영산암의 꽃에 반하다

[봄날 목조건축이 아름다운 꽃절 찾아가기 ②] 안동 봉정사

등록 2012.05.23 10:24수정 2012.05.23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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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대에서 바라 보는 폭포 ⓒ 이상기


봉정사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자락에 있다. 태장리라는 마을 이름은 고려 공민왕 때 태를 묻었다고 해서 생겨났다. 안동과 예천을 잇는 34번 국도에서 송야천을 따라 나 있는 924번 지방도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 봉정사 매표소 앞 주차장에 이를 수 있다. 과거에는 봉정사 만세루 아래까지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문화재 관람료를 내고 신록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며 오히려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어 좋다.
  
길을 오르다 왼쪽으로 비석을 두 개와 정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비석은 스님의 유공비와 안동부사의 송덕비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정자 이름은 명옥대인데, 퇴계 이황 선생과 관련이 있다. 이 정자의 이름은 원래 낙수대였으나, 1665년(명종 20) 이곳을 찾은 퇴계 선생이 이름을 명옥대로 바꿨다. 명옥대라는 이름은 진(晉)나라 시인 육사형(陸士衡)의 시 "폭포수 튀는 물이 옥구슬 소리 같다(飛泉漱鳴玉)"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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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일주문 ⓒ 이상기


일주문에 이르면 은초(隱樵)가 쓴 천등산봉정사(天燈山鳳停寺)라는 글씨를 볼 수 있다. 봉정사는 봉황이 머무른 절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숨어 사는 나무꾼이라는 뜻을 가진 은초는 누구일까? 진주지방에서 활동한 서예가 은초 정명수(鄭命壽: 1909~1999) 선생이다. 그는 추사체의 맥을 잇는 현대의 대표적인 서예가다. 주요작품으로는 해인사 해탈문, 진주 촉석루 글씨가 있다.


일주문 너머로 경사진 길이 이어지고, 나무들에서는 신록이 피어난다. 봉정사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있어 안내를 받을 수도 있다. 단체로 오는 관광객이 대부분 이들 해설사의 도움을 받는다. 나는 봉정사를 안내하는 자료를 하나 얻고는 만세루로 향한다. 

대웅전과 극락전 전각 바깥에 피어난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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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루 ⓒ 이상기


만세루(萬歲樓)로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단의 왼쪽에는 철쭉꽃이 피었고, 오른쪽에는 멋진 자태의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리고 건물 2층 누각에는 천등산봉정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동농노어(東農老漁)다.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는 동방의 늙은이'라는 뜻인데, 이 분은 또 누굴까? 찾아보니 동농 김가진(金嘉鎭: 1846~1922)으로, 1891년 안동부사를 지낸 바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1922년 상하이에서 죽었다.

만세루 1층 통로를 지나면 대웅전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통해 마당으로 올라간 나는 대웅전을 한 번 쳐다보고, 몸을 돌려 만세루 2층을 들여다본다. 만세루 안에는 법고와 목어가 있다. 그리고 만세루 외에 덕휘루(德輝樓),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등의 현판이 보인다. 만세루에 올라 대웅전을 바라보니 눈높이가 맞아선지 대웅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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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해회 ⓒ 이상기


대웅전 좌우에는 화엄강당(華嚴講堂)과 무량해회(無量海會)가 있다. 화엄강당은 원래 화엄사상을 가르치는 강원(講院)이었으나, 현재는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무량해회는 '헤아릴 수 없고 바다처럼 넓은'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율원(律院)이었으나 현재는 요사채 사용된다. 이곳이 율원이었음은 기둥에 걸린 주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금부터 이 몸이 부처가 될 때까지                                自從今身至佛身
계율을 굳게 지켜 범하거나 훼손하지 않겠나이다.             堅持禁戒不毁犯
원컨대 모든 부처님께서 증명을 해 주소서                       唯願諸佛化證明
비록 목숨을 다 바치는 한이 있어도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寧捨身命終不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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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 이상기


이들 두 당우를 지나 나는 대웅전으로 오른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현재 봉정사의 중심법당이다. 이곳에서는 설법과 기도가 이루어진다. 내가 찾은 시간에도 스님과 신도들의 간절한 염불과 기도 때문에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가 주존으로 모셔져 있고,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했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공포 장식이 없는 다포양식이며, 1962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선전기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후불 벽화로 인해 고려 후기 건축으로 보기도 한다. 그것은 벽화의 양식과 기법이 고려 불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옮겨간다. 극락전은 여러 사람을 위한 설법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의 염불과 기도공간이다. 이곳에서도 한 스님이 염불과 기도에 열중이다. 그래서 안을 살짝 엿볼 수밖에 없다. 불단에는 높이 100cm정도의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아미타부처님 뒤로 후불탱화가 있는데, 주존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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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 이상기


