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천만원 주고는 '나몰라라', 그게 문제입니다

550개 '마을기업'의 빛과 그림자... "수익보다 지역이 먼저"

등록 2012.06.17 20:29수정 2012.06.1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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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울 성동구 마을기업 성동제화협회 회원사의 한 직원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서울 성동구 마을기업 성동제화협회 회원사의 한 직원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 정민규


거친 손과 둔탁한 망치로 가죽을 펴고 징을 박는다. 칫솔에 본드를 묻혀 밑창에 바르고 굽도 붙인다. 작은 공방 안은 본드 냄새와 가죽 염료 냄새만 가득하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본드 냄새가 배었다. 30년째 같은 일만 해온 장인이 만든 구두가 이렇게 완성됐다.

그런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건만 장인이 만든 구두는 장인의 이름을 밝히지 못한다. 구두에는 장인의 이름 대신 우리가 아는 유명 제화업체의 상표가 붙는다. 백화점에 진열된 구두는 비싼 값에 팔려 누군가의 발에 신긴다. 적지 않은 돈에 팔린 구두지만 장인의 거친 손엔 적은 돈이 쥐어진다. 이것 역시 30년째 같다.

여기까지는 어제도 봤고, 그제도 봤던 식상한 내용이다. 골목까지 치고들어온 대기업 빵집과 찻집에 고전하는 동네 가게들, 하청 주문이 없으면 당장 내일부터 밥줄이 끊기는 영세 기업들. 저마다 업종은 다르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비슷하다. 내 이름이 붙은 가게와 제품, 내 손에 떨어지는 노력한 만큼의 가치.

마을 기업들의 '로망', 성수수제화타운

서울 성동구 구두 장인들이 모인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구두공방을 포함해 600개도 넘는 구두 관련 업체가 모인 성수동에 1999년 성동구 제화사업주협회(성수수제화타운)가 생겼다. 우리 이름을 건 우리 제품을 만들자는 꿈같은 생각에 업체들이 동참했고 종잣돈 6천만 원도 모였다.

a  성동구 마을기업 성동제화협회 공동작업장에서 작업자가 구두를 만들고있다.

성동구 마을기업 성동제화협회 공동작업장에서 작업자가 구두를 만들고있다. ⓒ 정민규

하지만 여전히 돈은 부족했다. 그때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2010년 행정안전부에서 진행하는 '마을 기업'에 선정된 것이다. 행안부 지원금을 보태 판매장을 얻었다. 40개로 시작했던 협회 회원사가 지금은 100개도 넘고 두 번째 매장도 새로 냈다. 성수수제화타운은 마을기업의 성공 신화가 됐다. 오늘도 수많은 마을 기업은 또다른 성수수제화타운을 꿈꾼다.

성수수제화타운과 같은 마을 기업은 2010년 9월 행안부가 본격 지원에 나서며 만들어졌다. 행안부는 오는 2013년까지 마을 기업을 1000곳으로 늘리겠다는 야심찬 포부도 밝혀놓은 상태다.


마을 기업으로 선정되면 지원금 8000만원이 2년동안 나눠 지급된다. 경영 컨설팅과 상담도 이루어진다. 이런 전폭적 지원 속에 현재 550개가 넘는 마을 기업이 전국에서 운영 중이다. 2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마을 기업들은 다들 안녕하실까?

마을 기업, 필요는 하지만...


일단 전문가들은 아직까지 마을 기업의 성패를 논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우후죽순식 마을 기업 늘리기가 자칫 내실없는 공염불로 끝나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도 함께 내비쳤다. 일부지만 마을 기업이란 이름을 이용해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준비없는 도전으로 마을공동체에 금만 가는 결과가 빚어지기도 한다.

a  서울 성북구 장수마을의 마을기업인 동네목수에서 주민 김금춘씨가 목재를 다듬고 있다.

서울 성북구 장수마을의 마을기업인 동네목수에서 주민 김금춘씨가 목재를 다듬고 있다. ⓒ 정민규



마을기업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주민들에게 부담이 되는 곳도 있다. 성북구 장수마을에는 대안 주거환경 조성을 위해 설립된 마을 기업 '동네목수'가 있다. 오래된 것 허물고, 거기에 말끔한 아파트 올리고는 주거개선이라 박수치는 지금의 부동산 개발에 반기를 든 당찬 도전이다. 살던 사람 쫓아내지 않고 살던 사람들이 동네를 바꾸자는 도전에 사람들은 관심을 보였다. 언론도 그들을 조명했다. 

