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반 고뿌'에 취해 어머니가 불렀던 노래는...

[서평] 강제윤 시인의 <어머니전>

등록 2012.05.29 11:06수정 2012.05.29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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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 시인의 <어머니전> 편지. 이 책의 표지그림 및 본문에 있는 모든 그림은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술가 박진강이 그렸다. 강 시인과 박 작가는 오랜 지기로 강 시인이 <어머니전>을 펴낸다고 하자 박 작가는 뉴욕에서 그림을 그려 한국으로 보냈다. 이 작업 역시 그에겐 어머니를 찾아가는 '회귀'의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 도서출판 호미


섬에서 나고 자라, 섬에서 시집가고, 자식 다섯을 '섬놈'으로 키운 나의 어미. 그는 좀체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평시 말은 여느 섬놈마냥 탁탁 끊어지기 일쑤고, 기분 나쁘면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그런 그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한두 번은 있었는데 음력설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이었다. 명절이라 음식 장만에 손이 바빴던 그는 화덕에 전 따위를 지지며 곡소린지 노랫가락인지 모를 사설을 읊어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어린 나이 애비 잃고 서럽게 자랐더니 (이제는) 멀쩡한 새끼 다 잃고 나 혼자서 바다보네. 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이것도 복이라고 죽지 못해 사는 것도 복이라고…."

어린 내가 그런 어미가 무서워 "엄마"하고 부르며 뒤에서 안길라치면 그는 얼른 눈물을 훔치곤 했다. 서러운 어미의 등판은 엇박자로 흔들거렸다. 어린 새끼 달래느라 눈물 씹어 삼키며 자신의 한을 감추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한이란 것이 그렇게 만만하게 넘어가던 것이던가.

그런 날이면 그는 소주 '반 고뿌(반잔)'를 했다. 술이 약했던 그에게 소주 반잔은 시린 눈물 멈추게 하는 황홀한 독이었다. 소주 '반고뿌'에 취기가 오른 그는 매번 제주도 한림읍이 고향인 가수 백난아의 <찔레꽃>을 예의 그 사설조로 부르곤 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리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세상 모든 어머니는 소설이다"


그래서 시인 강제윤은 그의 신작 <어머니전>을 열며 "세상 모든 어머니는 소설이다"고 했을 것이다. 내 어미 한 사람에 대한 짧은 기억조차 이렇게 파란만장한데 시인이 섬을 돌며 만난 그 많은 어미들의 사연은 인생 파노라마였을 터.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얘기한다.

"어머니들은 그 지난한 고통과 설움의 세월을 이겨 낸 비장의 무기도 간직하고 있었다. 해학과 가락이라는 무기. 삶의 부조리를 해학으로 버무릴 줄도 알고 바닥없는 슬픔을 가락에 실어 보낼 줄도 알았다. 가락을 타면 슬픔도 흥이 되는 법! 어머니들은 모두가 한가락 하는 삶의 고수들이었다."


시인은 슬픔조차 흥으로 만들어버리는 '삶의 고수들'을 섬에서 해후한다. 낙월도, 지도, 가거도, 덕적도, 연화도... 섬 어미들은 그렇게 섬처럼 저마다 홀로 서서 '한가락 하는' 자신의 삶을 노래하며 운다. 아니 울면서 춤춘다. 통영 지도에서 만난 그 어미의 가락처럼.

"갈매기는 어디로 가고 물드는 줄 모르는가. 사공은 어딜 가고 배 뜨는 줄 모르는가. 우리 님은 어딜 가고 날 찾을 줄 모르는가. 술러덩 술러덩 배 띄워라."

시인은 섬 어미들의 가락을 "그 시절 시름을 잊기 위해 불렀던 서글픈 노래가 이제는 경쾌한 가락이 되었다"며 "세월을 이겨 내고 얻은 소리"라 했다. 세월을 이겨낸 소리... 하긴 시름 잊는데 흘러가는 세월만한 것이 있던가. 그 섬마다 나고 드는 바닷물처럼 나고 들며 흘러가는 세월만이 슬픔으로 이미 섬이 되어버린 어미를 위무했을 것이다.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신 성인과 위인들의 이야기"

강제윤 시인의 <어머니전>은 서른여섯 편의 소설이고 영화다. 제 이름대신 누구의 '어미'로 불렸던, 주름 한 줄 한 줄에 켜켜이 사연을 응축시킨 우리 어머니들의 자서전이다. 알아듣기 쉬운 말인데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흥이 나는데 서럽고, 두 마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는데 속정을 진하게 느끼는 것은 그들이 바로 우리 어머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위인전 속에 나오는 위인이나 성인들은 너무도 멀리 있다. 그들은 천상의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손 내밀어도 가 닿을 수 없다. 하지만 늘 이 땅에 발 딛고 계신 위인과 성인도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식들의 위인이고 성인이다. 자식들을 위해 몸과 마음 다 바친 위인, 자식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성인. 그래서 이 책은 성인전이고 위인전이지만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신 성인과 위인들의 이야기다."

다시 어머니에게 뒤에서 안기고픈 날이다. 아니 엇박자로 들썩거렸던 어미의 등에서 낮은 목소리로 강제윤의 <어머니전>을 읽어드리고 싶은 날이다. 허면 어미는 또 울 텐가. 판박이처럼 닮은 섬어미들의 지난한 세월을 함께 타며 또다시 소주 '반 고뿌'에 취할 것인가. 눈물마저 위안이라면 편히 우시라. 소주 '반 고뿌'조차 황홀한 독이라면 들이키시라. 당신은 나의 어머니니까.

덧붙이는 글 | 이번에 <어머니전>을 낸 강제윤 시인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다. 그의 시 <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는 지금도 사람들이 즐겨 암송한다. <문화일보>가 선정한 선정한 평화인물 100인에 들기도 햇던 그는 민주화운동으로 3년 2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인권활동가로 살았으며, 보길도 귀향 시절에는 33일간의 단식으로 숲과 하천의 파괴를 막았다.

다시 돌아간 고향 보길도를 다시 떠나며 한국의 모든 섬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지난 여섯 해 동안 250여 개 섬을 걸었다. 지금은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 도서출판 호미 기획위원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등이 등이 있다.


덧붙이는 글 이번에 <어머니전>을 낸 강제윤 시인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다. 그의 시 <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는 지금도 사람들이 즐겨 암송한다. <문화일보>가 선정한 선정한 평화인물 100인에 들기도 햇던 그는 민주화운동으로 3년 2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인권활동가로 살았으며, 보길도 귀향 시절에는 33일간의 단식으로 숲과 하천의 파괴를 막았다.

다시 돌아간 고향 보길도를 다시 떠나며 한국의 모든 섬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지난 여섯 해 동안 250여 개 섬을 걸었다. 지금은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 도서출판 호미 기획위원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등이 등이 있다.

어머니전 -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소설이다

강제윤 지음, 박진강 그림,
호미, 2012


#어머니전 #강제윤 #섬 #제주도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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