극락전은 1972년에 보수되었다. 이때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극락전이 1363년(공민왕 13)과 1625년(인조 3)에 중창,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량문에 보면 천계(天啓) 5년(1625) 4월에 중수하고, 그보다 훨씬 전인 지정(至正) 23년(1363) 3월에 중창(中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봉정사 극락전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주심포(柱心包)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았고, 양옆 칸에는 창문을 내었다. 이른바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감실형 법당이다. 그리고 기둥의 배흘림, 공포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가구(內部架構) 등에서 통일신라 이후 고려로 이어지는 옛날의 건축양식(古格)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극락전은 정면보다 측면이 더 아름답다. 그것은 측면의 가구와 두공이 정면에 비해 숫자가 더 많고 화려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웅전과 극락전을 위에서 조망하기 위해 삼성각으로 오른다. 4월에는 법당 뒤로 벚꽃과 철쭉이 한창이고, 5월에는 법당 앞에 모란꽃이 한창이다. 나는 극락전과 대웅전 뒤 언덕을 통해 영산암 쪽으로 간다. 그 사이 대웅전 앞마당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보인다. 영산암으로 가려면 공덕당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영산암은 꽃이 있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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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 ⓒ 이상기


계단을 올라가니 마치 ㅁ자형 사대부집처럼 보이는 암자가 나타난다. 영산암이다. 영산암에 들어가기 전, 나는 암자 바깥마당에서 영산암 전체를 조망한다. 2층의 우화루가 바깥채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1층으로 문이 나 있으며, 문을 지나면 계단을 통해 영산암 안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밖에서는 영산암 내부를 제대로 볼 수 없다.

나는 잠깐 우화루(雨花樓)라는 현판을 올려다본다. 낙관이 없어 누가 쓴 글씨인지 알 수 없으나 달필이다. 영산에 있는 암자, 그곳에 꽃비가 내리는 누각,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누각을 지나 영산암 안마당에 이르니 마당 가장자리를 따라 조성된 꽃밭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수선화, 산당화, 튤립 등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영산암은 한마디로 꽃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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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의 꽃 ⓒ 이상기


5월에 이곳에는 모란이 필 것이고, 6월이 되면 불도화가 피어날 것이다. 꽃밭 안쪽으로 마당 가운데는 몇 그루 인상적인 나무가 있다. 향나무와 배롱나무와 회양목이다. 사철 푸른 향나무는 절개와 향기를 나타낸다. 배롱나무는 서원과 절 안에 많이 심어져 있다. 배롱나무는 7월과 8월에 꽃이 피는데, 무려 100일간이나 꽃을 피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배롱나무를 목백일홍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당의 가장자리에는 자그마한 동산이 있고, 그 옆에는 석등이 아닌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나는 잠깐 우화루에 올라 전각들을 살펴본다. 영산암에는 우화루 외에 응진전, 송암당, 관심당, 삼성각, 요사채가 있다. 응진전은 영산암의 중심법당으로, 송암당은 일종의 선방으로, 관심당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요사채는 주거공간으로 사용된다. 응진전에서는 스님의 염불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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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 속의 응진전 ⓒ 이상기


나는 이제 우화루 내부를 살펴 본다. 마루 한쪽으로 다향실(茶香室)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 우화루가 일종의 강학공간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우화루를 내려온 나는 응진전으로 가 스님의 염불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내부를 들여다본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3세불을 모셔졌고, 그 옆으로 16나한이 호위하고 있다. 그런데 나한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이곳 영산암은 배용균 감독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이 영화의 배경이 바로 영산암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노스님 혜곡은 이곳 영산암에 주석한다. 그는 동자승 해진, 젊은 승려 기봉에게 화두를 던져주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준다. 그럼 그들은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노스님은 죽고, 기봉은 번뇌하고, 해진은 아직 깨달음이 뭔지도 모른다. 깨달음 그것은 생각보다 멀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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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 표지석 ⓒ 이상기


나오는 길에 나는 매표소 맞은편에 있는 영화의 고향 표지석을 보았다. 표지석에는 1989년 이곳 천등산 봉정사 영산암에서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촬영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동판의 그림 일부가 훼손되어 있다. 아마 사실과 다른 그림이 새겨졌던 모양이다. 비석이나 표지석을 보면 항상 진실과 허구가 공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진실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천등산과 봉정사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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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 이상기


봉정사를 이야기할 때는 늘 의상대사와 능인조사의 얘기가 나온다. 그것은 이들이 이 절의 창건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한 다음 다른 곳에 절을 더 세우고자 했다. 스님은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날려 보내니, 그것이 현재의 봉정사 자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에 스님은 그곳에 절을 짓고, 봉황(鳳)이 머문(停) 자리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봉정사(鳳停寺)라 지었다는 것이다.

봉정사가 자리 잡은 산은 원래 이름이 대망산(大望山)이었다.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능인(能仁) 대덕이 이곳 대망산 중턱의 동굴에서 도를 깨치기 위해 수행정진했다고 한다. 그때 예쁜 여인이 나타나 스님을 유혹하면서 수행을 방해했다. 능인 스님은 그 유혹을 물리쳤고, 선녀였던 그 여인은 능인대덕을 위해  동굴 안을 불로 밝혀 주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능인대덕이 수행하던 굴은 '하늘에서 내린 등불'을 밝힌 굴이라고 해서 천등굴이 되었다. 그리고 대망산도 그 후 천등산(天燈山)이 되었다고 한다. 봉정사는 이처럼 672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나, 1972년 극락전 보수시 발견된 상량문은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 대덕이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봉정사 #천등산 #대웅전 #극락전 #영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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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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