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드라마 <추적자>는 한국사회 지배권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SBS
<추적자>를 보면서 뭔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면 그것은 실로 엽기적인 한국의 현실을 겨우 16부작 미니시리즈에 다 담기 어려운 물리적 한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추적자>에는 피의사실을 공표하며 여론 재판하는 검찰도 없고 그것을 받아쓰며 사실을 왜곡하는 황색언론도 없다. 겨우 이 정도의 현실고발만으로도 시청자들의 반응이 폭발적인 것은 그만큼 답답한 현실의 '비현실성'을 반영한 결과가 아닐까? 권력의 나팔수로 변해버린 방송사 뉴스들은 오히려 드라마를 쓰고 있고, 온가족의 오락거리인 드라마가 되레 현실을 고발하는 이 기막힌 2012년 한국의 '비현실적인 현실'이 바로 <추적자>의 힘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그런 비현실적 현실성을 생각해 본다면, 9년 전의 내게 기사를 부탁했던 소설 같은 그 사건도 실제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건의 블랙박스, 전화 한 통한편, <추적자>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던 '어떻게'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BBK 사건이나 천안함 사건, 혹은 10.26 선거 디도스 공격 사건처럼 굵직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갖가지 의혹을 제기하며 자기들만의 그럴싸한 '소설'을 써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나는 꼼수다>가 인기를 얻은 중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모두를 음모론으로 일축한다. 음모론이 실체적 진실이 아닌 하나의 가설로만 남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은 경우 그것이 '어떻게'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건희가 법조계를 움직여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음모론'에는 항상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따라다닌다. MB 정부가 들어선 뒤에 국세청과 검찰과 국정원 등 온갖 권력기관을 다 동원해 반대파를 부당하게 제거했다는 '음모론'에도 "어떻게 법치국가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생긴다(두 경우 모두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히려 쉽다. 이건희와 MB가 직접적인 이익을 보기 때문이다).
드라마 <추적자>는 여기에 놀랄만한 대답을 제공한다. 바로 '전화 한 통'이다. 서 회장은 전화 한 통으로 검찰총수와 정계 거물과 언론을 움직인다. 강동윤도 비서관을 통한 전화 한 통이면 못 하는 일이 없다. 경찰과 국세청이 움직이고 대법관도 머리를 조아린다.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알 길이 없는, 모든 사건의 그 블랙박스는 수사기관이 철저하게 실체적 진실을 밝혀 공개하지 않는 이상 그들만의 블랙박스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블랙박스의 내용물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추적자>는 그 블랙박스를 매우 단순한 과정으로 처리해버렸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아니 가장 비현실적인 현실성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최근에 공개된 그런 부류의 '블랙박스'에 따르면 한일군사정보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한 시간쯤 전 새누리당의 이한구 원내대표가 김성환 외교부장관에게 '전화 한 통'을 넣은 뒤에 협정체결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국가의 중대지사가 이런 식으로 처리되는 과정도 놀랍지만, 나는 <추적자>의 선견지명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협정을 의결하기 위해 비밀리에 국무회의를 연 것도 누군가의 '전화 한 통'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수 있다.
"구두, 영상, 전자, 자기 또는 문서의 형태이거나 장비 또는 기술의 형태"인 군사기밀을 나눠주고 그 사후통제까지 상대국에게 일임하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보협정임에도 (관련기사:
http://bit.ly/P0Dzbe) 대통령 몰래 처리되었다는 거짓말을 모르는 척 믿어주는 모양새도 어이가 없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나중에 절차상에 문제가 있었다고 '격노'했다는 뉴스는 드라마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에 비하면 얼마나 우스운 수준인가 새삼 깨닫게 해 준다. 그런 국무회의가 '전화 한 통' 이상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 군사정보협정을 의결했을까? 나중에 대통령의 '격노'가 뻔히 예상되는데도?