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시설 없어 사고 나도 일단은 피해자 탓?

지하철서 사고당하는 시각장애인들, 사후처리에 또 한 번 분통

등록 2012.06.09 15:52수정 2012.06.0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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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직그대만>의 한 장면
영화 <오직그대만>의 한 장면HB엔터테인먼트, 51k

시각장애인 1급인 A씨는 지난 5월 2일 한국철도공사 관리구역인 서울 회기역에서 출근시간에 열차에서 내리려다가 뒷사람들에 떠밀려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에 오른쪽 다리가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평소처럼 제가 내릴 역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뒷사람들에게 떠밀렸죠. 아차 하는 순간에 오른쪽 다리가 쑥하고 빠졌어요. 거의 골반까지 쑥 들어가더라고요."

A씨는 사고를 회기역에 통보했다. 그랬더니 담당자로부터 "병원서 치료한 영수증을 가져오면 치료비를 지급하겠다"는 사무적인 대답만을 들었다. A씨는 이 사고로 허벅지에 크게 멍이 들고 상처가 나는 부상을 입었다.

"치료비가 문제가 아니죠. 이렇게 골반까지 들어갈 정도로 승강장과 전동차의 간격이 넓은 시설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역장님 면담을 신청했죠."

A씨의 요청으로 면담에 응한 회기역장은 "1호선 라인이 승강장과 지하철 사이가 너무 넓다. 그래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안전고무발판이 필요하다. 현재 서울메트로 측에 고무발판을 신청해놓은 상태이지만 예산 편성이 되지 않아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다"라고 설명했다.

철도안전법시행규칙(차량안전기준 및 관리 제43조(승강장) 제8항에는 "전동차와 승강장 가장자리의 간격이 0.1미터(10센티미터)가 넘는 부분에는 안전발판 등 승객의 실족을 방지하는 설비를 설치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일단 승객 탓으로 돌리고 보자?


그러나 이 같은 승강장 안전시설 미비에도 불구하고 손해사정업체 측에서는 이 사고를 'A씨가 잘못한 일'로 몰고 가려 했다.

한국철도공사는 한 화재보험 업체와 업무배상책임보험 계약을 맺고 있다. 사고 직후 보험사의 손해사정 업무를 위탁받고 찾아온 손해사정업체 담당자 B씨는 "A씨의 경우 '국내치료비보험'과 '손해배상보험'의 두 가지가 적용될 수 있다. 국내치료보험은 치료비만 배상하고 손해배상보험은 위자료까지 배상할 수 있는 보험이다"라며 "A씨의 잘못도 있으니 국내치료보험으로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A씨가 자신의 잘못이 어떤 것인지 묻자 B씨는 "자신이 자신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은 것이 잘못이다"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이후에 B씨는 "만일 과실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을 경우에는 치료비 전액 보장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둘(국내치료비보험과 손해배상보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현재 사고의 배상처리 과정에 대해 "현재 과실 책임이 어디 있는지 변호사에게 법률자문을 의뢰한 상태로, 귀책사유가 A씨가 아닌 철도공사 측에 있을 경우 손해배상보험으로 처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지하철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에 다리가 빠지는 사고를 당한 시각장애인 A씨의 허벅지
지하철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에 다리가 빠지는 사고를 당한 시각장애인 A씨의 허벅지신경호

항의하고 싸워야만 권리 찾을 수 있는 건가

이런 일은 A씨만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26일 인천 지하철 부평구청역에서 선로로 추락한 시각장애 1급 김경식씨는 갈비뼈에 금이 가는 등의 부상으로 한 달간 입원을 해야 했다. 당시 사고는 부평구청역에 설치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유도 블록의 그릇된 설치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관련기사 : <'사람 잡는' 지하철역, 노란 안전선이 왜?>).

그러나 김씨가 정작 화가 난 것은 이런 그릇된 점자유도블록보다 사고 뒤 인천지하철공사측에서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 때문이었다. 김씨는 사고 후 공사 측 직원으로부터 "어차피 승객이 잘못한 일이므로 아무리 크게 다쳤어도 치료비가 100만 원밖에 안 나온다"라는 대답을 끝으로 아무런 안내나 최소한의 위로나 사과도 받지 못했다.

