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자료사진)
유성호
말로만 듣고 TV로만 보던 그였다. 사소한 발언 하나 따내기 어려워 기자들 사이에서 "당 대표급 초선"이라 불리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을 직접 만났다.
지난 15일 점심 자리였다. 이 의원과 만나 허심탄회한 얘기를 듣고 싶어했던 기자들은 끊임없이 이 의원에게 점심이든 저녁이든 한번 자리를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런 기자들의 요구에 화답하는 형태로, 이 의원은 여러 기자들이 만든 점심자리에 나섰다. 기자도 우연히 합류하게 됐다.
그는 통합진보당 경선 부정 사태 이후 항상 화제의 인물이었다. 짧은 말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수많은 기자가 이 의원의 아침 출근길에 따라붙었고, 빈 의원회관을 지켰다. 이른바 '뻗치기 취재'다. 기다리고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쉽게 보기 힘든 이 의원을 직접 만난다니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비단, 긴장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기자 10명 앞에 앉은 이 의원의 손은 떨렸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이 의원은 끊임없이 자기 손을 지압했다. .
이날 자리는 각 언론사에서 가장 연차가 낮은 '말진' 기자들과의 만남이었다. 이 의원은 "젊은 일꾼들이니까, 젊은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있다, 사회의 미래"라며 오찬 자리에 응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동안 이 의원을 향해 '색깔론' 공격을 끝없이 쏟아낸 <조선>,<중앙>,<동아> 기자들도 함께했다. 이 의원은 "나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고 뻗치기도 많이 했으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정치적 입장 다 배제한 채', 밥 한끼 사드린다"고 말했다.
'전체 비보도'였던, 이석기 의원과의 오찬....비보도 깨진 이유는?애초 그를 만난 얘기를 기사로 풀어낼 계획은 없었다. 점심자리 발언 모두가 '오프더레코드(비보도)'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마따나 "말도 섞어보지 않은" 조중동 기자들과의 점심 자리가 부담스러웠을까. 간담회 자리는 처음부터 '비보도 전제'가 깔렸다. 이 의원은 재차, 삼차 비보도를 부탁했다. 기자들은 "그러겠다"고 수긍했다.
그러나 타사 데스크가 그 '전제'를 강제로 깨도록 만든 발언이 식사 도중 튀어나왔다. 문제가 된 바로 "우리는 국가(國歌)가 없다, 애국가를 국가로 정한 바가 없다"는 발언이다. 당의 새로나기 특별위원회 토론회를 봤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 의원은 "토론회에 동의할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라며 "애국가 부르는 것도 김어준 말처럼 '쫄지마 XX'다, 애국가 부르면 쇄신이냐 XX, 황당한 닭짓"이라고 말했다. 새로나기 토론회에서 당 행사 시 애국가 제창 등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 문화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 데 대한 불편한 심기 표출이었다.
다소 수위가 높지만, 이제까지 공개적으로 밝힌 주장을 되풀이한 발언이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는 "우리는 국가가 없다, 국가를 정한 바가 없다"라며 "애국가는 그냥 나라 사랑하는 노래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민족적 정한과 역사가 있으니 아리랑 등이 실제 우리 국가 같은 것"이라며 "애국가 부르기를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라고 밝혔다.
이에 함께 자리한 기자들은 "국가는 없다고 기사가 나가면 엄청난 댓글이 달릴 것"이라며 "이런 걸 자제하며 대중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의외로 그는 순순히 "좋은 의견"이라며 수긍했다. 앞서 젊은 기자들을 향해 "젊은 일꾼"이라고 표현하자 기자들이 '생소하다'는 반응을 보인데 대해서도 "일꾼은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면서도 "(내가) 일꾼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중적인 언어, 정치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게 필요하다"라며 "내가 서툴다, 그런 게 보이면 (말해 달라), 나는 고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조중동 기자들을 더 자주 만나야 한다"며 농 섞인 충고를 했다.
자연스럽게 질의응답이 이어졌지만, 기자들의 머릿속은 벌써 복잡해졌다. 기자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이 의원은 전혀 이 상황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뒤이어 "진짜 종은 종미(미국)에 있다"는 발언을 더했다. 그는 "종북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자유로운 인간이 누구의 종이라는 말이냐"라며 "그렇게 보자면 진짜 종은 종미에 있다"고 말했다. 쐐기를 박은 셈이다.
그가 연루된 지하간첩단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에 대해서도 "당시 수사기록에 대해 한 마디 한 적도 없고 지문 하나 찍은 적 없다"라며 "그 때 실형 받고 끝난 거니 그 얘긴 하지말자, 민혁당 자체가 어마어마한 괴물 아닌가"라고 말했다. 자신은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는 맥락으로 읽혔다.
혁신비상대책위원회에 대해서 그는 "강기갑 비대위는 당원들에 의해 만들어진 직접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라고 깎아내렸다. 사퇴에 대한 의견도 그대로였다. 그는 "당원들의 총의를 묻는 방식으로 하면 된다"라며 "내가 사퇴하면 부정선거라는 걸 인정하는 거다, 당원들은 공모자가 되는 것"이라며 사퇴 거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석기 해명 "애국가 부정한 게 아니라"...같은 당 의원도 이해 못해 점심 식사의 마지막 즈음, 그는 정치권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한 데 대해 "치열한 공방의 중심에 있다보니 말 한번 잘못하면..."이라며 "굉장히 무겁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진보정당이 도약할 시기인데 슬기롭게 잘해서 진보정당이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거듭나야 할 진보당의 발목을 또 그가 잡았다.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다는 그의 발언은 바로 다음 날 대서특필됐다. '비보도' 전제는 일부 언론에 의해 깨졌다. 애국가 발언이 논란이 되자 이 의원 측은 언론을 통해 "애국가를 부정한 게 아니라 새로나기 특위의 활동이 진보정당의 가치와 맞지 않다고 말한 건데 오해가 있었다"고 밝혔다. 더불어 "(기자들과) 인간적인 거리를 좁히는 자리였다"며 "비보도를 전제로 얘기한 것이 기사로 나와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비보도의 전제가 지켜지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비보도는 취재원과 기자 사이의 약속이므로. 이 의원으로서는 젊은 기자들과의 신뢰에 금이 갔다고 황당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의원은 기자들이 묻지도 않았음에도 스스로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라고 말했다. 상식의 선에 비춰봤을 때 절대 다수의 대중은 이해하지 못할 지점이다.
이 의원 측은 이 발언에 대해 "새로나기 특위 활동이 진보정당의 가치와 맞지 않다는 뜻"이라고 밝혔지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이 의원이 "애국가 부르면 쇄신이냐"라고 말한 정도만 새로나기 특위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그 뒤의 발언은 기자의 질문에도 부합하지 않은, 이 의원 본인의 생각이 흘러나온 부분이다. 애국가 부정은 '오해'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심상정 통합진보당 의원이 17일 기자들과 만나 "딴 세상에 사는 것 같다"며 이 의원을 질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헌법을 뒷받침하는 국회의원이 국가를 부정하면 공인 자격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이 의원이 겨냥한 새로나기 특별위원회 위원장인 박원석 의원은 같은 날 트위터에 "신묘하고 깊은 전략가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무뇌 성향인지, 입만 열면 지구인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달나라에서나 통할 얘기들"이라고 일갈했다. 이 의원 측은 '오해'라고 했지만 이 해명은 자당 의원들도 이해못할 발언이었던 셈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공유하기
이석기 의원과의 오찬... 비보도 깨진 이유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