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밝고 맑은 부처님은 처음

의성여행 (45) 비안면 만장사

등록 2012.06.01 18:52수정 2012.06.0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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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사 대웅전의 여래좌상. 너무 밝고 말끔하여 흙속에서 수백 년을 지낸 조선 시대 불상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 정만진


의성군 비안면 석불사에서 자락리를 거쳐 만장사로 넘어가는 길은 좁다. 산길도 그렇지만 도로도 마찬가지이다. 주위의 산세를 보노라면, 이곳이 1592년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왜군이 쳐들어 온 것을 강력히 저항하여 막아내었던 역사유적지 일원이라는 말이 저절로 실감 있게 다가온다.

이 지역 백성과 관군은 이 승리로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켰고, 비안현청(縣廳, 지금의 면사무소)의 공문서들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다. 가등청정의 왜군은 만장사 위쪽의 화장산성에 본부를 차려놓고서 강력히 저항하는 이곳 군민(軍民)들을 이기지 못한 채 물러나 그냥 북상했다고 한다.


가등청정도 물리친 화장산성의 만장사

자락동, '스스로[自] 즐거운[樂] 마을[洞]'이라는 뜻이다. 경주김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처음에는 도락동(道樂洞)이라 불렀는데, 1914년 그렇게 바뀌었다. 석불사 석굴법당 앞 안내판에 쓰여 있는 '도내기 마을'이라는 표현도 본명인 도락동의 우리말 발음으로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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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사 아래 산제지의 아름다운 풍경. 이 사진을 기준으로 하면 만장사는 왼쪽 골짜기로 들어가 산 정상 턱밑에 있다. ⓒ 정만진


차량으로 이동하는 경우에는, 석불사에서 자락동까지 내려온 만큼 약 4km를 동남쪽으로 나아가면 산제리(山堤里) 삼거리가 나온다. 1930년 산과 산(山) 사이에 둑[堤]을 쌓아 큰 못(池)을 만들면서 마을이름이 그렇게 불려졌다. 이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도리원(봉양면 소재지)으로 가고, 왼쪽으로 들어서면 만장사에 닿으며, 절 뒤 화장산성에 오르게 된다.

산제지를 지나면 왼쪽에 만장사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서 있다. 왼쪽은 산, 오른쪽은 논인길이 갑자기 가팔라진다. 오랜 세월 비바람이 흙을 깎아낸 결과로,  산은 본래 높아질수록 오르막이 심해지고 바위가 많이 나타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커다란 돌들로 쌓은 석축도 나타난다. 만장사에 다 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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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처럼 좌우로 각각 두 그루씩 서서 대웅전을 지키고 있는 만장사의 소나무들. 의도적으로 이렇게 식목을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자라난 것이다. ⓒ 정만진




돌계단을 하나하나 딛고 대웅전을 향해 올라간다. 만장사 뜰에 올라서면 가장 먼저, 무엇보다도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대웅전 앞의 소나무들이다. 푸르고, 깨끗하고, 높고, 선이 굵고 시원한 네 그루 소나무들이 쳐다보는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압도한다. 사천왕을 모시는 문이 따로 없는 만장사, '이 네 그루의 소나무가 바로 사천왕이구나' 하는 찬탄이 저절로 일어난다.

사천왕문 대신 네 그루 소나무가 법당을 지킨다


절에는 흔히 일주문 다음에 천왕문이 있다. '절에 들어올 때는 세상의 먼지와 때를 모두 벗어던지고 진리의 세계를 향해 한[一] 마음으로 나아가겠다'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으로, 보통의 집들과는 달리 양쪽에 기둥[柱]을 하나[一]씩만 설치하여 만든 대문- 일주문(一柱門)이 절의 입구에 있고, 그 다음에는 무시무시한 인상을 한 험상궂은 사천왕(四天王)이 좌우로 둘씩 서서 눈을 부라리며 방문자를 살피는 천왕문이 있다. 사천왕이 거기에 있는 것은 '욕(欲)심으로 가득찬 세상[界]인' 욕계(欲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동서남북 사방으로 살펴,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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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사가 신라 고찰이라는 사실을 증언해준 절터 일대의 출토물들. '卍'과 '寺' 글자가 선명하다. ⓒ 정만진


그런데 만장사에는 사천왕문 대신 네 그루의 위풍당당한 소나무들이 대웅전 앞을 지키고 있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듯이 하늘 복판으로 곧게 치솟아 자라있는 이 네 그루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바로 사천왕인 것이다. 이는 만장사 주지 대관(大觀) 스님께서 이 절을 가꾸어온 역사가 잘 증언해준다.