"제가 사고를 당한 역은 점자블록이 규정에 맞지 않게 설치되어 있었어요. 그러나 사고 후 공사 측에서는 나의 잘못이라며, 치료비조로 보험처리 가능액이 100만 원이라는 소릴 들었어요. 그것으로 끝이었죠. 최소한 미안하다든가 하는 소리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인천지하철공사가 체결한 업무상배상보험의 약관은 크게 두 가지. 귀책사유가 어느 쪽에 있는가에 따라 보상 한도액이 달라진다. 우선 안전시설 미비나 공사 직원 과실 등 공사 측에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는 피해 승객 1인당 최대 4000만 원(1사고당 최대 10억 원) 한도의 보험계약이 체결되어 있고, 귀책사유가 승객에게 있는 경우엔 특별약관으로 치료비 지급한도액이 최대 100만 원이다.

김씨가 입원한 한 달 동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와 대한안마사협회 인천지부는 인천도시철도공사에 장애인의 안전시설 미비 등을 항의하고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내고 항의방문을 하기도 했다. 결국 사고 후 45일 정도가 지난 뒤에야, 김씨는 공사와 업무상배상보험을 체결한 보험사로부터 약간의 위자료를 포함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었다.

김씨의 사고에 관한 인천도시철도공사의 처리과정을 담당한 공사 고객만족팀의 이종섭 차장은 "처음 치료비가 100만 원밖에 안 된다는 안내는 잘못된 것 같다. 김씨의 경우 점자유도블록 설치의 잘못 등 우리 공사에 책임이 있는 만큼 특별약관이 아닌 보통약관으로 손해배상 처리를 한 케이스"라며 공사 측의 안전 시설 미비 등을 시인했다.

유가족에게 책임을... 두 번 세 번 고통 겪는 장애인들

한국철도공사, 서울지하철, 인천지하철 등 수도권을 운행하는 도시철도들은 모두 업무상배상책임 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그런데 보험게약에서 운행주체인 공사들에게 귀책사유가 없는 경우 '특별약관'으로 치료비를 보상하는 계약을 맺고 있다. 서울과 인천지하철은 특별약관에서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이 100만 원, 한국철도공사는 500만 원까지이다. 대개의 사고 시 공사 측에선 이런 계약 때문인지 우선 승객의 탓으로 돌리고 보는 것이다.

현재 수도권을 달리고 있는 도시철도는 운행주체가 모두 다르다. 그러나 모든 운행주체들이 일단 사고가 나면 잘못을 승객에게 돌리려는 경향은 똑같다. 지난해 주안역에서 사고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한 유가족은 사고 뒤 철도공사의 일처리 때문에 두 번 세 번 고통을 겪어야 했다(관련기사 : <주안역 추락 사망 시각장애인 유가족 '분통'>).

안전 시설 미비와 시각장애인 유도 리모콘 고장 등의 명백한 잘못에도 철도공사 측은 책임을 사망한 사고 당사자와 곁에서 지켜보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시각장애인 남편에게 돌렸다. 결국 재판까지 가는 과정을 통해 손해배상을 받아야 했던 가족들은 두 번 세 번 가족을 잃는 아픔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어느 지하철공사 직원은 "일부러 넘어지거나 다른 곳에서 다치고 역에서 다쳤다고 떼를 쓰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라고 하기도 했을 정도다.

이런 인식이 있는 한 계속되는 사고와 이러한 사고 과정에서의 무성의함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크린도어나 안전 고무판 등 승객의 안전 이용에 필요한 설비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다. 특히 장애인 등 배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더욱 절실하다. 지하철 안전사고에 좀더 세심하고 꼼꼼한 처리가 요구된다. 더욱이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이 대개의 경우 이 사회에서 보호받고 배려가 필요한 장애인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지하철사고 #한국철도공사 #서울매트로 #수도권 전철 #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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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1급 시각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과 그 삶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을 기사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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