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예요!'는 잘못, '김가예요!'가 맞아

군산의 한국사 교사가 전하는 '군산의 성씨와 가문'... 군산학 일곱번째 강의 열려

등록 2012.06.24 09:50수정 2012.06.2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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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성씨와 가문에 대해 강의하는 김두헌 교사 ⓒ 조종안


19일 오후 7시 전북 군산시 수송동 군산 시립도서관 5층 교양문화실에서 열린 '群山學'(군산학: 군산을 제대로 이해하기) 일곱번째 강좌에서 김두헌 군산 중앙고등학교 교사(한국사)는 군산의 성씨와 가문, 입향(入鄕)과 거주지 이동 등을 중심으로 강의를 펼쳤다.

시작에 앞서 김 교사는 "군산학 강좌 강단에 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오늘 와보니 수강생님들 중 처 당숙모님도 계시고, 초등학교 후배도 계신다. 알음알음 아는 분도 계시고···. 아무튼 지역사회는 참 좁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큰일 나겠다"고 해서 웃음을 자아냈다. 


김 교사는 우리가 성씨와 가문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로 "전통 한국 사회에서 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던 조선에서 어느 한 개인은 가문 내에서 존재했고, 사회인으로의 지위와 역할까지 규정했다는 것.  

조선 시대에 가문은 능력과 함께 개인이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꼽혔다. 조선 후기까지도 관직에 진출하려면 문과에 급제해야 했다. 그러나 급제 뒤에는 항상 가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으며 가문이 좋지 않으면 고위관직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호주제 폐지(2005년) 이후 부모 성을 함께 사용하는 젊은이가 더욱 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를 만났을 때 상대가 누구의 자손이고, 본관은 어떻게 되는지가 묻는다. 그처럼 가문과 혈통을 중요시하는 풍조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씨와 가문이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가부장적 전통과 함께 조상신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각종 종친회가 열리고, 명절에는 '민족의 대이동'으로 불리는 귀성행렬이 이를 대변한다.

본관(本貫)은 같아도 신분이 다른 경우 많아


김 교사는 본관(本官)의 기원에 대해 "본관은 대부분 봉군(封君)에서 유래하며, 본관과 거주지는 다른 경우가 많다"며 "'전주 이씨=완산 이씨, 경주 김씨=월성 이씨'처럼 이름은 달라도 지역은 같은 이명동의(異名同意) 본관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본관 내에도 양반, 서얼, 중인, 양인 등이 존재했다. 서얼도 첩의 신분에 따라 서자와 얼자로 나뉘었다. 대를 이을 적자 출산과 부양, 생리적 욕구로 첩을 두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관직에 올랐다고 해서 모두 양반은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중인은 넓은 의미에서 양반 서얼, 기술적 중인, 향리, 경아전 서리 등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기술적 중인은 역관(통역·번역 업무), 의관(질병 치료), 율관(법률 담당), 운관(경서 인쇄, 교정 등 담당), 사자관(규장각 소속), 화원(도화서 종사) 등을, 향리는 지방 아전, 서리는 서울 아전을 말한다.  

김 교수는 양인(良人)과 평민(平民)은 다른 의미라고 했다. 양인은 착한 사람, 선량한 백성으로 천민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평민은 주로 사족(士族)과 같은 양인의 상층부 또는 향리·승려 같은 특정계층과 다르게 보통사람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김씨예요!'는 잘못, '김가예요!'가 맞는 표현

김 교사는 요즘 학생들에게 성(姓)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면 흔히 '김씨예요!', '이씨예요!'라고 대답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씨'는 왕족과 황족 등 귀족층이 쓰던 극존칭이므로 '김가예요!', '이가예요!'라고 해야 맞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성씨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중국 문헌(신당서, 구당서)에 따르면 삼국 시대로 추정된다. 삼국 시대 이전에도 성씨가 존재하긴 했으나 왕족이나 귀족층으로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왕족과 귀족들이 다른 씨족과 구분하고 차별하기 위해 사용하던 성씨는 당나라 영향이 컸던 신라 후기에 들어와 일반 귀족층으로 더욱 확산했다. 이어 신분질서의 혼란이 거듭되었던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다양한 형태의 성씨가 자리를 잡게 된다.

각 지방에 성씨들이 뿌리를 내린 시기는 대체로 고려 초·중기로 알려진다. 이때 성씨와 함께 본관이 형성되었으며, 그 지방의 토호로 자리 잡는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일반 서민들은 성씨를 갖지 못하고 이름만으로 자신을 나타냈다고 한다.

긴 세월에 걸쳐 형성된 성씨는 몽골군의 수차례 침략으로 혼란했던 고려 중·후기, 격변기였던 조선 초기,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 등 전쟁과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전쟁과 혼란기 때마다 사라지거나 바뀌고, 새로운 성씨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양한 성씨의 군산 입향과 거주지 이동

김 교사는 오래 전부터 군산 지역에 뿌리를 내린 주요 성씨로 고(高), 두(杜), 문(文), 전(田), 강(姜), 심(沈), 황(黃), 채(蔡), 이(李), 조(趙), 한(韓)씨 등을 꼽았다. 입향 시기는 각기 다른데 12세기 중엽 고순겸이 옥구에 정착하여 高(제주 고씨)씨가 가장 오래된 성씨로 알려진다. 다음은 蔡(평강 채씨)씨로 고려말 조선 초기 채양생과 채지성이 임피에 정착했다 한다.

김항석 전 군산대 대학원장은 "예로부터 임피·옥구는 고씨, 회현은 두씨, 개정·옥산 문씨, 상평·옥구 전씨, 나포·임피 심씨와 황씨, 성산·임피·서수 채씨 등이 토반으로 자리를 잡았다"며 "김(金)씨는 하도 많아 집성촌이 없으며 임진왜란 전후로 성씨의 대이동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다양한 성씨가 군산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왕조 교체, 사화(士禍) 등 정치적 이유, 채왕택(두문동 현인)과 그의 후손들처럼 이념에 의한 충의 실천, 학문(경연, 서연 등)과 언론(諫爭)의 정치, 삼사의 역할, 풍수지리설, 혼인(외가나 처가), 재산상속 관련 등으로 나뉜다.

고려- 조선 전기에는 장자(長子)와 차자(次子)를 가리지 않고 거주지를 이동하고, 제사도 자녀가 돌아가면서 지냈으며, 부모가 남긴 재산도 아들딸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되다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장자와 아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이 눈길을 끌었다.

족보 기록에도 변화가 있었다. 조선 전기 문화 류(柳)씨 족보에는 아들딸 구별하지 않고(외손까지) 출생 순으로 올라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19세기) 경주 이(李)씨 족보에는 아들부터 기록되어 있었다. 아들이 없을 때는 계자(양자)를 올렸다고 한다.

김 교사는 "제주 고씨와 평강 채씨는 옛날부터 옥구현과 임피현의 대표적인 성씨로 자리 잡았고, 특히 제주 고씨는 혼인으로 군산에 거주한 성씨가 많을 정도로 영향이 컸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강곡선을 긋고 있다"며 "이는 군산의 경제가 침체되는 시기와 일치하며, 이러한 현상은 군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했다.

김두헌 교사는 "미래 군산은 교육이 더욱 활성화되어, 훌륭한 문중보다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돼야 발전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강의를 마쳤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군산학 #김두헌 #성씨와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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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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