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이 무서워? 수천 년 동안 이런 남편은 없었다

[서평] 매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

등록 2012.06.12 11:56수정 2012.06.1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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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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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남편 두현은 결혼생활이 감옥처럼 느껴지지만 아내 정인이 무서워 정작 이혼의 '이'자도 못 꺼내는 소심한 남편이다. 구약시대 이후 수천 년 동안 이런 남편은 없었다. 고대에는 아내가 남편의 재산이었고, 중세에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합법적이었으며, 오랜 시간 아내의 위상이란 그저 출산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남자는 강하고 적극적이어야 하며, 여성은 약하고 수동적이어야 한다. 여성이 지녀야 할 가장 바람직한 덕성은 친절함이다. 여성은 남편이 아내에게 가하는 부당한 일과 잘못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일찌감치 배워야 한다. (<아내의 역사> 본문 229쪽)


이것이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에밀>에서 말한, 남성과 남성이 만들어낸 법률과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바라본 바람직한 아내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세상이 많이 변한 지금까지도 남자들은 머릿속에 이런 여성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만약 루소가 환생해서 두현과 정인을 본다면 기함하고 까무러치지 않을까.

그들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 남성 중심의 헤게모니가 제대로 뒤집어졌으니 말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미셸 클레이만 젠더 연구소에 재직하고 있는 사회문화사의 대가이자 저명한 원로 여성학자 매릴린 옐롬은 <아내의 역사>(책과함께)를 통해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아내 이브에서부터 현대의 아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내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결혼과 성(性)에 대한 관념을 비롯하여 아내로서의 삶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이야기한다. 50쪽이 넘는 주석과 참고문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아내의 역사>는 성경에서부터 잡지 <코스모폴리탄>까지, 공적 기록뿐 아니라 일기, 편지, 회고록과 구술기록을 비롯한 방대한 기록물을 통해 과거 여인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더욱이 <아내의 역사>는 역사에 족적을 남긴 뛰어난 여인들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아내들을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깊다. 아쉬운 점이라면 세상의 아내가 서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진대 <아내의 역사>가 서양, 그 중에서도 주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일부 서유럽의 아내들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마치 여성의 지위를 비롯한 세상의 변화를 우리가 이끌어왔다는 식의 서유럽 중심주의적 사고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서양과는 관습, 제도, 도덕이 사뭇 달랐던 동양의 아내들에 대한 역사를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면 더욱 흥미진진했을 텐데 말이다.


결혼은 선택, 이혼은 필수인 시대... 과거에는?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결혼하지 않는 것은 결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혼하는 것은 인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재혼하는 것은 기억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결혼 문화를 꼬집는 우스갯소리다. 요즘에는 '결혼은 선택, 이혼는 필수'라는 말도 있지만, 과거에는 어땠을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결혼형태가 남녀 간의 결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결코 아내와만 성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남편은 아내 외에 첩, 남녀 노예, 남창과 매춘부, 그리고 남녀 애인 등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와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다만 공식적으로 유일한 금단의 열매는 다른 시민의 아내였다고 한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종족번식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방법이 결혼이라고 믿었다. 반면 초기 기독교는 결혼보다 독신을 높이 평가했다. 아내나 남편을 얻는 것이 하느님과 결합하는 좀 더 근원적인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신의 계율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시대의 엘리트들에게 이혼은 일상다반사였다. 이혼의 이유도 다양했다. 남자의 경우 자식을 낳아줄 여자를 얻기 위해서 이혼했다. 출세를 위해 이혼하는 경우도 아주 흔한 일이었다. 실제로 폼페이우스나 안토니우스 같은 거물 정치인들은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다고 하니, 그 누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욕할 수 있을까.

결국 풍속이 문란해지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율리우스 법'이란 법을 공표했다. 괘씸한 것은, 남편은 아내의 간통에 대해 기소할 수 있지만 아내는 남편의 간통죄에 대해 형사고발할 권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남자에게만 특권을 부여하고 피해자가 아내일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 불평등한 법이었다.

