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코의 신사 건물들
장윤선
아버지가 심장혈관이 막혀 수술을 할 무렵, 나는 분당의 가장 비싼 동네에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었다. 수술이 임박하자 아버지는 눈물이 많아졌다. 13시간쯤 걸리는 대수술인지라 의사도 긴장하며 우리들 모두에게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게 했다.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돌려 우리를 차례로 병원에 불러들였고, 그때마다 한바탕 눈물 바람이 일어났다. 예전에 식구들을 벌벌 떨게 했던 그 모습은 다 어딜 가고 이렇게 쇠약해졌는지, 아버지의 약한 모습은 분노와 연민을 동시 불러왔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수술 전날, 병원을 찾은 나에게 엄마는 통장 하나를 쥐어 주었다.
"니 아버지가 너네들한테 주는 거야. 50만 원씩 넣었다. 아버지가 줄 게 그것밖에 없다고 막 울어쌓는다. 이거 어디 딴 데 쓰지 말고 잘 모셔둬라."그날 수업은 휴강이었다. 나는 집에 가지 않고 분당 정자동의 휘황찬란한 거리를 몇 시간이나 걸었다. '젠장, 이놈의 동네는 왜 이렇게 잘사는 거냐' 속으로 욕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을 힘들게 살았어도 통장에 50만 원밖에 못 넣어주는데 말이다. 그날 병원에서 커피를 마실 때 엄마가 눈물을 찍어내며 들려주었던 이야기들도 머릿속을 휘감아 왔다.
"니 아버지가 청도에서 부산에 왔을 때가 열여덟 살이었는데, 거기서 부두 일을 하다가 만두가게에 취직했거든. 그 왜, 설날에 니 아버지 만두 빚는 거 보면 기가 막히게 잘 하잖냐? 그게 다 그때 배운 거야. 하도 먹을 게 없어서 시장 바닥에서 우거지 주워다가 끓여먹고도 살았단다. 그때 제대로 못 먹고 커서 이렇게 병이 많은가 부다.그러다가 서울에 와서 주산 부기 배워갖고 목재상에 취직한 거야. 나중에 사업 벌릴 때는 외할아버지가 도와줬지. 너도 알잖아. 친할아버지는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어린 나이에 고모들에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사느라고 고생 진짜 많이 했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었다. 그리고 여기 오기 며칠 전, 나는 기왕 가는 거 나의 뿌리를 더 생각해볼 양으로 아직도 살아 계시는 작은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작은할아버지가 우리 친가 쪽의 '살아 있는 화석'이라는 엄마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작은할머니의 병환을 핑계 삼아 생전 하지도 않던 전화를 넣으니, 작은할아버지는 한참만에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할머니의 병환에 대해 몇 마디 나눈 후, 나는 일본에 갈 일이 있는데, 우리 식구들이 어디서 살았는지 좀 알고 싶다고 운을 뗐다. 전화기 건너편에서는 좀 어리둥절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잠시 후 대뜸 전화기가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야, 우린 빨갱이 아냐. 진짜 너무 먹고살 게 없어서 일본에 갔다가 네 삼촌이 그리 된 거지 절대 공산주의하고는 아니라니까.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이게 무슨 소린지 깨닫는 데는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작은 할어버지를 진정시키고 나서 내가 알고 싶은 이야기를 듣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잊혀진 과거, 고개를 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