그런데 박학룡 동네목수 대표는 기자들 방문이 달갑지 않다. 마을기업이 하는 주택개량사업이 언급되면서 임대료가 오른 것이다. 주민들이 살지도 못하는 아파트 지어서 주민 쫓을 바에야 우리가 동네를 가꾸자며 마을을 가꿨다. 그런데 살지도 않는 집주인들이 동네가 좋아졌으니 임대료를 올려달라고 한다. 그래서 박 대표는 기자들이 안 찾아왔으면 좋겠단다.

박 대표는 마을 기업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마을 공동체를 위한 마을 기업 기본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13일 만난 박 대표는 "우리는 일반 기업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열악한 지역 환경 개선에 초점을 둔다, 지속 가능성만 따지면 마을 기업을 접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산이 투입되고 성과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보니 마을 기업이 얼마나 수익을 내는지에만 관심이 집중돼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복지공동체 '여민동락'의 설립자인 강위원 광주 광산구노인복지관장도 같은 말을 했다. 강 관장은 12일 전화 통화에서 "경영 능력을 따지다보니 마을 기업 형태로 포장해서 지속 가능성은 유지되지만 취지는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강 관장은 "마을 기업은 대부분 실패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국고 8천만원을 받은 후에 제대로 된 지원이 없다보니 돈만 받고 사업을 정리하는 것처럼 돼버렸다"고 말했다. 마을 기업이란 용어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정기석 마을연구소 대표는 "관과 마을기업 중간에서 마을기업을 육성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의 지원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국은 민관 참여 기구로 지역공동체 지원

a  서울 성북구 장수마을에서 주민들이 시설 개선 공사를 하고있다.

서울 성북구 장수마을에서 주민들이 시설 개선 공사를 하고있다. ⓒ 정민규

그런 점에서 영국은 모범 사례로 꼽힌다. 영국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커뮤니티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지역 커뮤니티 사업을 벌여왔다. 2000년 지방자치법을 제정한 영국은 자치단체와 공공기관, 민간기업, 주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지역전략파트너십을 꾸려 지역 공동체를 지원하고 있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현재 영국의
사회적 경제 규모는 46조 원에 달할 정도로 성장한 상태다. 사회적 경제란 지역민이 지역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해 지역 사회 전체의 이익에 공헌하는 경제구조를 말한다.

지원 조직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립기반 마련이다. 성북구청은 전국 최초로 '사회적 경제 제품 구매 촉진 및 판로 지원에 관한 조례'를 입법예고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성북구와 산하 공공기관은 2000만 원 이하 수의계약에 한해 사회적 기업 제품을 우선구매하게 된다.

지난 13일 만난 이해삼 성수수제화타운 사무국장은 "마을기업 제품을 공공입찰에서 우선 고려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고 반겼다. 다만 그는 "기업의 규모로 보면 마을기업은 영세 소기업인데 (공공구매에) 해당되는 상품이 몇 가지나 될까 의문"이라며 "구청에서 구두를 구매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전국적인 판매 지원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을 기업 성공의 핵심은 사람"

더불어 전문가들이 마을기업의 성공요인으로 일관되게 꼽은 것은 바로 '사람'이다. 김재경 (사)커뮤니티와경제 대표는 "사람이 핵심"이라며 "좋은 사람을 리더로 키우고 자신들의 협의체를 만들어 상호구조화된 네트워킹이 형성되어야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돈이 흘러가는 것이라서 자칫 잘못하면 나쁘게 쓸 수도 있다"며 "아무리 괜찮은 사람도 다른 마음을 먹기 쉽다"고 지적했다. 또 김 대표는 "이웃과 함께 가려는 마음을 길러내는 게 중요하다"며 "하다보면 갈등도 만만치 않고 결정 과정도 더뎌서 힘들지만 설득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해삼 사무국장도 이해관계가 각자 다른 업체들을 묶어 성동제화협회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머리가 다 샐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내적 구성원들 간의 민주적인 의사 결정구조가 없으면 안 된다"며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일사불란하게 집행되는 민주적 훈련이 내부적으로 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을기업 #성동제화협회 #동네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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