1999년 1월 대관스님은 상반신이 반쯤 흙속에 묻힌 채 스레트 아래에 들어있는 불상을 '발견'한다. 당시 스레트 둘레에는 약간의 담이 둘러져 있었다. 돌담은 옛날부터 사람들이 그 불상을 바라보며 절을 하고 기도를 올려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문화재급 불상을 그렇게 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수백년 땅속에 묻혔다 나온 불상. 찌꺼기 하나 안 묻고 깨끗

대관스님은 불상 앞에 네 그루 잘 생긴 소나무가 나란히 자라 있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고 말씀하신다. '이 소나무들이 지금까지 부처님을 지켜왔구나!'  아니나 다를까, 땅속에 파묻힌 불상을 파내기 위해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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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현판의 힘차면서도 예술적인 붓글씨를 감상하다. 초정 권창윤 서예가의 작품이다. ⓒ 정만진


네 그루 소나무의 그 많은 뿌리들은 애써 불상을 피해, 빙빙 주위를 돌며 불상을 지키듯이 둥글게 뻗어 있었다. 진흙이 불상을 덮치지 못하도록 뿌리들은 사방을 빈틈없이 막고 있었다. 그 덕분에, 땅 위로 들어올렸을 때 불상에는 더러운 찌꺼기 하나 묻어 있지 않았고, 황토를 닦아내니 초저녁 저물 무렵의 산속이 온통 한낮으로 느껴질 만큼 환해져 눈이 부셨다. 불자(佛子)가 아닌 일꾼들까지도 모두 삽을 땅에 내려놓은 채 그 자리에 덥석 엎드렸다.

불상이 있던 자리에는 대웅전이 지어졌다. 유형문화재 322호로 지정된 불상은 지금 대웅전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소나무는 본래의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네 그루 소나무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천왕이 되어 불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 현판은 우리나라 서예의 거목 초정(艸丁) 권창윤 선생의 글씨로, 금당 앞 소나무의 기상이 옮겨 앉은 듯한 힘찬 필체를 보여준다.

대웅전 문을 열고 법당 안으로 들어선다. 이런 금당은 으레 옆문으로 들어서는 법이니, 안으로 들어섰다고 해서 불상이 곧장 정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금당(金堂)도 아닌 만장사의 대웅전 안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너무나 환하다. 불상 앞 정면까지 다가서지도 않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미리 전깃불을 껐는데도, 청명한 가을날 대낮의 들판처럼 법당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다.

흔히 금빛을 입힌 불상이 모셔지기 때문에 절의 본당(本堂)을 금당이라 한다. 금당 안이 저절로 환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흙속에서 올라온 본래 모습 그대로, 아무런 색깔도 입혀지지 않은 채 그냥 앉아 있는데도 만장사 대웅전의 불상은 밝은 빛을 확확 뿜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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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사의 여래좌상. 기자는 지금껏 이보다 더 말끔하고 밝은 불상을 보지 못했다. ⓒ 정만진


처음 출토할 때에 그렇게 어스름의 산속이 낮처럼 밝아지더라는 스님의 말씀이 조금도 지나친 바 없는 사실이었다. 사진을 찍어도 빛이 반사가 되어 제대로 '그림'이 되지 않았다. 햇빛 속에 앉아 있는 돌을 찍는 듯 사진은 렌즈 안으로 계속 뿌옇게만 들어왔다.

신라 때 기왓장 출토, '卍藏寺' 글자 선명

게다가 불상의 표정은 마치 어린 아기처럼 밝았다. 아기처럼 통통한 볼살과 곱게 머금은 미소는 불상의 인상을 더욱 착하고 인자하게 느끼도록 했다. '卍(만)', '藏(장)', 寺(사)'가 새겨진 신라 시대 기왓장이 출토되어 만장사 창건 시기가 분명히 확인된 것을 생각하면, 마치 오늘 방금 만든 것처럼 깨끗하고 맑은 불상의 느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맑고 밝은 부처님은 처음이다!  

신라 시대에 조성된 여래좌상으로 육계(肉髻)가 분명한 굵은 나발(螺髮)의 머리에 결가부좌(f結跏趺坐)한 채 (왼손은 배꼽 부위에 가지런히 붙어 있고, 오른손은 땅에 닿아 있는, 악마를 굴복시키는 자세라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고 있다. (중략) 법의(法衣)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후덕해 보이는 둥근 얼굴에는 깊고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다. (하략)     

대웅전 앞에서 석조여래좌상을 설명해주는 안내판을 읽은 다음, 뜰로 내려와 '만장사 연혁' 안내판을 다시 읽어본다.