중세의 결혼은 남자가 공식적으로 아내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제도였다. 농민계급에서 결혼은 두 사람이 공동의 생존을 위해 자원을 함께 모으고자 하는 일종의 경제적 계약이었다. 신부는 최소한 침대와 젖소 또는 가재도구 등을 지참금으로 가져와야 했고, 남편은 거처를 제공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렇다면 농부에게 결혼은 그저 경제적 계약이 전부였을까? 물론 아니다. 남녀가 만나는데 서로에 대한 관심이 어찌 없었을까. 오늘날 연예인들의 결혼 발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혼전임신은 중세에도 흔한 일이었다. 단지 주변의 시선은 달랐다. '임신이 혼수'라는 말이 널리 퍼져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혼전임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따가운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중세에는 여자가 수태함으로써 불임이 아님을 증명한 후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사생아를 낳아도 그다지 비난받지는 않았다. 물론 상류층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어쨌든 혼전임신보다는 오히려 피임이나 중절 성교, 임신 중절이 죄악으로 여겨졌다. 중세 교회가 성적 쾌락은 죄악으로 간주했더라도 출산은 장려했기 때문이리라.

프랑스 인권선언에 여성은 없다

 <아내의 역사> 표지
<아내의 역사> 표지책과함께
남성의 권력에 억압된 삶을 살아왔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미국 독립혁명을 거치면서이다. 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내 애버게일 애덤스는 모든 여성의 행복을 지상의 법률로 보장해야 한다며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특별법 제정을 주장한다.
독립혁명 중 정치의식이 싹튼 여성들은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어떤 경우에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이혼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미국 독립혁명의 바람은 유럽 대륙의 프랑스로 옮겨갔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선언했다고 배워왔던 '프랑스 인권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 알고 보니 사기였다.

인권선언의 제1조는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공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이다. 그런데 기혼, 미혼, 사별, 재산의 유무를 막론하고 여성은 이 인권선언의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1791년 국민의회 의원들은 선언한다. 그럼 여성은 인간이 아닌가? 씁쓸한 대목이다.

프랑스 인권선언에서조차 제외되었던 여성의 인권은 그 후 200년 동안 많은 이들의 노력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하는 여성의 비율이 늘어나면서 여성들이 주부로서 가정에만 매이지 않게 되었다. 남편에게 의존하고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전통적인 아내상은 더 이상 이상적인 아내상이 아니다.

과거에 비해 여성의 발언권이 커지고 누구든 제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게 되었지만, 오늘날 여성들은 아내로서의 삶을 어떻게 느낄까?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광고 카피처럼 실제로도 행복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오늘날 역시 아내로 살아가는 일이 과거와 비교하여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아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은 덜 성숙한 이 시대의 남성들이 자신의 아내가 슈퍼우먼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내가 바깥에서 사회활동을 통해 돈도 벌면서 한편으로는 전통적 아내의 모습처럼 집안 일 역시 잘 하기를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독신이다"라는 농담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사회가 새로운 아내상을 만들기 위해 출산의 고통을 치러야 한다 해도 대중들은 '가련한 여성'의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역사는 만들어진다. 그것이 지난 수천년간 우리가 보아온 역사 아닌가.

저자가 본문 중에서 말한 것처럼, 한 사회를 사원에 새겨진 부조나 정부 문서에 기록된 공식적인 얼굴로 판단하는 것과, 여성들이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바를 주관적으로 기록한 시, 편지·일기·회고록 등에 나타난 그 사회의 맨 얼굴을 보고 평가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런 점에서 <아내의 역사>는 수천 년 아내들의 맨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하고 흥미로웠다.

덧붙이는 글 |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씀, 이호영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2년 5월


덧붙이는 글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씀, 이호영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2년 5월

아내의 역사 - 최초의 아내 이브부터 <인형의 집> 노라까지, 역사 속 아내들의 은밀한 내면 읽기

매릴린 옐롬 지음, 이호영 옮김,
책과함께, 2012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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