지방유형문화재 322호로 지정된 (만장사의) 석조여래좌상은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는 3부작(三部作)으로 (부처의 뒤에 세우는 둥근 빛 모양의 배경인) 광배에 연꽃 무늬를 새기고 화려한 불꽃무늬를 배치하여 장식한 것을 엿볼 수 있으며, 상호(相好, 대략 얼굴의 뜻)는 후덕해 보이는 둥근 얼굴에 깊고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다. (하략) 


2004년 12월에 만장사 주지와 의성군수의 이름으로 세워진 안내판은 '화장산 중턱에 자리잡은 만장사는 오묘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으로 이름난 기도 도량'이라는 점과, '문화재 보유와 전통사찰 지정, 특히 기도의 효험이 널리 알려지면서 외지인의 내방이 잦고, 사찰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중창 불사(佛事)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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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사 대웅전 앞에 서서 바라보는 산능선의 풍경. 가운데에 쑥 들어간 부분이 부처바위라고 한다. 시간이 없이 그곳까지 올라보지 못한 것이 한인데, 언젠가는 반드시 아침 일찍 출발하여 부처바위까지 답사할 계획이다. ⓒ 정만진


과연 만장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 아름다움이 대단하다. 산제지 서쪽에서 시작한 산줄기는 만장사와 화장산성을 거쳐 금당재로 북상하였다가 좁은 들판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다시 산제리 동쪽을 죽 에워싸는데,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세찬 굴곡으로 산경의 참맛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만장사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산등성이 가운데에 불쑥 힘차게 솟아오른 거대 바위의 원경은 아득하게 떨어져 있는데도 마치 부처의 얼굴인 양 뚜렷하게 눈에 들어와 신비롭기까지 하다. 특히 대웅전 앞 네 그루 사천왕 소나무들을 근경으로 하고, 그 뚜렷한 나무둥치 사이에 앉아 있는 탑을 중경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와 부처바위를 원경으로 하여 그 모든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눈에 담아보면, 안내판이 스스로 '오묘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이라고 자찬한 것을 고스란히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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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의병장 김태 선생을 기리는 재실. 세 그루 향나무가 호기를 뽐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정만진


만장사에서 내려와 마을을 지난다. 의성군 홈페이지가 '일찍이(1930년) 저수지(산제지)를 만들고 생계가 넉넉한 마을이었다'고 소개하는 산제리,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고, 오랜 세월 석조여래좌상을 지켜온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가, 마을 아래 산제지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특히 늦가을, 안평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산자락이 물 위에 울긋불긋하게 비칠 때면 그 어느 호수에도 뒤지지 않을 멋진 경치를 보여준다.

임진왜란 격전지답게 의병장 유적도 있고

화장산성을 둔 산제리가 임진왜란의 현장이니, 그 유적도 없을 리 없다. 화장산성 자체도 물론이지만 왜란의 역사를 말해주는 답사지는 들판에도 있다. 왜란 때 창의(倡義)를 한 김태(金兌) 공을 기리는 비석과 재실이다.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水月堂先生(수월당선생)安東金公兌(안동김공태)忠義碑(충의비)' 푯말을 보지 못해도 이곳은 찾기가 정말 쉽다. 이미 도로를 지날 때 나그네는 큰 느티나무와 잘 가꾸어진 세 그루의 향나무들과, 말끔하게 지어져 있는 기와집 한 채를 보면서 '저곳은 어디일까' 싶은 호기심을 갖게 마련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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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의병장 김태 선생을 기려 세워진 충의비 ⓒ 정만진


길가에서 바로 보이는 충의비를 만나러 들판 안으로 들어간다. 이미 사진은 도로변에서 여러 번 찍었다. 바람에 출렁이는 벼이삭들과,  그 너머로 웅대하게 자라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만으로도 그림은 너무나 예뻤기 때문이다. 특히 왜적을 맞아 창의의 민족혼을 보여준 역사적 장소라는데, 더 말해 뭣하리.

재실 앞에 가면 세 그루 향나무가 감동적이다. 나무들이 크기도 만만하지 않지만, 세 그루가 나란히 서서 하늘로 솟구친 모습은 그들이 마치 의병장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물론 임진왜란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어서 그런 느낌이 일어났겠지만, 으레 향나무라면 용트림을 하듯이 커다랗게 굽으면서 자라는 것이 보통인데도 이곳의 향나무들은 굽지도 않고 직선으로, 셋이서 나란히, 커다랗게 자라있는 장관을 보여준다. 향나무의 이런 모습은 보기 드문 일이다. 찾아온 나그네에게 향나무는 사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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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에 묻힌 불상을 보호하면서 자라고 있던 네 그루가 소나무가, 그 자리에 법당이 지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정만진

덧붙이는 글 | 2011년 11월, 2012년 5월에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2011년 11월, 2012년 5월에 다녀왔습니다.
#의성여행 #만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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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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